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예정된 우연 …… (14)
# 150
그 날 밤의 제국군 진영―. 제국군, 그들은 조용했다. 묵묵히 자신들의
할 일만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저 조용히, 다음날의 전투를 준비할 뿐.
군데군데 화톳불이 피워져 있었고, 그 사이로 초병들이 눈을 번득이며 주
위를 살폈다.
그리고 로제레트의 막사. 로제레트는 책상 앞에 앉아 입을 한일자로 굳게
다물고 무엇인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고민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는 아니
었다. 그러나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그의 얼굴은 진중했다. 한 시
간, 두 시간. 밤이 지나 이윽고 아침이 밝아 왔지만 그는 아직도 책상 앞
에 앉아 있었다. 태양이 지평선 위로 모습을 드러내고 아침 노을이 전장을
붉게 물들일 때까지도 그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막사에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고, 그제서야 로제레트
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로제레트가 입을 열었다.
"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용병들, 쥐새끼같아. 아직 못 찾았어."
"그렇군요."
로제레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상관없겠지요. 처리는 언제라도 좋습니다. 그보다 이곳의 일을
먼저 해결해야 할 겁니다."
"……세이어, 말이냐."
"그렇습니다."
로제레트는 천천히 의자에 등을 기댔다. 깍지 낀 손을 책상 위에 올려 놓
으며 그가 말했다.
"더 이상 그를 놔둘 수는 없습니다. 이번엔 반드시 처리해 주십시오."
"물론 그럴 생각이야."
세다라는 히죽 웃었다.
"그보다 어땠어, 어제는? 그들의 실력은 잘 시험해 봤어?"
"그 정도는 견뎌내 주어야겠지요. 기대했던 대로였습니다."
"그럼 계획은 예정대로 실행인가?"
"그대로 실행하십시오."
"……좋아."
세다라는 이를 드러내고 미소지었다.
"그럼 슬슬 가 보도록 할까. 단번에 모두 작살내 버리겠어."
"가십시오. 저도 전군을 출정시키겠습니다."
"그러지."
세다라는 클클거리고 웃었다. 잠시 후 그의 모습이 사라졌고, 그의 기척
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것을 확인하자 로제레트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
기대하고 있습니다, 세이어 씨, 당신에게." 그가 몸을 일으켰다. 이제 총
공격을 가할 시점이 다가온 것이었다.
"모든 일은 예정된 대로……."
그가 조용히 읊조렸다.
린은 깨어 있었다. 어젯밤 내내 세실은 돌아오지 않았고, 그것이 의미하
는 바를 모를 리 없는 린이 편안하게 잠들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은 당연
한 일이었다. 물론 그녀가 질투로 눈이 뒤집힐 것도 뻔한 것이었다. 왠지
열이 나는 것 같았다. 린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으로 감싸쥐며 침대
에 앉아 세이어와 세실에 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의 불편한 마음을 눈치챘는지 아룬은 주위를 살피겠다고 말하고 방을
나갔다. 혼자 남은 린은 모든 것에 대한 분노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모
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째서 일이 이런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거지
? 그녀는 맹렬한 증오심을 느꼈다.
다르가 방에 들어온 것은 그 때였다.
"오래간만이네요. 누나."
들려온 목소리에 린은 눈을 떴다. 눈앞에 한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애교
있어 보이는 인상의 귀여운 소년. 린은 미간을 찌푸렸다.
"……다르?"
"기억하시는군요."
다르는 싱긋 웃었다. 린은 이상하다는 듯이 눈썹을 움찔했다.
"너, 언제 여기에 온 거야? 게다가 지금은 전쟁중인데?"
"후훗. 그건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중요하지 않다고?"
"중요하지 않죠. 적어도 린 누나에게는."
다르는 예의 그 호감이 가는 미소를 지었다.
"누나에게 중요한 건 오직 세이어 형 하나 뿐 아니었던가요?"
"……그래. 그렇지."
