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어긋남 …… (12)
"뭐… 좀 오래 걸린 게 사실이긴 하지."
그렇게 말하며 그―는 슬며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쨌거나 이렇게 다시 만났으니 된 거지 뭐. 안 그래?"
"그렇군요……, 이니아."
세이어는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를 띠었다.
"그렇지 않아도 마나가 고정되어버려 곤란을 겪고 있던 중이었는데, 이니
아가 돌아오셨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적절한 때에 잘
와 주셨습니다."
"마나가 고정돼?"
이니아는 미간을 조금 찡그렸다. 의아한 눈으로 세이어를 살펴보며 그녀
가 말했다.
"……뭐야, 너 이거 왜 이래?"
"글쎄요."
세이어가 씁쓸하게 웃었다.
"어떻게 된 거야? 그새 크세이데레이드를 당하다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거
야?"
"일이라…… 일이 있었다면 있었다고 할 수 있겠군요."
"엥? 그게 무슨 소리야?"
이니아가 물었다. 하지만 세이어는 대답할 생각이 없는 듯 쓴웃음을 머금
은 얼굴로 가만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천천히 왼편 허리춤의 검집을―그
안에 검은 꽂혀 있지 않았다― 가리키며 그가 말했다.
"일단 검의 형태로 변환하여 주십시오, 이니아."
"……이잉?"
난데없는 세이어의 말에 이니아가 눈을 살짝 찌푸렸다. 질문을 구하는 눈
으로 그녀가 세이어를 쳐다보았지만, 세이어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한두 마디로 끝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게다가 지금은 저도 가
보아야 할 곳이 있으니까요. 이니아께서 계속 그 모습이라면 조금 곤란
해질 것 같군요."
"가 보아야 할 곳?"
이니아가 의문을 표시했다. 적어도 그녀가 알기로는 린이 있는 곳 외에
특별히 세이어가 갈 만한 곳이 없었던 것이었다. 때문에, 다음에 들려온
세이어의 답변은 그녀로서는 상당히 의외의 것이었다.
"예. 세실 씨의 방에 가야 합니다."
"……세실? 아까도 들었던 이름인데, 누구지?"
이니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세이어는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세스레이나 세이라―. 린 씨의 동생입니다."
"하아?"
이니아가 경악의 탄성을 내질렀다. 자못 눈을 크게 뜨며 그녀가 말했다.
"그럼 너 지금, 설마……."
"글쎄요."
세이어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런 것보다, 우선 검의 형태로 변환하여 주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동
안 있었던 일들에 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뭐, 알겠어."
적어도 지금은 이야기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렷다. 어차피 다그친다고 대
답을 얻을 수 있을 만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으니만큼,
이니아는 일단 세이어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잘 갔다 오셨어요?"
세실이 세이어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래, 갔던 일은 어떻게 됐어요?"
"일단은…… 잘 되었습니다."
달칵. 조용히 방문을 닫으며 세이어가 답했다. 세실이 피식 웃었다.
"일단은, 이예요?"
"완전히는 아니니까요."
세이어는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반쯤은 자조인 듯한 미소를 지
은 채 세이어가 말을 이었다.
"제 힘이 봉인되어버린 문제에 관해서는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에 이야
기할 생각입니다."
"그래도 괜찮아요? 사흘 전만 해도……."
세실이 걱정스레 물었다. 그녀는 입술을 살풋 깨물고 세이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인사치레로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걱정하고 있
는 것 같았다. 세이어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지나친 걱정입니다… 세실 씨. 게다가, 주기만 하려고 하지 말고 받기도
좀 해 보라고 하신 것은 바로 세실 씨 자신이 아니었습니까?"
"그렇다고……."
세실이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세이어가 자신을 놀리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그녀가 알기로는 세이어의 힘은 거의 다
깎여나가 버렸다. 그 스스로 그것을 말하지 않았던가?
……한데, 입가에 떠오른 저 미소는 대체 뭘까.
