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스트로이어-128화 (129/158)
  • 5. 어긋남 …… (7)

    린은 입을 다문 채 품 속의 스크롤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곧이다… 정

    말로 이제 곧이다. 이제 이것을 펼쳐 다르가 말해준 주문을 외치기만 하면

    된다. 어려운 일도 아니다.

    한데…… 린은 그 일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유는 단 하나, 바로 눈앞

    에 있는 세이어의 조용히 가라앉은 눈빛 때문이었다. 가만히 자신을 바라

    봐 주고 있는 세이어……. 린은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이 이상의 행동을 할 수가 없었다. 이런 감

    정을 무어라고 표현해야 할까? 이제 곧… 이제 곧이다. 하지만……. 린은

    망설이고 있었다.

    저녁……. 네모난 창문을 통해 방 안으로 붉은 햇살이 쏟아져들어오고 있

    었다. 붉게 물든 방 안의 모습… 역시 황혼 때문인걸까? 왠지 세이어가 평

    소와 다르게 보였다.

    "할 말이 있으신 것 같군요."

    계속 침묵만 지키고 있는 린이 딱해 보였는지 세이어가 입을 열었다. ―

    그래, 할 말이 있었지. 입을 열어야 할 텐데……. 린은 혀를 내밀어 메마

    른 입술을 축였다.

    "아니요, 그냥……."

    "…그냥?"

    세이어는 의아한 기색이었다. 평소와 다른 린의 모습이 이상한 모양이었

    다. 긴장으로 인해 혀까지 굳어 버린 걸까, 린은 꿀꺽 침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녜요, 아무것도."

    "……흠."

    세이어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천천히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름답게

    노을진 하늘이 눈에 들어왔고, 세이어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조용히 중얼

    거리듯 말했다.

    "아름답군요…."

    "예?"

    "황혼이… 멋지군요."

    세이어는 부드럽게 미소지어 보였다. "……." 그 미소에 린은 순간 멍해

    져 버렸다. 왜일까. 그저 바라보기만 한 것 뿐인데도…… 가슴이 주체하지

    못할만치 두근거리고 머릿속은 새하얗게 변해버린다. 세이어의… 부드러운

    미소다. 옛날의 차가운 미소가 아니라…….

    하지만 다음 순간 린은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 세이어가 변한 이유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세이어는 달라졌다. 하지만 그것은 린

    으로 인해서가 아니다. 세실로 인해서다.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린은 세

    실에 대한 증오심으로 가볍게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린은 입을 열었다

    .

    "……세이어 님."

    긴장으로 경직된, 자신이 듣기에도 이상한 목소리였다.

    "왜 그러십니까?"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말해 보십시오."

    린은 꿀꺽 하고 침을 삼켰다. 메말라버린 목 안이 따가웠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오늘의 기회를 놓치고 나면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찾아올지

    모른다. 결정해야 한다.

    "저와 세실 중에서… 한 사람을 택하라고 하면 누굴 선택하시겠어요?"

    "……예?"

    세이어는 조금 당황한 얼굴이었다. 설마하니 이런 질문을 하리라고는 예

    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는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한 듯 잠시 머뭇거렸

    고, 린은 멈추지 않고 다시 한 번 말했다.

    "누가 더 좋아요? 저와, 세실 중에서."

    어느새 린의 어조가 상당히 강해져 있었다. 세이어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

    하지 못했고, 그런 그의 모습에 린은 마음을 굳혔다. '나만 바라볼 수 있

    게…….' 그리고 그녀는 입을 열었다.

    "세이어 님."

    "……예."

    "저만 바라봐 주세요."

    "예?"

    세이어는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역시 마땅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이젠 상관없었다.

    "세실 따위, 세실 따위 보지 말아요. 저만의… 저만의 세이어 님이 되어

    주세요! 저만 바라봐 주세요!"

    린은 그렇게 외치며 순간 품 속에서 스크롤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펼

    쳤다. 동시에 스크롤에서 반응이 일어났다.

    지지지직.

