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예정된 우연 …… (12)
# 148
날이 밝았다. 지평선 너머로 천천히 태양이 떠올랐고, 이윽고 대지는 조
용히 붉은 색으로 물들어갔다. 그리고 그 붉은 색의 대지 저 편으로 제국
의 대군이 진군해오고 있는 것을 던드 시의 사람들은 볼 수 있었다. 새벽
의 여명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제국군의 모습은 놀랍도록 위압적으로 보였
다.
적절하게 젖은 새벽의 공기는 분명 상쾌했지만, 그럼에도 왠지 던드의 병
사들은 목이 까끌해짐을 느꼈다. 제국군의 수에 압도된 탓은 아니었다. 물
론 압도적으로 많은 저 숫자도 이 위압감의 한 이유일 수는 있겠지만, 제
국군의 수가 적었다 하더라도 이 위압감이 줄어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국군은 조용했다. 진군하는 군사가 외칠 법한 함성소리조차 들리지 않
았다. 그들은 철저하게 대열을 지켜 고요히 진군해오고 있었으며, 그 사각
의 대열은 지평선 너머까지 길게 늘어져 묘한 긴장감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이 던드 성에서도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할 즈음에 그
들은 진군을 멈추고 대열을 정비했다. 또한 그 동시에, 던드 성에서도 제
국군을 맞아 싸우기 위한 진열을 재정비했다.
폭풍 전의 고요. 기묘한 적막 가운데에서 전쟁의 새벽이 밝았다.
던드 성의 사람들은 매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복도를 급하게 왔다
갔다하는 사람들로 성내는 조용하면서도 시끄러웠고, 그 분위기는 이제 정
말로 전투가 눈앞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해 주고 있었다.
방 안에서 이니아를 손질하던 세이어는 그 발소리들을 들으며 조용히 미
소지었다. 그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때가 다가온 모양입니다, 이니아."
여전히 감정이 거의 실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이니아는 그 목소리에서
약간의 흥분된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 그녀가 물었다.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지?>
"피차 마찬가지일 겁니다."
세이어는 입가를 끌어당겼다.
"매듭을 지어야겠지요, 세다라, 그와. 어쨌든 이번엔 분명 어떤 식으로든
결말이 날 테니까요. 그에겐 되돌려줄 빚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너도 그 녀석하고는 꽤나 악연이었구나. 이래저래 말이지.
아마 시도아 시를 떠나자마자 레이아다 시에서 당한 거였지?>
이니아의 말에 세이어는 쓴웃음을 지었다.
"유쾌하지 못한 기억입니다."
<너한테 유쾌한 기억이 얼마나 된다고. 어쨌거나, 그 녀석 덕에 레이아다
에서 그 곤욕을 치뤘고, 린과 세실은 부모를 잃고, 그놈을 쫓다가 어영부
영 전쟁에 휘말리고 성기사가 된 거네?>
"……어쩐지 기쁜 듯한 말투입니다만."
<너도, 꽤나 화려한 인생을 사는 것 같아.>
이니아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미소지었다. "……." 잠깐의 침묵 후, 이윽
고 세이어는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이니아를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이니아가 말했다.
<자아, 과거를 끊을 준비는 끝난 거야?>
"끊을 생각은 없습니다. 부딪힐 겁니다."
세이어는 조용히 대답했다. 자기 자신에게 대답하는 듯한 어조였다.
"그것이 현재를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고, 또한 올바른 미래를
얻어낼 수 있는 방법일테니까요."
그렇게 말한 세이어는 이제 주저하지 않고 걸어나가 방을 나섰다. 그의
말대로 이제는 결말을 내야 할 때였다. 그 순간이 언제 올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그 시기가 임박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밖에서는 이미 네이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세이어의 모습을 발견한 네이
시가 생긋 미소지으며 말했다.
"가죠.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
"예."
짧게 대답하고 나서 세이어는 네이시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 그들
은 어제의 회의에서 결정한 대로, 당연히 있을 것이라고 예상되는 마족들
의 침입을 막아 내려고 하는 것이었다.