세실은 약간 찌푸린 눈으로 세이어를 바라보았다. 세이어는 여전히 왠지
여유로워 보이는 미소를 입가에 띤 채였다. "……?" 문득, 세이어의 모습
이 아까 방을 나설 때와 달라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실은 시선을
위에서 아래로 옮기며 찬찬히 세이어의 모습을 살폈다.
"응?"
그녀의 시선이 세이어의 허리춤에서 멈췄다. 기억하기로는, 아까까진 저
검집에 검이 꽂혀 있지 않았다. 마족들과의 격투로 검이 심하게 상해 검을
버렸던 것이었다.
"검…… 생겼네요?"
세실이 물었고, 세이어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흐음."
그리고 그 대답에, 세실은 미간을 조금 더 찌푸렸다. 대답하는 거의 태도
로 보아선 뭔가 대단한 검을 구한 것 같은데, 그래 보아야 검은 검일 뿐이
지 않는가? 검을 잡는 사람의 능력이 부족하다면 아무리 대단한 명검을 쥔
다고 해도 별 의미가 없다. 세실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검이 있으면 갑자기 능력이 늘기라도 하는 건가요? 뭘
그렇게 웃고 있는 거예요?"
"적어도 마족 정도는 벨 수 있습니다. 마왕 정도라면 무리겠지만."
세이어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의외로 여유가 있는 그의 대답에 세실
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한 그녀의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이 세이어는 입
가에 빙긋이 웃음을 띠었다.
"말하자면, 이 검은 특별한 마법검입니다. 스스로의 의지를 지닌, 최상급
의 검이지요."
"의지를 지닌 검?"
세실의 시선이 슬쩍 이니아에게로 돌려졌다. "아아." 고개를 끄덕이며 세
이어는 천천히 이니아를 뽑았다. 스릉―. 부드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섬짓한
소리와 함께 이니아가 검집에서 뽑혀져 나왔다. 길이 약 1예즈 정도의 곧
게 뻗은 장검, 닿는 것은 무엇이든 베어버릴 수 있을 것 같이 예리해 보이
는 검날은 은색으로 약간 푸른 기를 띠고 있었다.
손잡이를 세실 쪽으로 향하게 돌려 건네며 세이어가 말했다.
"한번 잡아 보시겠습니까?"
"그러죠."
그게 뭐 어렵겠냐는 듯 대수롭잖게 말하며 세실은 이니아의 손잡이를 잡
았다.
<왁!>
"꺅!"
갑자기 들려온 고함 소리에 세실이 화들짝 놀라며 이니아를 던져버렸다.
던져진 이니아는 공중에서 빙글 한바퀴 돌더니 정확히 세이어의 얼굴을 향
해 날아들었다. 그 모양에 세실은 사색이 되어버렸고, 세이어는 쓴웃음과
함께 이니아를 제대로 받아내었다.
세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에."
세이어는 빙그레 웃으며 다시 한번 이니아를 세실에게로 내밀었고, 세실
은 머뭇거리며 이니아를 받아들었다. 이내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
다.
<아하하하하. 반응이 확실하네. 너, 마음에 들어.>
"에에?"
세실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세이어와 이니
아를 번갈아 바라보며 그녀는 붕어처럼 입을 뻥끗거렸고, 세이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말씀드린대로, '특별한 마법검'입니다."
"에, 에엣……."
아무래도 세실은 이 상황이 상당히 당혹스러운 모양이었다. 물론 그녀도
자아를 지닌 마법검이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식으로
알고 있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을 막상 실제로 접할 때의 느낌은 생각과는
사뭇 다른 법이다.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던 세실이 다시 시선을 이니아에게로 돌렸다.
"음, 에에…, 그러니까."
<이니아라고 불러 줘.>
이니아는 쾌활하게 웃었다.
<그나저나 이건 조금 의외네. 그 세이어가 자기 검을 이렇게 쉽게 다른
사람에게 넘겨 주다니. 아무래도 심상찮아. 너, 세이어랑 어디까지 갔어
?>
"엣? 어디까지 가다뇨?"
