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어긋남 …… (10)
어둡다.
춥다.
축축하다.
"우……."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 뼛속 깊이까지 스며든 한기, 외로움이, 고독이
온몸을 파고든다.
"우우……."
신음 소리.
이것은 누구의 신음인가? 내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우우우……."
그런 것을 구분한다한들 지금 그것이 무엇에 소용이 있을까.
고통당하는 것이 누구인지, 신음하는 것이 누구인지.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젠 짙은 안개 속에 빠져버리기라도 한 듯이 모호하기만 하다. 알 수 없
다.
꿈틀.
그는 손가락을 조금 움직였다. 리단의 뒷골목. 어둠 속, 캄캄하기만 한
가운데서 무엇인가가 잡혔다. 그것은 차디찬 금속의 감촉, 바로 롱 소드의
느낌이었다.
그리고 프렌테이즈는 안도감을 느꼈다.
"큭."
하지만 동시에 그는 실소하고 말았다. 안도감이라니, 대체 어떻게 안도감
을 느꼈단 말인가. 이 알량한 검 한자루로 무엇을 하겠다는 말인가.
"……빌어먹을."
그는 나직이 욕설을 내뱉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빌어먹을 운명……. 개 같은 다하난. 대체 어디까지 추락할 것인가. 이젠
지겹기만 하다. 더 이상…… 더 이상 아무것도 하고싶지 않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어차피 자신은 저 다하난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사
실을. 이용당하고, 이용당하고, 또 이용당할 뿐이었다. 철저했다. 올가미
처럼 얽어맨 그의 계략에 묶여버린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죽였다…….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 그들을 모두 죽여야만 했다. 그래서
죽였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모두 죽여 버렸다.
"우우……."
프렌테이지는 머리를 무릎 사이로 파묻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우우우……."
쿵…… 쿵…… 쿵…….
고동 소리. 관자놀이가 짓눌리듯 아려왔다. 박동. 일정한 주기 안에서,
조용히 그러나 강하게 그것은 약동하고 있었다.
머리가 후끈후끈했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있는 정신이 아니었다. "크으으……." 프렌테이즈는 낮게 신음
했다. 뒤틀린 비명이 잇사이로 새어나왔다.
……고독. 그것은 고독이었다. 외로움을 달랠 친구가 없다. 힘을 합칠 수
있을 동료도 존재하지 않는다. 연인도, 친구도, 가족도, 없다. 그 스스로
가 모두 없애버렸다. 비록 그것이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는 해도, 프
렌테이즈 자신이 그 일을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사실이 프렌테이즈를 철저히 혼자일 수 밖에 없게 했다.
지금의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자책감과 고독 뿐. 결국 그에게는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이었다.
"……큭큭."
프렌테이즈는 웃었다. 고개를 무릎 사이에 파묻은 채, 어깨를 들썩거리며
. 그것은 차라리 희열이었다.
"―웃기는군."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프렌테이즈는 흠칫 하며 고개를 쳐들었다. 어둠 속
에서 한 인영이 희미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은 프렌테이즈가 알
고 있는 자의 것이었고, 때문에 그는 다음 순간 비명처럼 외쳤다.
"세라린!"
"흥……."
허둥지둥 옆에 놓여있던 롱 소드를 집어드는 프렌테이즈를 바라보며 세라
린이 차가운 냉소를 흘렸다. 싸늘한 눈으로 프렌테이즈의 행동을 바라보며
세라린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 반갑다고 해야하나."
"…내게 무슨 일이지?"
프렌테이즈가 으르렁댔다. 어느새 그의 손에 들린 롱 소드의 날이 세라린
의 목에 닿아 있었다. 세라린은 힐끗 눈동자를 움직여 롱 소드를 바라보곤
피식 조소를 지었다.
"위협인가? 아직 죽지는 않았다고 말하고 싶은 거군."
"무슨 말을…."
"후."
나직한 조소와 함꼐 세라린은 왼손을 들어올려 롱 소드의 날을 붙들었다.
"크윽…?" 당황한 프렌테이즈가 롱 소드를 빼내려 했지만 검은 미동도 하
지 않았다. 세라린이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하지만 시체에게는 필요없는 물건이지."
파칵! 세라린은 롱 소드를 붙든 손에 힘을 가했고, 검은 허무하게 박살나
버렸다. "형편없군." 세라린은 조용히 프렌테이즈를 바라보았다. "그 정도
로 내게 상처를 입힐 수 있다고 생각했나?"
"네놈……."
힐트밖에 남아있지 않은 검을 한쪽으로 내던져 버린 프렌테이즈가 이를
갈았다. 세라린이 흥미롭다는 얼굴을 했다.
"아직 기세는 죽지 않았나…."
"네 놈 따위에게…."
"하지만 그뿐이겠지."
턱.