논의된 바에 따르면 병사는 병사들이, 마족은 세이어들이 막아낸다는 구
도였지만, 기실 말하자면 세이어들로서는 마족만 상대할 수는 없었다. 분
명히 말해 세이어들은 매우 큰 전력이었고, 마족만 상대하기에는 적군의
힘이 너무 컸다. 이 성 내의 병사들만으로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을 터였고
, 결국 세이어들도 병사들을 상대해 주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중노동을 눈앞에 두고도 여전히 쾌활한 네이시가 말했다.
"얼마나 갈까요?"
"예?"
언뜻 네이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세이어가 반문했다. 네이시는 빙그레
웃으며 다시 말했다.
"이번의 전투, 얼마나 갈까요?"
"하기 나름이겠지요."
세이어는 어깨를 으쓱했다. 여상스런 어조로 그가 덧붙였다.
"피차 오래 끄는 것은 좋지 않겠지만."
"그건 누구든 그렇겠지만……."
네이시는 생각에 잠긴 듯 했다. 그런 그의 옆모습이 왠지 피곤해 보이는
듯하다는 생각을 하며 세이어는 문득 예전에 들었던 이니아의 말을 떠올렸
다. "각자의 형편, 크세이데레이드…… 인가." 그가 중얼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군이 공격을 개시해왔다. 철저한 정공법. 특별한
장점도 단점도 없는 것이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무서운 것이었다. 제국군
자체의 강함과 압도적인 숫적 우세. 로제레트는 이 두 가지를 철저하게 이
용하고 있었다.
"기름을 부어라!"
워든 영주의 외침에 따라 병사들이 성벽을 기어올라오는 적병들에게 끓는
기름을 쏟아부었다. "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적병들이 추락하는 가운데
워든은 침중한 눈으로 전황을 살폈다.
'……좋지 않아.'
워든의 눈이 가늘어졌다. 분명히 말해 상황이 좋지 않았다. 적의 수에 비
해 아군의 수가 너무 적었다. 던드 성을 둘러싸고 공격을 가해오는 제국군
의 모습은 마치 먹이를 둘러싼 개미떼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농성에도 한
계가 있는 법, 이런 상황이 계속 지속된다면 결국 무너지고 말 것이란 사
실은 자명한 것이었다.
슈우우웅―.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때였다. "……이 소리는!" 워든은
흠칫하며 소리의 근원지로 고개를 돌렸고, 생각하던 것의 모습에 으득 어
금니를 깨물며 즉시 주위에 명령을 내렸다.
"투석! 몸을 낮춰라!"
퍽.
그러나 조금 늦었다. 고개를 돌린 워든의 눈에 투석에 직격당해 머리가
부스러진 채 허물어져가는 병사의 모습이 들어왔다. "ㅇ……." 무언가 말
하려던 병사는 머리에서 피를 흩뿌리며 망루에서 추락했고, 그 모습을 바
라보던 워든이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러고 있을 새가 없었다. 곧이어 제 2, 제 3의 투석이 날아온 것
이었다. 워든은 미간을 찌푸리며 성벽 바깥을 바라보았지만, 적들의 투석
기는 화살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나? 워든이 마음을 굳히려는 순간, 옆에서 한 여
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이트닝 선더볼트!" 기억에 있는 목소리였다
. 옆을 돌아본 워든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니리아 님!"
지직. 지지직.
제국군의 투석기― 수십 기의 투석기들이 있는 바로 그 위 하늘에서 진녹
색의 스파크가 튕겨 내리기 시작했다. 빠직. 빠지직. 강렬한 스파크로 제
국군의 진영이 대낮보다도 더 환하게 밝혀졌다. 그 섬광 속에서 제국군들
은 황급히 투석기를 버리고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직후,
콰쾅!
강렬한 충격음과 함께 낙뢰가 쏟아져 내렸고, 그 뒤에 남은 것은 검게 타
버린 투석기의 잔해 뿐이었다.
