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스트로이어-130화 (131/158)
  • 5. 어긋남 …… (9)

    "네이시 씨라면 이미 눈치채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조금, 말하고 싶

    은 것이 있습니다."

    "응? 말하고 싶은 것이라고요?"

    "예……. 아, 여러분들도 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세이어는 궁금한 표정을 하고 있는 세실, 니리아, 시린 등에게도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그의 입가가 조금 자조적인 미소를 띠었다. "근일 내로 해

    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으니… 지금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세이어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지금의 전 마법, 혹은 마나와 관련된 전반적인 모든 행동이 불가능합니

    다."

    "에엣!?"

    네이시와 니리아는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세이어의 말은 꽤 충격적인

    말이었던 것이었다. "……?" 반면에 마법에 대해 잘 모르는 세실과 시린은

    멀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분위기로 보아 뭔가 크게 잘못되었나 보다고

    짐작은 할 수 있었지만, 원래 그런 것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었으니 세

    이어의 말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것을 눈치챈 세이어가 쓴웃음을 띤 채 부연설명했다.

    "제 거의 모든 힘이 깎였다는 뜻입니다. 검에 마나를 불어넣는 것조차 불

    가능한 지금의 저는 그저 보통의 검사일 뿐입니다."

    세실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럼!"

    "예……. 지금의 저로선 마족 하나도 상대할 수 없습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세실은 진지한 표정을 했다. 사실 그녀에게 있어서 세이어가 강하냐 그렇

    지 못하냐 하는 것은 별다른 문제가 되지 못했다. 다만 지금 그녀가 신경

    쓰는 것은 단 한가지. 세실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이윽고 짤막하게 한숨

    을 내쉬며 물어왔다.

    "……언니 때문에 그렇게 된 거죠?"

    "그렇습니다."

    세이어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역시……." 세실은 으득 이를 악물었

    다. 정말이지 이 언니란 작자, 어디까지 할 건지 궁금하기까지 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다니는 거야?

    "……흠, 아무래도 좋습니다만."

    시린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제부터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예상하시는 대로입니다."

    세이어는 조용히 대답했다.

    "아무래도 한동안 여러분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할 것 같습니다. 지금의

    전 단지 방해가 될 뿐…… 일이 이렇게 되어 죄송합니다만……,"

    "아하핫."

    돌연 네이시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연갈색 눈동자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빙그레 미소 띤 얼굴로 네이시는 조용히 말했다.

    "그렇게 저자세로 나올 건 없잖아요, 세이어 씨. 잊었어요? 우린 '동료'

    라구요. 서로서로 돕고 살아가는 게 당연하잖아요? 당연히! 우린 세이어

    씨를 도울 거라구요."

    "이봐, 이봐. '우리'라면서 나까지 한꺼번에 도매금으로 넘기지 마."

    시린이 조금 딱딱한 어투로 말했다. 그 어조에 네이시는 조금 눈살을 찌

    푸리며 시린을 돌아보았지만, 이내 그는 다시 얼굴을 폈다. 시린은 희미하

    게 미소를 띠고 있었던 것이었다.

    시린은 입가를 끌어당겨 씨익 웃었다.

    "기억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저와 세이어 씨가 처음 만났을 때 세이어 씨

    께서 뭐라고 하셨는지 아십니까?"

    "글쎄요."

    "따라오든지 어쩌든지 상관은 없지만, 최소한 방해는 되지 말아달라… 그

    런 요지의 말을 하셨었죠."

    그렇게 말한 시린이 한차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보면 의기

    양양해 보이기도 한 미소였다. 가볍게 손가락을 흔들며 그가 말을 이었다.

    "형세 역전이라, 세상일이란 게 참 재미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

    십니까?"

    "……그래서 하고싶으신 말이 무엇입니까?"

    "아, 뭐 간단한 겁니다. 세이어 씨를 도와드리겠다는 거죠. 어차피 처음

    만났을 때 세이어 씨를 따라간다는 조건이 그거였고, 그건 지금까지도

    유효한 약속이니까요."

    "그렇군요."

    세이어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보면 그의 인생에서, 이런 식으로

    나마 다른 사람의 신뢰를 얻는 것은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던 것이었다.

    그가 세라린에게서 갈라져 나와 처음 겪었던 그 사건 이후로, 세이어는 누

    구에게도 신뢰를 주지 않았고 또 받지도 않았다. 물론 이것이 보통 말하는

    '신뢰'와 비교할 때 상당히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만, 세이어에게 있어선

    분명 상당한 사건이었다.

    무언가 변해가고 있었다. 그것이 세이어에게 좋은 일일지 나쁜 일일지는

    끝까지 가 보아야 알게 될 일이겠지만.

    "세이어 씨," 세실이 입을 열었다. 그녀 또한 방긋 미소짓고 있었다. "세

    상은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니잖아요? 기쁜 일이 있으면 함께 즐거워하고,

    또 어려운 일이 있으면 함께 이겨나가고, 왜, 기쁨을 나누면 두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도 있잖아요."

    "맞아요."

