2화. 프란츠 할더 (1)
“···믿을 수 없군.”
나는 참모장교가 타다 준 커피를 마시며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거리에는 온통 붉은 하켄크로이츠가 펄럭이고 있었고, 브란덴부르크 문 양옆
으로 서있던 흉측한 콘크리트 장벽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이제 두 번 다시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파괴되지도 분단되지도 않
은 베를린의 풍경이었다.
“정말로, 정말로 1940년이란 말인가?”
솔직하게 말해서,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사실 총참모본부의 사무실 정도야 만들려고 하면 얼마든지 재현할 수 있는 거
니까.
하지만 창밖의 저 풍경은 달랐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미국과 소련이 갑자기 화해한 것이 아니라면··· 아니,
만약 그렇다고 해도 하켄크로이츠가 저렇게 거리에 걸려 있을 리 없지.”
이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과거로 돌아왔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 독소전쟁이 시작되기 전 바로 그 순간으로.
“후···.”
나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깊게 심호흡을 내쉬었다. 그러나 두근거
리는 가슴을 도무지 주체할 수가 없었다.
마치 주마등처럼, 머릿속으로 지나간 나날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간다.
폐허가 된 도시,
지옥 같았던 시가전,
후퇴 불가 명령과 조여오는 포위망,
추위와 굶주림에 죽어가는 부하들,
비행장을 가득 채운 시체 떼,
굴욕적인 패배와 항복.
그리고
후회와 절망뿐이었던 비참한 말년까지.
그 모든 일들이 다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이젠 다가올 미래가 되었다.
이것은 비극인가? 희극인가?
베를린의 풍경을 바라보는 내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내 입가엔 미소가 가득했다.
오늘은 1940년 12월 7일.
바르바로사 작전도, 스탈린그라드 전투도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내 부하들도 아직 죽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패배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 있다.
지금의 나라면.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적들의 작전을 모두 알고 있는 지금의 나라면 이 전쟁
의 결과를 바꿀 수 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
가슴이 벅차오른다.
후회와 절망으로만 가득하던 내 마음속에, 한 줄기 희망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기뻐하기엔 아직 이르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소련과 미국이라는 두 거인을 쓰
러뜨려야 한다는 의미였으니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기에, 과거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이 무척이나 많았다.
‘그럼 일단···.’
“참모차장님?”
그때,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상념을 멈췄다. 고개를 돌려보니 참모장교
하나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이제 곧 참모총장님께 가보셔야 할 시간입니다.”
“그런 일정이 있었나?”
“예, 그렇습니다.”
“···알겠네.”
참모총장과의 면담이라.
지금 참모총장직을 수행하는 것은 프란츠 할더 상급대장이었다.
그가 왜 나를 불렀는지는 알 수 없지 않지만, 이 시기에 나와 논의할 일이라
면 십중팔구 바르바로사 작전 계획에 관한 것일 터.
‘마침 잘됐군.’
나는 마르크스의 보고서를 가지고 할더의 사무실로 향했다.
*****
참모총장실 앞에 선 나는 두 번 문을 두드린 뒤 말했다.
“참모차장입니다.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들어오게.”
나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할더도 바르바로사 작전을 검토하던 중이었는지, 테이블 위에는 작전 전역이
그려진 거대한 지도가 놓여 있었다.
“그래, 일단 자리에 앉게. 마르크스 대령에게서 작전 계획은 인수 받았나?”
작전 계획이라. 아마 방금 건네받은 이 보고서를 말하는 거겠지.
“예, 오늘 아침에 받았습니다.”
“좋아, 그럼 대략적인 내용은 인지하고 있겠군. 자네는 그 보고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할더는 마치 나를 시험하듯이 지긋이 바라보았다.
마르크스가 작성해서 제출한 「동부전선 작전 계획」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우선, 개전 초기에 국경선에 배치된 적의 주력부대를 기습적으로 포위해서 섬
멸한다.
그럼 일거에 다수의 병력을 잃은 소련군은 충격에 빠져 무너질 것이다.
이렇게 소련군을 무너뜨린 뒤, 아군은 주력부대를 세 갈래로 나누어 각각 레
닌그라드, 모스크바, 하리코프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재정비와 보급을 위한 약간의 휴식을 가진 뒤, 최종 목표인
A-A라인과 카프카스 산맥의 유전지대까지 진격한다는 것이었다.
바르바로사 작전.png
‘자,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사실 할더가 원하는 대답은 알고 있다.
그는 이 보고서의 내용대로 작전을 수행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대답을
기대하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소련은 바르바로사 작전과 같은 몇 개월 동안의 단기적인 군사 작전으로 무너
뜨릴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상대가 결코 아니었다.
‘할더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고 신임을 얻는 것은 쉽다. 하지만 이 전쟁을 승
리로 이끌기 위해선 여기서 할더를 설득해야만 한다.’
결국, 나는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제 개인적인 견해입니다만, 이 계획은 실행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어렵다고?”
“예. 마르크스 대령의 계획에는 2가지 심각한 문제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
건 바로 지나치게 촉박한 일정과 보급, 수송의 어려움입니다.”
거기까지 말한 뒤, 나는 할더의 표정을 살폈다.
“음, 좋네. 계속해보게.”