"굉장하군요!"
워든이 탄성을 내질렀다. 니리아는 쑥스러운 듯이 미소를 지었다.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주위를 살펴보느라 늦었어요."
"아니요, 딱 시기적절한 때에 와 주셨습니다!"
"그런가요? ……다행이네요."
그렇게 말하고 니리아는 전황을 살폈다. 니리아의 마법으로 된서리를 맞
은 제국군이었지만 주춤하는 기색은 없었다. 아니, 주춤하긴 커녕 오히려
더욱 더 기세를 타고 짓쳐들어오는 느낌이었다. 물론 니리아의 한 방으로
투석기가 모두 망가져 그렇게까지 위협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면 일시적인 균형 상태. 제국군으로서는 달갑지 않겠지. 이 균형
을 깨고자 한다면 제국군은 분명……,"
"마족을 투입할 시점입니다."
워든이 말했다. 니리아는 약간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고, 그는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저라도 그럴 겁니다."
"……그렇군요."
니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워든의 말대로였다. 이 시점에서 마족이
란 유효적절한 수단이었고, 사용하지 않는 쪽이 이상했다. 그리고 그 때문
에 그것을 막기 위해 세이어 등이 온 것이었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무의미하다는 것, 모르시지는 않을 텐데요."
마족 하나를 두동강내며 세이어가 말했다. 두동강난 마족은 샛노란 가루
를 흩날리며 바람에 산산히 흩어졌고, 세이어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다
음 마족을 찾았다. 그의 주위를 둘러싼 십수명의 마족들. 숫자가 늘었을
뿐 근본적으로 이전과 같은 패턴이었다.
"설마 이런 자들로 이곳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신 겁니까."
세이어는 정면의 적에게로 걸어갔다. 눈앞의 마족이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한 거침없는 걸음걸이였다. 오히려 물러선 것은 마족이었고, 걸음을 멈
추지 않으며 세이어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이곳에 제가 있다는 것을 모르시지는 않을 텐데요."
동시에 검광이 번쩍였고, 직후로 마족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었다. 푸
른 은광을 발하는 이니아를 슬쩍 내려다보며 세이어는 고개를 저었다.
"이해할 수 없군요."
"마족이 남아도는 모양이야."
한차례 마족 청소를 마친 네이시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부숴진 건물의
잔해 위에 주저앉아 있던 시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 넌 마법이 남아도는 모양이고."
"……에, 그런가?"
네이시는 볼을 긁적였다. 시린은 부스럭 몸을 일으키며 주위의 잔해를 눈
짓했다. 거리. 부숴진 건물과 깨져나간 보도블럭의 파편이 어지럽게 길에
뒤덮여 있었다. 시린이 말했다.
"마족이 부순 것 반, 네가 깨놓은 것 반. 오늘 싸우고 말 것도 아니면서
힘 좀 아끼지 그러냐."
"그럴까……. 하지만 이 정도로는 거의 느낌도 안 오는걸."
"……뭐야?"
"어, 그러니까, 이런 녀석들이라면 아무리 떼거지로 몰려와도 소용 없다
그거지. 물론 일반인에게라면 위협적인 상대이겠지만."
"……그래, 너 잘났다."
"알아줘서 고마워."
"……."
"좀 어정쩡하다는 생각 안 들어?"
무너진 담 위에 털썩 주저앉으며 네이시가 말했다. 시린은 그런 네이시를
내려다봄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말이냐?"
"마족 하나라도 일반인에겐 벅차. 하물며 지금처럼 십 수 녀석이면 말할
것도 없지. 일반인이 상대였다면 이렇게 많이 올 필요는 없었다구."
"일반인이 상대일 리가 없지. 그 난리가 있었는데. 이쪽에 우리들이 있다
는 걸 저쪽에서 모를 리가 없잖아?"
"그래, 맞아."
네이시는 기특하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시린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뭐냐?"
"뭐, 별로."
"……."