세라린이 오른손이 프렌테이즈의 얼굴을 붙들었다. "큭." 강한 악력에 프
렌테이즈가 작게 신음했다. "허세는 통하지 않아." 세라린은 그대로 프렌
테이즈를 들어올리며 조소 띤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원래대로라면 한 방 먹여야 하겠지만…… 지금의 네놈을 상대로는 그럴
마음도 들지 않는군."
세라린은 프렌테이즈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풀썩. 프렌테이즈는 그대
로 바닥에 엎어졌다.
"궁금하군."
비틀비틀 몸을 일으키는 프렌테이즈를 바라보며 세라린이 문득 말했다.
프렌테이즈는 한껏 인상을 찌푸리며 세라린을 노려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
"글쎄, 아무래도 좋지만……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잘 알겠지만 네놈은 내 상대가 될 수 없으니까."
"무슨 개소리를……!"
"얌전히 닥치고 들어라. 적어도 아직은 널 죽일 생각이 없으니까."
"……내가 네 말을 들어야 할 이유라도 있나?"
프렌테이즈가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두 눈에 가득 증오를 품은 채 그는
세라린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분명히 말하지만, 난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아. 그 누구에게도! 아무도
날 강제할 수 없어. 그것이 누구든 내게 명령할 권리를 지닌 자는 없단
말이다!"
"……생각보다도 더 어리석군."
세라린은 프렌테이즈의 시선을 가볍게 받아넘기며 조소를 터뜨렸다.
"내게 허세는 통하지 않는다고 했을텐데?"
"허세 따위가……!"
"시끄럽게 짖지 마라. 다하난의 개."
세라린은 싸늘한 시선으로 프렌테이즈를 노려보았다. 오싹할 정도의 살기
에 프렌테이즈가 순간 움찔하며 뒤로 두어 발짝 물러섰다. 조소 어린 눈빛
으로 그를 응시하며 세라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하난에게 속박되어 있는 주제에 헛소릴 지껄이지마라. 역겨우니까. 누
구에게도 굴복하지 않는다고? 강제당하지도 않고, 명령도 받지 않는다?
되지도 않는 허세따윈 집어치우는 쪽이 좋을 텐데."
"네놈……!"
"엘렌."
세라린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에 프렌테이즈의 얼굴색이 변했다. 새하얗게
질려버린 그의 얼굴이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일그러지고 있었지만 세라린
은 아랑곳하지 않고 차가운 어투로 말을 이어갔다.
"시드. 바넷사. 류드. 윌리엄. 셰릴. ―알고 있을테지, 이 이름들은."
"……그만."
"모를 리가 없겠지. 네가 네 손으로 죽인 네 연인, 네 친우, 네 가족들의
이름이니까. 내가 모르고 있으리라 생각했나? 다하난에게 씌워서 한 마
을을 멸망시켜버린 자의 이름을. 네가……."
"그만해!"
프렌테이즈가 비명을 질렀다. 세라린은 조용히 미소지으며 그를 바라보았
다.
"역시 스스로도 알고 있는 것 같군."
"닥쳐…… 닥쳐…… 닥쳐!"
"그래서 물어 보고 싶은 게 있다."
우득. 자신에게 덤벼드는 프렌테이즈의 팔을 꺾어 뒤로 돌리며 세라린이
말했다. 프렌테이즈는 이를 뿌득 갈며 세라린을 바라보았다.
"개소리 집어치우지 않으면……!"
"너의 의지냐. 다하난의 의지냐."
"……!"
프렌테이즈는 조금 놀란 눈을 했다. 그에게 있어선 약간 의외의 질문이었
던 것이었다.
"……그걸… 물으려고 온 건가?"
"그럼 그 외의 다른 이유라도 있을 것 같나?"
세라린은 프렌테이즈의 팔을 놓았다.
"내가 보기에 네게 다하난을 따를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내게 이 외에 '힘'을 얻을 방법은 없다."
"어리석은 것은 여전하군."
세라린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
다.
"그래서 정말 그것으로 다하난을 쓰러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
"이용당하기를 바라는가? 그런건가?"
프렌테이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네가 그 힘을 택한다면, 넌 이용당할 거다. 처음부터 끝까지."
프렌테이즈는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후우." 세라린은 천천히 한숨
을 내쉬더니, 몸을 돌려 골목 밖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프렌테이즈는 묵묵히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또 보자."
세라린은 그렇게 말하며 골목 밖으로 빠져나갔다.
"세라린."
막 골목 밖으로 나서는 세라린의 옆으로 퓨어린이 다가왔다. 하지만 그는
무엇인가를 곰곰히 생각하는 모양인지 심각한 얼굴로 퓨어린의 말에 반응
하지 않았다. "……세라린, 세라린!" 퓨어린이 몇번 더 그를 불러 보았지
만 여전히 그는 반응하지 않았고, 은근히 부아가 치민 퓨어린이 크게 고함
을 지르려고 막 한껏 숨을 들이키는 찰나, 세라린이 퓨어린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생각해?"
"……우흡, 푸앗! …캑캑."