    스파크가 일어났다― 세이어의 몸에서. 스파크가 세이어의 온몸을 덮었고

    ,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린을 바라보았다.

    "린 씨, 무슨 짓을!?"

    빠직. 순간 눈이 멀 정도로 강렬한 녹색의 스파크가 번쩍였고, 세이어는

    폭발하듯이 튕겨나가 뒤의 벽에 격돌했다. "큭…!" 그리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린이 외쳤다.

    "크세이델 덴 플라마, 세이어 디 쟈이레느 루 햐이나르!"

    순간 세이어의 얼굴색이 변했다. 그는 그 말의 뜻을 알고 있었다. 저 '루

    어'― 주문이 뜻하는 말은, '크세이델의 힘, 존재하지 않는 것에로의 회귀

    를 원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빠지지지지직!

    눈부신 전광이 방 안을 휩쓸었다. 세이어의 몸이 기역자로 꺾였다. 순간

    그는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몸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거대한 마나를. 자

    신을 강제하려 드는 마나의 흐름을.

    '이 느낌은… 헤이라스!'

    우두두둑, 지지직, 지지지직. 세이어의 몸이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강렬한 스파크가 튀었고, 그 모양에 린은 그저 놀라 그것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큭…." 세이어는 이를 악물었다. 고통. 전신을 칼로 헤집는 듯한 고통이

    전해져온다. 세이어는 바닥에 머리를 짓찢었다. 뜨겁다. 온몸이 찢어져 나

    가는 것 같다. 아니, 불타고 있는 것 같다. 크윽. 순간 세이어의 눈이 부

    릅떠진다. 몸이 활처럼 휘었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누구인가?˝

    세이어는 이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그의 기억에, 아니 세라린의 기억에

    있는 목소리였다. 마왕 헤이라스의 목소리. 그가 묻고 있었다. 스크롤을

    통해 발동된 주문이 세이어에게 묻고 있었다.

    ……기억? 나의 기억이 아닌, 세라린의 기억? 순간 또다른 목소리가 들려

    왔다.

    ˝거부해선 안돼.˝

    이것도 역시 세이어가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또 다른 자신의 목소리……

    . 꿈 속에서의 그.

    ˝너는 어떠한 존재인가?˝

    헤이라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에 섞여서 '그'의 목소리도 들

    려왔다.

    ˝너를…… 거부해선 안돼.˝

    "저는……."

    세이어는 이를 악물었다. 끔찍한 고통이 그를 잠식해 들어오고 있었다.

    조금씩 그 강도가 강해져가고 있었다.

    "저는 세이어……."

    ˝거부해선…… 거부해선 안돼!˝

    "저는 세이어…… '그'와는 다른 존재……."

    ˝안 돼……, 그래선…….˝

    목소리가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 반비례하기라도 하듯 '헤이

    라스의 목소리'는 더욱 커져 있었다.

    ˝좋다. 그것으로.˝

    순간 막혀 있던 둑이 터져나가듯 몸 속에서 마나가 폭발을 일으켰다. 이

    것은… 반발. 마왕의 마나와 자신의 마나가 서로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한 고통…….

    "크윽…." 이것은 마왕의 마나. 거대하다. 온몸이 타오르는 듯하다. 조각

    조각 하나하나 온몸이 뜯겨져 나가는 것 같다. 이것은… 자신이 상대해 낼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마왕의 조각에 불과한 자신으로서는!

    "커헉."

    스파크가 잦아들었다. 격렬했던 발작도 끝나고 세이어는 천천히 몸을 일

    으켰다. 문득 하얗게 질려버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린이 눈에 들

    어왔다. 하지만, 지금은 린의 모습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크세이델의 힘, 존재하지 않는 것에로의 회귀를 원한다'라는 뜻이었다.

    아니, 크세이델의 '힘'이라기보다는 '마나'라고 하는 쪽이 옳겠다. 그렇다

    면 분명 이 주문의 뜻은….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세이어는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마나를

    움직이려 했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았다.

    ―마나가, 움직이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의 이 상황은, 마치…

    .