"어때요? 일은 잘 되었나요?"
다르의 물음에 린은 풀이 죽어 대답했다.
"……아니. 전혀 잘 되지 않았어. 최악인걸."
순간 린의 눈동자가 증오로 이글거렸다. 표독스러운 눈초리로 다르를 쏘
아보며 그녀가 외쳤다.
"모두 너 때문이야! 나만을 위해 주는 세이어 님이라고? 오히려 더 멀어
졌을 뿐이라고!"
"이런. 진정하세요."
다르는 태연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 표정에 더욱 화가 난 린이 한
층 소리 높여 외쳤다.
"진정? 진정이라고? 내가, 진정하게 됐어? 넌 왜 왔어? 날 세이어 님과
멀어지게 하려고?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온 거야!"
"뭘 좀 잊은 것 같네요, 누난."
다르는 피식 웃었다.
"일은 모두 실행된 게 아녜요. 말했었잖아요? 태아, 깨끗하게 '지워' 드
리겠다고요. 마법으로― 원래부터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만들어 주겠다고
제가 그랬잖아요?"
"아……. 그래, 그랬지."
다시 린의 기세가 죽었다.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지금, 지워 주려고 온 거야?"
"아뇨. 아직은 아녜요."
다르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빙그레 미소짓고 있었다.
"기억하고 있어요, '에-르테'를?"
"이것…… 말이야?"
린은 품 속의 스크롤을 꺼내 보였다. 다르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요. 그것. 그걸 사용하세요."
"이걸…… 사용하라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죠. 그걸 사용하면 저도 말했던 대로 약속을 지
킬게요. 하지만 지금은 일단 세이어 형을 다시 강하게 해야 할 때예요. 그
리고 나서 누나도 떳떳할 수 있게 되는 거예요. 걱정 마요. 다 잘 될 테니
."
얼도당토않은 말이었다. 조금만 깊게 생각해보면 그의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간단히 눈치챌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린의 귀에는 그
럴듯하게만 들릴 뿐이었다. 이미 그녀의 머리를 가득 채운 질투와 증오로
인해 그녀는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이걸로 그분의 힘을 되돌리면 되는 거지?"
"그래요."
다르는 히죽, 하고 웃었다.
"린! 린!"
당황 섞인 외침과 함께 아룬이 뛰어들어온 것은 다르가 방을 나가고 난
직후였다. 눈에 띄게 당황하는 그 모습에 린이 물었다.
"왜 그래요, 오빠?"
"적들이 총공격을 가해온 것 같아!"
"예? 총공격이라면 어제도 이미……."
"어제의 공격과는 틀려, 적들은 마족을……."
그가 그렇게 말하는 그 순간, 린의 방에 '그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는 린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밖에서부터 들려오는 함성, 고함,
절규. 전투의 소리를. 나타난 검은 옷의 사내들로부터 린을 막아서며 아룬
이 속삭였다.
"마족들이야."
"예……?"
"기본적으로 어제와 같은 패턴…… 하지만 수준이 틀려. 적병들의 수준도
, 마족들의 수준도. 게다가 마족들의 출현도……."
"그러고 말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우리를 상대해 보는 게 어떤가?"
세 마족 중 가운데의 마족이 빈정거리듯이 말했다. 아룬은 눈썹을 꿈틀했
다. 폭발시키듯이 마나를 끌어올리며 그가 외쳤다.
"흥,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어!"
아룬은 양손을 위로 뻗었고, 그의 부름에 따라 4대 하급 정령, 즉 샐러맨
더, 언딘, 실프, 놈이 소환되었다. 불, 물, 바람, 대지의 정령들. 방 안에
소환된 정령들의 모습에 마족은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비웃음의 모양으로
.
"실례가 이만저만이 아니군. 손님 대접을 이렇게밖에 할 수 없나?"
"닥쳐! 가라, 샐러맨더!"
아룬이 외쳤다. 초조해하고 있는 듯한 느낌에 린은 불안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룬이 한층 소리 높여 외쳤다.