세실이 당황해서 말했다. <쿡쿡쿡.> 그런 세실의 반응에 이니아가 깔깔대
며 웃어댔다. 한참을 즐겁게 웃어대던 이니아가 이윽고 겨우 웃음을 멈추
고 말했다.
<역시 반응이 확실하다니깐. 놀려먹는 재미가 있어.>
"……에. 에에?"
그제서야 자신이 놀림받았다는 것을 눈치챈 세실이 얼굴을 붉혔지만, 이
니아는 깔깔거리고 웃어댈 뿐이었다. 부아가 치민 세실이 이윽고 뭐라고
막 하려는 순간, 이니아가 조금 진지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마음에 든다는 거야. 세이어는 너무 어둡거든.>
"……?"
<그 녀석하고 같이 있으면 덩달아 나까지 어두워져. 뭐 지금은 상당히 나
아진 것 같지만, 그래도 여전히 어두워. 하긴, 처음엔 인간 같지도 않았
으니까. 아, 원래부터 인간은 아니었나.>
이니아는 쉴새없이 조잘거렸다. '수, 수다쟁이잖아, 이 검…….' 생각하
며 세실은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뭐랄까, 어쩐지 이건 검이라기보다는 웬
여자애와―그것도 상당히 마이 페이스의― 대화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인간이 아니라고요?"
문득 세실이 물었다.
<응? 몰라? 세이어가 이야기 안 해줬어?>
"뭘요?"
<아항―. 이야기 안 해줬구나. 그래그래, 그럼 이야기해 줄게. 세이어는
말이야,…>
"거기까지입니다."
이니아가 신나서 막 이야기를 하려는 찰나, 세이어의 목소리가 그녀의 말
을 가로막았다. "아?" 세실은 고개를 들었다. 세이어의 손이 이니아에 닿
아 있었다.
"세이어 씨?"
"말이 너무 길었습니다, 이니아. 별로 제삼자의 입으로 들려주고 싶은 이
야기는 아니군요."
세이어는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이니아가 투덜댔다.
<별로 숨길 이유도 없잖아?>
"특별히 말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차피 언젠가는 말하게 될 것 아냐?>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은."
<언제까지 말 안할 건데? 차라리 지금 말해버리는 게 낫잖아?>
"그건 제가 결정할 일입니다."
세이어가 차갑게 답했다.
"분명히 말했습니다. 제삼자의 입으로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라고.
"
<너…….>
"절 도우실 생각이시라면 지금은 조용히 해 주십시오. 필요이상의 이야기
로 일을 망칠 이유는 없습니다."
<…….>
이니아는 침묵했고, 세이어는 조용히 세실에게 눈짓했다. "…아." 세실은
이니아를 다시 세이어에게 돌려주었고, 세이어는 이니아를 검집에 꽂아 넣
었다. 쓴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그가 말했다.
"곤란한 검입니다."
"세이어 씨, 그런데 세이어 씨가 정말……."
"그 이야기는 나중에."
세이어는 가볍게 오른손을 펼쳐보이며 말했다.
"때가 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곤란합니다."
"……."
세실은 세이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서
려 있었다. 뭔가 말해서는 곤란한 일일까? 세실은 생각했다. 하지만 세이
어가 인간이 아니라니, 그건 무슨 뜻일까? 타 종족과의 혼혈이기라도 한
건가? 어쨌거나,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다.
세이어는 조용히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감정해 보이는 눈동자……,
어쩐지 쓸쓸해 보인다. 마치 외로움에 떠는 어린아이처럼.
"……쿡." 세실은 피식 웃어버렸다. 어린아이라니, 어처구니없다. 게다가
외로움이라니…….
"뭐,"
세실이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세이어가 의아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세실은 빙
긋 웃으며 한차례 찡긋 윙크했다.
"괜찮아요, 말하고 싶지 않다면 말하지 않아도."
"……아아."
"뭐. 이렇게 심각해질만큼 대단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데요. 그리고
그다지 궁금한 것도 아니고. 아무려면 어때요? 말해 주지 않을 것도 아
니지 않아요?"