    "린 씨… 제게…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세이어의 입술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지금의 이 상황은, 마치 네이시

    의 그것과 흡사하다. 어쩌면 더 지독하다. 분명하다, 이것은…….

    "……철저하군요."

    순간 세이어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변했고, 지독한 살기에 린은 그만 주저

    앉고 말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린은 그의 살기가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

    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넷… 입니까. 준비성이 좋군요."

    스르륵……. 사면의 벽에서 검은 옷의 남자들―정확히 말하면 마족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치 빨려나오는 듯한 모습이었다. "상황이 좋지

    않은데." 세이어는 으득 이를 갈았다. 그리 크지 않은 방 안에서 사면으로

    포위당했다. 게다가 린이라는 방해물마저 있고, 결정적으로 마나가 봉인당

    했다.

    "세다라 님의 선물이다."

    동쪽 벽의 마족이 입을 열었다. 세이어는 그를 향해 싸늘한 냉소를 보냈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 것 정도는."

    "……죽어라!"

    마족의 그 말의 신호였다. 순간 네 명의 마족이 한꺼번에 세이어에게 달

    려들었고, 세이어는 재빠르게 몸을 움직여 린을 문가로 밀어냈다.

    "큭."

    물론 그 대가는 컸다. 린을 밀어내느라 정작 자신은 피하지 못한 덕분에

    마족의 팔에 배를 관통당한 것이었다. "세, 세이어 님!" 눈이 휘둥그레진

    린이 비명을 질렀다. 그런 린을 힐끗 바라보며 세이어가 말했다.

    "가십시오, 린 씨."

    "하, 하지만…!"

    "방해됩니다. 가십시오."

    차갑게 말한 세이어가 다시 눈을 마족들에게로 돌리자, 린은 부들부들 몸

    을 떨며 문을 열고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녀가 방해가 될 뿐이라는 사실은

    그녀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린 씨는 목표가 아니었던 모양이군요."

    배를 관통당한 채, 세이어는 차갑게 냉소했다. 마족이 피식 웃었다.

    "여유만만이로군. 우리가 우습게 보이나?"

    "분명…,"

    세이어가 몸을 뒤로 빼냈다. 스윽. 마족의 팔은 들어갔을 때 그랬던 것처

    럼 매끄럽게 빠져 나갔다.

    "5분 전쯤의 저였다면 그럴 수 있었겠지요."

    세이어의 상처에서는 피가 흘러 나오지 않았다. 대신에 검은 색의 기운이

    마치 잉크가 물에 퍼지듯이 공기 중으로 흘러 나오고 있을 뿐이었다.

    주위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세이어가 말을 이었다.

    "지금으로서는 그럴만한 사정이 되지 못합니다만."

    "곧 편안하게 될거다."

    마족의 팔이 섬광처럼 앞으로 뻗어 나왔다. 세이어는 순간 이를 악물며

    왼편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그것을 막아냈다. 차캉! 불꽃이 튀어

    올랐다.

    그리고 때를 맞춰 양 옆과 뒤에서 공격이 이어져왔다. "큭." 세이어는 몸

    을 굴려 옆으로 빠져나가며 동시에 뒤쪽에 있는 마족의 옆구리를 향해 검

    을 휘둘렀다.

    카랑! 그러나 허무한 소리와 함께 검이 되튕겨져 나왔다. 일반적인 공격

    은 이들에게 소용이 없는 모양이었다.

    '검에 마나를 불어넣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건가.'

    절망적인 상황에 세이어는 거칠게 고개를 흔들었다. 슈욱! 연이은 마족들

    의 공격에 세이어는 몸을 급히 뒤로 빼냈다. 턱. 벽에 등이 닿았다.

    때를 놓칠새라 마족들이 팔을 치켜세우고 돌진해왔다. 순간 세이어의 얼

    굴에 냉소가 흘렀다.

    "하!"

    짧게 기합을 끊어 내지르며 세이어가 검을 올려쳤다. 카카칵! 귀에 거슬

    리는 금속음과 함께 흔들린 첫번째 마족의 공격이 세이어를 비껴나갔다.

    '막는 정도는…… 가능하다.'