"하지만 생각해 보라구. 말했듯이 그 녀석들은 우리에겐 상대도 안 되는
녀석들이었단 말이야. 그렇다면 조금 이상하지 않아? 우리를 상대로 하지
않는 것 치고는 너무 강하고, 우리를 상대로 하는 것 치고는 너무 약해."
"뭐, 무슨 생각이 있겠지."
시린은 어깨를 으쓱했다.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다는 듯한 한가로운 어
조로 그가 말했다.
"그보다 당장 눈앞의 일이나 해결하는 게 어떨까. 또 오는 것 같은데."
"그럴까."
네이시는 여유롭게 몸을 일으켰다. 확실히 지금, 쉬고 있을 여유는 없었
다. 또다시 일단의 마족들이 성 안으로 진입해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시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한번에 몰아서 오면 안 되나. 귀찮게스리."
린과 세실은 아룬과 함께 방 안에 있었다. 사실 전력으로서는 마이너스가
될 뿐인 그들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아룬의 경우
는 예외지만, 그는 세이어의 부탁에 의해 린과 세실 등의 비전투 멤버를
지키고 있었다― 창 밖을 바라보던 세실이 중얼거렸다.
"보이는 게 없네."
그녀의 말대로, 이 영주관에서는 밖의 상황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짐작하
기 힘들었다. 보이는 것은 고작해야 성 내의 거리 정도였고, 그 너머는 성
벽으로 막혀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뭘 본다고."
아예 뒤에 물러난 채 의자에 앉아 있던 린이 비웃듯이 대답했다. "바보야
? 내 말 뜻이 뭔지도……," 발끈한 세실이 뒤를 돌아보며 소리치려는 순간
, 원래부터 밖이 보이든 안 보이든 상관없는 아룬이 입을 열었다.
"우리 편 사람들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해. 걱정할 필요 없을 거야. 그리
고 전황 쪽이라면, 성벽 근처에서의 공방이 지속되고 있고. 어쨌든 아직까
진 위태롭다는 느낌은 없어."
"어, ……그렇군요."
세실의 표정이 잠깐 바뀌었다. 안도하는 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해하
는 듯한 표정. 그런 그녀의 기색을 눈치챈 아룬이 빙긋 미소지으며 말했다
.
"걱정되니?"
"에? 어, 아뇨. 별로. 걱정은 안 해요. 그 사람, 강하니까요."
전혀 걱정이 안 된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지만. '누구씨 덕분에.' 세실은
린을 쏘아보았다. 그 시선에 린은 흠칫하고는 얼른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
렸다. 그녀는 세실이 무얼 말하려고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린은 품 속의 스크롤을 만지작거렸다. '나도 불안해. 하지만…….' 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아직은 안 돼. 아직은.' 지금 풀어준다면 세이
어는 분명 세실에게로 갈 것이다. 그럴 수는 없다. 이건 그걸 막는 유일한
수단이다. 결코 놓아 주고 싶지 않다. 아니, 놓아 줄 수 없다. 그가 다른
사람에게로 가는 것 따위 보고 싶지 않다.
'내겐 이것 외에 길이 없어.'
린은 밖이 보이지 않는 창문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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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매우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우선 이렇게 오래간만에 연재를 재개
하게 된 것에 대한 변명으로 최근의 근황을 말해볼까 합니다.
예, 저는 수원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요 이 주일 사이 짐도 제대로
못 풀고 있어서, 더더구나 컴퓨터를 사용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지
요. 겨우겨우 어제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이제서야 올리게
된 것입니다.
또한 All F를 면키 위하여 이제부터 레포트 땜질을 열심히 해 대야 하
기 때문에, 일 이 주일, 빠른 연재는 힘들 것 같습니다. 양해해 주세요.
어쨌거나, 열심히 써 보겠습니다. 이얍!
Neissy였습니다.
번 호 : 17745 / 21066 등록일 : 2001년 06월 06일 22:35
등록자 : NEISSY 조 회 : 90 건
제 목 : [연재] ◈ 데스트로이아 ◈ # 149
데스트로이아 DestroiA
Fa-las de sy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