이 갑작스럽다면 갑작스러운 상황에 움찔해버린 퓨어린이 목에 걸리고 만
숨을 뱉어내려 기침을 했고, 세라린은 멀뚱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캐캑, …후우." 몇차례 마른 기침을 한 퓨어린이 이윽고 눈살을 찌푸리며
외쳤다.
"갑자기 그러면 어떡해!"
"뭘."
"그러니까, 내가 널 부르니까 반응이 없다가, 그래서 크게 소리치려는 찰
나에……."
"그래서 내가 잘못했다는 건가?'
"……뭐야, 그 '난 잘못 없어'라는 얼굴은. 뻔뻔함의 극치를 달리잖아."
"별로."
세라린은 가볍게 한차례 어깨를 으쓱했다. "……." 퓨어린은 한숨을 내쉬
었다.
"……관두자."
"그래. 뭐,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지만… 어떻게 생각해?"
"아무래도 좋은 게 아니잖아… 뭘 어떻게 생각하는데?"
"신에게서 받은 힘으로 신을 쓰러뜨리겠다는 것."
세라린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퓨어린이 미간을 조금 오므렸다.
"프렌테이즈 이야기야?"
"그래…… 프렌테이즈. ―아니, 그일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고."
"…뭐야 그게."
"역시, 어리석은 행동일테지?"
세라린은 쓸쓸하게 미소지었다.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그의 눈동
자를 바라보며 퓨어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 있어? 왜 그래?"
"대답 부탁해."
"……나원참. 정말 답답하게 구네."
퓨어린은 왼손을 들어 거칠게 이마를 긁었다. 어째 오늘따라 세라린의 행
동이 조금 이상했다. 아까 프렌테이즈에게도 조금 감정적으로 굴고. 대답
을 얻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굳이 프렌테이즈가 죽여버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까지는 없었다.
퓨어린은 끙 하고 작게 신음을 토하고는 세라린의 질문에 답했다.
"……당연히 어리석은 행동이지. 다하난의 힘으로 다하난을 쓰러뜨리겠다
니, 어불성설이지. 그게 말이나 돼?"
"그렇군."
세라린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둡게 가라앉은 표정이었다.
"…세라린?"
퓨어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왜 그러는 거야?"
"그래. …다하난의 힘으로 다하난을 쓰러뜨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겠지.
"
"……?"
"그렇다면 사라딘의 힘으로 사라딘을 쓰러뜨리는 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
겠지."
퓨어린이 입이 크게 벌어졌다. 동공이 확대되었고, 그녀는 놀란 토끼마냥
커진 눈으로 세라린을 바라보았다. "세라린!?"
세라린은 음울하게 미소지었다.
"내 이 힘은 모두 사라딘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지……."
"세라린, 설마……?"
"아니, 확실한 것은 아니야."
세라린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퓨어린이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그
에게 물었다.
"그럼……?"
"그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두려는 것 뿐이야."
"…뭐야, 놀랬잖아."
퓨어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질 나쁜 농담이야, 세라린."
"그런가."
"당연하지! 절대로 안 되는 일이야. 그건 정말로 최악의 상황이라구."
"그래. 최악의 상황… 이겠지."
세라린은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말이 되지 않는다. 아니, 말이 되지 않아야만 하는 일이다. 창조주를 적
대하게 될 이유가 없다. 그럴 이유도 전혀 없고, 또한 그럴만한 일도 전혀
없었다. 그럴 일이 일어날 리가 없는 것이다.
'프렌테이즈 신디라이클.'
하지만 그렇다면 대체 무엇때문인걸까? 이 기분나쁜 예감은. 단지 이상한
느낌일 뿐이라고 치부해 버린다면 간단한 일이겠지만, 왠지 그럴 수가 없
다.
'신의 힘으로 신을 쓰러뜨리려는 자.'
세라린의 눈이 음울하게 빛났다.
====================
안녕하세요오오오∼!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이제부터는 적어도 이틀에
한편은 올리려 하오니 많이 기대해 주세요. (…기대는 무슨 얼어죽을)
으음. 그나저나, 역시 문장력이 많이 딸린다는 사실을 새삼 느낍니다.
에에잇∼! 오로지 계속 쓰는 것 뿐이다! 쓰고, 쓰고, 또 쓰는 것이다∼!
힘을 내서, 계속 쓰는 것인 것이다!!
……라는 이유로, 팬메일 좀 부탁드립니다. 연재도 꾸준하게 안하는 주
제에 참으로 염치없는 부탁입니다만, 팬멜이 많으면 많을수록(…꼭 많이
받아보기라도 한다는 듯이 말하는군) 작가는 힘을 내서 빠르게 연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BGM : 베토벤의 '운명')
Neissy였습니다.
추신. 감상이나 비평, 언제나 환영입니다.
번 호 : 12465 / 21165 등록일 : 2000년 12월 12일 22:47
등록자 : NEISSY 조 회 : 142 건
제 목 : [연재] ◈ 데스트로이아 ◈ # 129
데스트로이아 DestroiA
Fa-las de sy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