    니리아가 맞장구쳤다.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누는 거예요."

    "음, 저기 니리아."

    네이시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그 말을 하면서 왜 날 보는 거야?"

    "응? 뭐 찔리는 거라도 있어?"

    "……별로."

    네이시는 조금 입술을 삐죽이다가 이윽고 불쾌한 한숨을 토했다. 그런 네

    이시를 바라보던 시린이 피식 웃었다. "역시." 무언가 상당히 다양한 의미

    가 내포된 듯한 이 한마디에 네이시는 눈을 돌려 그를 조금 쏘아봐 주었다

    .

    "……너 말야."

    "응? 아, 세이어 씨하고 하던 말 계속해야지. 어째 이거 잠깐 옆길로 샌

    것 같은데?"

    그렇게 시린이 너스레를 떨었고, 시린치고는 너무도 유연한 이 대응에 네

    이시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으드득. 하다못해 시린한테마저 눌려버리다니

    .

    "재미있지 않아요?"

    물끄러미 그 모양을 바라보고 있는 세이어에게 세실이 말을 걸어왔다. 세

    이어는 작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동료들입니다."

    "그렇죠?"

    세실은 빙그레 웃었다.

    "살아간다는 건 그래서 즐거운 거예요. 뭐가 되었든지, 나눌 수 있는 사

    람이 옆에 있으니까요."

    "나눌 수 있는 사람……."

    "세상을 자기 혼자서만 살아간다고 생각한다면, 그만큼 불행한 사람도 없

    는 거예요. 굳이 외로움을 자청할 필요는 없잖아요? 함께 기뻐해주고 함

    께 슬퍼해줄 사람이 옆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에요."

    "……그렇군요."

    세이어는 고개를 끄덕이는 세실을 바라보다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함

    께라…… 하지만, 예전의 그에게는 함께 있을 사람이 없었다. 어쩌면 일부

    러 그것을 피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어느 쪽이든, '함께'라는 것에 세이

    어는 익숙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실이 무엇을 말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세실은 지금 그를 위로해 주고 있는 것이었

    다.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어두운 얼굴 하지 말아요."

    세실은 슬쩍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리고 적어도, 세이어 씨를 걱정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잊지 마

    세요."

    주점이란 곳은 재미있는 곳이다. 이곳 프리네리아 대륙에서, 주점은 말

    그대로 술집인 동시에 음식점이기도 하고, 더불어 여관의 역할까지 수행해

    내기도 한다. 이렇게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는 주점이니만큼, 이 주점에

    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들기 마련이다.

    '라이프 사이즈 헤븐'이라는 조금 이상한 이름의 이 주점도 그에 예외는

    아니었다.

    "이봐, 아가씨."

    올백으로 빗어 넘긴 금발과 느물거리는 표정, 그리고 유들유들한 태도―.

    '난 건달이다!'라고 외치고 있는 듯한 남자가 카운터에서 홀로 술을 마시

    고 있는 여성에게 말을 걸어왔다.

    "술 한잔 어때? 우리 인생에 관해 진지한 토론이나 좀 해 보자구."

    여성이 냉소를 흘렸다. 176센티예즈 정도 되어 보이는 키의 그녀는 상당

    한 미인이었는데, 청순해 보이는 얼굴과 약간 날카로운 눈매가 조화되어

    묘한 색기를 흘리고 있었다. 윤기 흐르는 흑발을 길게 기른 그녀가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꺼져."

    남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으득. 화를 애써 참는 얼굴로 그가

    말했다.

    "지금… 뭐라고 지껄였냐?"

    "꺼지라고 했다."

    "이런 빌어먹을 년이…, 조금 예쁘장하게 생겼다고… 욱!?"

    촤악. 여성은 마시고 있던 술잔을 들어 그대로 남자의 얼굴에다 대고 뿌

    려버렸다. 꽤나 도수가 높은 술인 듯, 냄새만으로도 얼굴이 후끈해지는 느

    낌이었다. "꺼지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화륵! 그리고 남자는 정말로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우, 우아아아악!"

    "부, 불이다!"

    얼굴에 불이 붙은 남자는 당황해서 주점 안을 굴렀고, 곧 주점 안에는 일

    대 대소동이 일어났다. 와르릉. 쨍강, 와장창. 남자가 구르는 곳마다 테이

    블이 엎어졌고, 식기들이 작살났다. 그리고……,

    쿠당탕. 어억.

    "이 새끼 뭐야!"

    "이게 어딜 굴러와!?"

    퍽. 푸팍.

    그리고 잠시 후에는 난투극이 벌어지게 되었다. ―실은 난투극이라기보다

    는 일방적인 린치지만― 주먹질, 발길질, 그리고 기타 등등. 테이블이 부

    숴지고 의자가 날아다니는 주점 안에서 이미 대부분의 손님들은 빠져나간

    지 오래였다. 물론 이 사건의 주동자인 그 여성도 어느새 빠져나가고 없었

    다. 주점 안에 남은 것은 오직 불쌍한 한 남자의 힘찬 비명소리 뿐이었다.