"샐러맨더! 폭염을 저들에게 선사하는 거다! 그리고 실프, 너는 저들을
갈가리 찢어!"
콰콰콰콰콰쾅!
방 안을 폭염이 뒤덮었다. 그리고 동시에 폭풍이 방을 휩쓸었다. 불길에
휩싸인 가구가 조각조각난 채 이리저리 튕겨나갔다. 다만, 아룬과 린은 실
프의 방어막으로 보호받고 있었다.
강력한 공격이었다. 하급 정령의 수준은 이미 간단히 뛰어넘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어지간한 마족들도 간단히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룬은 다시 한 번 발악하듯이 외쳤다.
"적을 부숴! 샐러맨더!"
그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이었다. 오늘 나타난 마족들은 애초부터 어제의 마족들과는 수준 자체가
틀리다는 것을.
폭염이 걷히고 바람이 그치자 엉망으로 변한 방 안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리고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는 세 마족의 형체도. 상처는 커녕 옷조각
하나조차 찢어지지 않았다.
"제길."
아룬은 신음을 토했다. 마족의 입가에 파인 웃음의 골이 더욱 깊어졌다.
"그것이 주인으로서의 예인가? 그렇다면, 우리도 손님으로서의 예를 치뤄
야 하겠지."
"실프!"
아룬이 외쳤다. 순간 아룬과 린의 눈앞에 바람의 장벽이 올려쳐져 그들과
의 사이를 가로막았고, 아룬은 태세를 늦추지 않은 채 린에게 말했다.
"린, 빠져나갈 수 있겠어?"
"그, 글쎄요."
린은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는 우그러지고 깨져나간 창틀이 있었다. 2층
이긴 했지만 그리 높지 않아, 빠져나가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았다.
린은 빠르게 말했다.
"가능할 것 같아요."
"그렇군."
아룬은 히죽 웃었다. 직후 그가 외쳤다.
"실프!"
"아?"
순간 린은 바람이 자신의 몸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 부드럽게 자신의 몸
을 감싼 바람은 어느새 그녀의 몸을 공중으로 들어올렸고, 그 다음 순간에
는 이미 그녀를 창 밖으로 빼내고 있었다. 놀란 린이 외쳤다.
"오빠!?"
"세이어 씨를 찾아!"
아룬은 그렇게 외쳤다. 이미 실프의 방어막은 마족들로 인해 찢겨나갔고
마족들이 그에게로 짓쳐들어오고 있었다. 동시에 린도 느낄 수 있었다. 아
룬은 그들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아룬은 그들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린은 무사히 지면에 내려섰다.
콰앙!
강렬한 폭음과 함께 2층 린의 방에서 빛이 번쩍했다. 그리고 터져나오는
불꽃. 린은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쳤다. "오빠! 아룬 오빠!" 하지만, 대답
은 없었다.
'마치 그 때와 같아…… 하지만, 하지만 왜? 왜 또!?'
갑작스런 상황에 린은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자신이 처한 상
황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고, 또한 이제부터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
인지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세이어를 찾아야 했다. 지금의 상황을 역전
시킬 수 있는 것은 세이어 뿐이었다.
'되돌려야. 되돌려야 해.'
그녀는 품 속의 스크롤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뒤로 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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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소설을 씀에 있어 신경 쓰는 것― 군더더기 없는 전개, 깔끔한
묘사.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진 것 같습니다만, 아직도 갈 길은 멀다는
것을 느낍니다. 다행이지요. 더욱더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니까요. 이런
정도의 실력에서 멈추고 만다면 전 글 때려치울 겁니다. (웃음)
Neissy였습니다.
번 호 : 17831 / 21069 등록일 : 2001년 06월 09일 16:42
등록자 : NEISSY 조 회 : 86 건
제 목 : [연재] ◈ 데스트로이아 ◈ # 151
데스트로이아 DestroiA
Fa-las de sy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