"……그렇군요."
세이어는 빙긋이 웃음지었다. 세실은 이니아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쨌거나 한가지는 분명하네요. 이니아라는 그 검, 확실히 뭔가 대단하
긴 한 것 같아요. 특별하다는 것 하나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겠어요."
"특별하다…… 그렇군요."
세이어는 소리내어 웃었다.
"하지만 덕분에 여간 곤란한 것이 아닙니다. 하기는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도움이 되는 일이 더 많지 않은가요? 그렇지 않다면 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을 테니까요."
"그렇겠지요."
세이어는 씁쓸하게 웃었다.
'확실히…….'
확실히, '특별한 존재'라는 것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그로 인해서 곤
란함을 겪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서 도움을 얻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쪽
이냐고 묻는다면, 분명히 말해 도움을 얻는 쪽이다.
도움을 주기도 하고, 또한 받기도 하고. 그것이 살아간다는 것일 게다.
때로는 그것 때문에 상처를 입기도 하겠지만, 그로 인한 손해보다는 유익
이 더 많다.
'……변했군, 나.'
한가지는 확실하다. 적어도 세이어 그에게 있어서, 지금 눈앞에 있는 세
실이라는 이 사람에게는 다른 이들과 구분되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 특별
하다… 라는 것 하나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뭘 그렇게 봐요?"
시선을 조금 다른 곳으로 돌리며 세실이 말했다. 그제서야 자신이 계속
세실을 응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세이어가 머쓱하게 미소지으며 자
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 전 이만 가봐야 할 것 같군요."
"흐음. 더 있다 가도 괜찮은데요."
"아니요, 늦었으니까요."
세이어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해가 산 속으로 숨어버린지도 이미
오래, 이미 밖은 완연한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세이어는 빙그레 미소지
으며 세실에게 인사했다.
"그럼."
====================
오래간만입니다……ㅠ_ㅠ 이제서야 연재를 재개하게 된 것에 대하여 특
별히 뭐라고 변명할 말은 없고, 다만 성탄절 행사 연습 때문에 바빴다는
것만 말하고 싶습니다. (……그게 변명 아니면 뭐냐!)
확실히 상당히 늦었습니다만…… 오늘 올린 것도 겨우 한 거여요. (…
뭘까 이 말투는) 새벽송까지 돌고 나서 한 시간 정도가 지나자 그동안
쌓였던 피로가 한꺼번에……. 오늘은 3시에 일어났습니다. (물론 오후 3
시) 피로로 입 안이 헐어버렸네요. 흑흑.
(……이상까지 연재가 늦어진 것에 대한 변명)
에, 그동안 독촉해 주신 여러분들께 정말로 감사 드립니다. 특히 메일
까지 보내주신 아프린 님―. & 리키냐, 쥐샐양. (또 누가 있던가… 아아
, 기억 나지 않는군요. 불만 있으신 분은 제게 메모라도 보내 주시면…)
어쨌거나 피로가 극에 달해 현실이 현실 같지 않고 꿈속을 헤매는 듯
몽롱∼한 정신이었기 때문에. 현실을 현실이라 부르지 못하고 꿈을 꿈이
라 부르지 못하는 호현호몽이 어쩌구 저쩌구…… (퍽!)
크리스마스 기념 잡담이라도 올릴까 했습니다만, 오늘 연재를 재개한
것만도 빠듯한 터라 관두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대신에 크리스마스 하루
지난 날 기념 잡담(……그게 뭐냐?;)을 올리기로 했사오니 많이 많이 기
대하여 주세요. (아무도 기대 안 해!)
에에, 그럼…… Neissy였습니다. ^-^;;
추신. 감상이나 비평, 언제나 환영입니다.
(물론 얼굴에 철판깔고 추천도 환영……;;)
번 호 : 12910 / 21187 등록일 : 2000년 12월 30일 22:44
등록자 : NEISSY 조 회 : 142 건
제 목 : [연재] ◈ 데스트로이아 ◈ # 131
데스트로이아 DestroiA
Fa-las de sy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