다행히도 할더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먼저 일정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바르바로사 작전의 시작점에서 모스크바까지의 거리는 약 1000km, 최종 목표
인 A-A라인까지는 거의 1500km에 달합니다.
그런데 현재의 계획에서는 A-A 라인에 도달하기까지 최소 9주에서 늦어도 17
주면 충분할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망입니다.”
실제로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독일군은 믿기 힘들 정도로 놀라운 쾌속 진격을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9주가 지났을 때 아군은 A-A라인은커녕 중간 목표
지점조차도 점령하지 못한 상태였다.
결국, 우리는 계획보다 한참 늦은 10월에 모스크바에 도달했고, 동계장비조차
갖추지 못한 상태로 전투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자네 말대로 러시아는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지. 그래서 개전 초기에 기습
적인 기동전으로 소련군을 포위 섬멸하기로 한 것 아닌가. 그것이 성공하기만
한다면 그 이후의 전역은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을 걸세.”
“그럼 적들이 지연전을 펼치거나 파르티잔이 나타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러시아는 도로 사정이 열악하고 제대로 된 간선 도로가 드물어서 아군의 진격
로와 보급로가 매우 한정되어 있습니다. 만약 적들이 지연 전술을 펼친다면
아군의 일정이 모두 틀어질 것입니다.”
내 반박에 할더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여전히 이성적이고 차분한 태도로 대답
했다.
“그래, 그럴 가능성도 없진 않겠지. 하지만 소련놈들이 그렇게 영리한 작전을
펼칠 수 있을지는 의문이군.
그리고, 만약 놈들이 파르티잔이나 지연전을 펼친다고 해도 주력을 잃어버린
놈들이 병력을 끌어 모아봤자 얼마나 되겠는가?”
‘젠장··· 무슨 말이 안 통하는군.’
할더는 개전 직후 포위 섬멸을 통해 적의 주력부대 200개 사단을 전멸시키기
만 하면 나머지 소련군은 급속도로 붕괴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있
었다.
그리고 할더가 저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프랑스에서는 실
제로 그 일이 일어났었으니까.
그러나 소련은 다르다. 저들은 200개 사단이 아니라, 100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해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 거대한 제국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사실을 아는 건 나뿐이란 말이지.’
결국, 나는 다음 논리를 꺼내 들었다.
“만약 각하의 말씀대로 소련군의 주력부대를 섬멸했다고 가정하더라도 두 번
째, 보급의 문제가 남습니다.
바르바로사 작전과 같은 대규모 기동전을 펼친다면 보급로의 거리는 최소 수
백 킬로미터에 달하게 될 것입니다.
게다가 아군은 주공을 세 방향으로 나눠서 동시에 공세를 진행합니다. 그 말
인즉슨, 보급로의 길이도 3배로 늘어난다는 말입니다. 이는 결코 우리의 수송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지금 당장은 부족할지 몰라도, 점령지의 철도와 트럭을 노획해서 사용하면
충분히 감당해낼 수 있네.”
“노획을 통해 충분한 철도와 트럭을 확보했다고 가정해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
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소련의 도로 사정은 너무나도 열악하고 소련의 철
도는 독일의 표준궤와 규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소련의 철도를 사용하려면 기갑부대의 진격 속도에 맞춰서 궤도
를 새로 깔거나 국경 지대에서 노획한 소련제 기관차로 모든 화물을 옮겨 실
어야 할 겁니다.”
내 말에 할더는 말없이 지도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그라도 3개 집단군, 총원 380만 명의 보급에 대해 쉽게 단언하지는 못
하리라.
잠시 불편한 침묵이 이어진 끝에, 할더가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 보급에 관해서 어려움과 불확실성이 크다는 것은 인정하겠네. 하지만
전쟁에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예측하고 준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야. 그런 세
부적인 문제는 작전을 진행하면서 충분히 조정할 수 있네.”
“하지만 각하···!”
“파울루스 중장.”
더 이상의 반론은 허락하지 않는다는 듯, 할더는 차갑게 내 말을 끊었다.
“자네의 걱정은 이해하네. 그래, 작전을 진행하다 보면 자네가 말한 일들이
발생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런 문제는 임기응변과 우리 병사들의 뛰어난
의지력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걸세.”
자신만만한 할더의 말에 나는 순간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임기응변··· 말씀이십니까?”
“그래.”
뭔가가 이상했다.
할더는 낙관적이고 모험적이긴 했지만, 결코 무능하거나 멍청한 인물은 아니
었다.
내가 할더에게 직언을 하고자 결심한 것도 그라면 합리적인 판단을 해주리라
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그 대답은 무엇이란 말인가.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떨군 채 말을 잇지 못하는 나에게, 할더는 마지막 선고를 내렸다.
“파울루스 중장.”
“······예, 각하.”
“자네가 제기한 문제점들은 타당하네. 하지만 작전의 목표를 변경할 수는 없
어. 우리는 무조건 내년 안에 소련을 무너뜨려야 하네.
그러니, 우리의 작전 계획 안에서 문제를 해결할 방책을 한번 고민해보게.”
작가의말
사실 총참모본부는 베를린 남부의 초센에 위치했었기 때문에 창 밖으로
브란덴부르크 문이 보이지는 않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