    "…흐흥."

    콧노래를 부르며 여유있게 주점을 빠져나가는 그녀를 한 목소리가 불러세

    웠다.

    "퓨어린."

    퓨어린은 약간 움찔하더니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흑발을

    길게 기른 장신의 남자가 팔짱을 끼고 건물 벽에 기대서 있었다. 그가 피

    식 웃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또 소동인건가?"

    "귀찮게 치근덕거려서 조금 손 봐준 것 뿐이라구."

    퓨어린이 투덜거렸다.

    "그럼 넌 내가 아무 남자하고나 헤헤거렸으면 좋겠어, 세라린?"

    "아니, 그런 건 물론 아니지만…… 그래도 가는 것마다 이런 소동이 일어

    나는 건 조금 달갑지 않은 일이니까."

    세라린은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퓨어린은 그런 그를 보더니 피식 하고 한

    차례 코웃음치며 말했다.

    "네가 그런 말을 하다니, 의외인걸. 인간들에 대해서만큼은 냉정한 너 아

    냐?"

    "귀찮은 일이 일어나는 것은 질색이니까."

    세라린은 흐트러진 망토를 끌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는 그냥 소멸시켜버려. 시끄러워질 이유가 없어."

    "……."

    "가자."

    그렇게 말하고 세라린은 휙 몸을 돌렸다. 망토가 휘날려 바람이 일었고,

    코끝에 와닿는 바람을 느끼며 퓨어린이 말했다.

    "찾았어?"

    "아니. 일단 따라와, 가면서 말할테니."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세라린이 대답했다.

    "프렌테이즈 신디라이클, 놈이 이 근처에 있어."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빠져나가며 세라린이 입을 열었다. 그 말에,

    퓨어린은 조금 눈살을 찌푸렸다.

    "프렌테이즈? 그게 누군데?"

    "일전에 시도아 시에서 상대했었던, 다하난의 개."

    "아앙?"

    퓨어린은 의아한 눈으로 세라린을 바라보았다.

    "처리한 거 아니었어?"

    "글쎄, 처리했다고 말한 기억은 없는데."

    그렇게 대답한 세라린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럼, 뭐지?" 퓨어린

    은 찌푸린 눈을 하고는 이마를 긁적이며 물었다. "처리하지 않았단 말야?

    어째서? 귀찮은 건 질색이라고 말한 건 바로 너잖아?"

    "뭐, 사실이긴 하지."

    발걸음을 계속하며 세라린이 답했다.

    "글쎄,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군. 굳이 답한다면… 그대로 죽이기

    엔 아까웠다고 할까. 적어도 아직은 죽일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거

    든."

    "……그럼 나중엔 죽일 거고?"

    "글쎄."

    "……넌 가끔 이해하기 힘든 짓을 해."

    "그럴 거야."

    세라린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퓨어린은 잠시 그런

    그를 불안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래서,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정확히는 몰라."

    "……몰라?"

    퓨어린은 황당하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세라린은 별다른 어조의 변

    화 없이 말을 이었다.

    "놈의 마나 파장을 쫓는 것 뿐이니까. 다만 너도 알다시피 여기에서는 그

    게 조금 힘들어. 정확한 장소를 특정할 수가 없지."

    "결계…때문에?"

    "그래."

    세라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세라린과 퓨어린이 있는 곳은 칼리스타 제국, 헤이라스의 '힘'에

    의해 결계가 쳐져 있는 곳이었다. 마나를 흐트러뜨리는 이 결계 속에서는,

    사실 마나에 의한 활동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다. 예전에 세이어도 이 결계

    때문에 마나 파장으로 세다라를 쫓는 것을 포기했던 적이 있었을 정도니까

    .

    세라린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골목 저 편을 노려보았다.

    "어쨌거나 방해가 되는 놈이야… 헤이라스란 녀석."

    ====================

    에에, 상당히 오래간만에 올리는 것 같군요……. 이 모든 것은 작가의

    게으름의 소치, 절 죽여 주십시오!! (…아니지, 죽어도 완결은 하고 죽

    어야지;)

    다음 편이 언제 올라올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금년 안으로

    (……-_-;;) 올라올 수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요즘 설정을 좀더

    확실하게 하고 플롯도 재정비하느라 글을 못 쓰고 있거든요.

    여담입니다만, 의외로 주위 사람들에게서 세이어의 평판이 상당히 좋은

    것 같지 않습니까? 쓰는 저 자신도 믿겨지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초반의 세이어는 필요 이상으로 차가워서, 과연 스토리대로 따라

    와 줄까… 하는 걱정도 있었는데 말이지요.

    음, 즐거운 시간 되셨길 빌며!

    Neissy였습니다.

    추신. 감상이나 비평, 언제나 환영입니다.

    번 호 : 12309 / 21165 등록일 : 2000년 12월 06일 23:12

    등록자 : NEISSY 조 회 : 144 건

    제 목 : [연재] ◈ 데스트로이아 ◈ # 128

    데스트로이아 DestroiA

    Fa-las de sy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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