    세이어는 그대로 그 마족에게 달려들었다. 둔탁한 통증이 몸에 전해져왔

    고, 세이어는 왼손으로 마족의 얼굴을 붙들어 올렸다. 일종의 방패로 삼은

    셈이었다.

    "크욱!?"

    마족들은 조금 당황한 모양이었다. 공격을 가하려던 몸이 순간 멈칫했고,

    세이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들의 한가운데로 붙들어 올린 마족을 날

    려버렸다.

    물론 마족들이 그 정도를 피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세이어

    의 의도대로 시간을 벌 수는 있었다. 비록 1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

    지만, 세이어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탓!"

    세이어는 창문으로 몸을 날렸다. 너비는 충분했다.

    파차창!

    유리가 산산조각났고, 땅에 떨어진 세이어는 그대로 굴러서 반동으로 몸

    을 일으켰다. 마족들이 뒤따라 뛰어내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하앗!"

    재빠르게 달려들며 세이어가 검을 내질렀다.

    마족은 여유 있는 표정이었다. 그런 공격으로 상처 하나 입힐 수 있겠느

    냐, 라고 묻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분명 지금의 세이어로서는 이런 하

    급 마족 하나 상대하기도 벅찬 것이 사실이다.

    카캉!

    역시나, 검은 마족을 뚫지 못하고 되튕겨 나왔다.

    "이 정도로는 무리입니까."

    하지만 세이어는 별로 괘념치 않는 듯했다. 공격이 실패한 것을 알자 세

    이어는 재빠르게 뒤로 빠져 마족의 사정권에서 벗어났고, 덕분에 마족은

    그냥 허공에 대고 팔을 휘두르게 되었다.

    "빠르군, 네 녀석."

    마족들은 천천히 움직여 세이어를 둘러싸려 했다. 하지만 간단히 포위당

    해 줄 정도로 세이어가 녹록하지는 않았다. 마나가 봉인당했다고는 해도

    재빠른 움직임 그 자체는 남아 있었기 때문에,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고 하면 공격을 해도 전혀 효과가 없다는 것이랄까. 분

    명히 말해 난감한 상황이다.

    "크아!"

    마족이 달려들었다. 예측 가능한 궤도로의 공격이다. 세이어는 검을 들어

    그의 공격을 막아내고 이어 발로 걷어차 마족을 밀어버렸다.

    그리고 동시에 세 명의 마족이 달려들었다. 각기 다른 방향에서 이루어지

    는 세 갈래의 공격. 물론 가만히 눈뜨고 기다려 줄 생각은 없었다. 세이어

    는 정면의 마족을 향해 몸을 날렸다.

    검을 강하게 올려치자 금속음과 함께 마족이 튕겨나갔다. 한계 이상으로

    가해진 충격에 롱 소드의 날이 조금 깨어져 나갔다. 어느새 이가 거의 다

    빠져버렸지만 세이어는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베는 것이 불가능한 지금

    날이 얼마나 서 있느냐 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현재로서는 검에 타격

    무기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수가 없었다. 그저 부러지지 않기만을 기도할

    뿐이었다.

    세이어의 뒤를 노리고 두 마족이 짓쳐들었다. 세이어는 오른발을 뒤로 빼

    고는 그 발을 축으로 급격히 몸을 회전시키며 검을 수평으로 휘둘렀다. 카

    캉! 스파크가 팍 하고 튀며 오른편의 마족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하지만 왼편의 마족에게는 무방비였다. 순간 날아든 공격에 세이어는 급

    히 고개를 숙였고, 마족의 팔은 아슬아슬하게 세이어의 위를 스쳐지나갔다

    . 세이어는 재빠르게 그 팔을 붙잡아 그대로 힘을 가해 휙 던져버렸다.

    그리고 또다시 대치상황.

    "……시간을 끌어보겠다는 건가?"

    마족이 히죽 웃었다. ―이 녀석들의 얼굴은 다들 똑같이 생겨서, 누가 누

    구인지 구별하는 것이 어려웠다. 심지어는 마나 파장마저도 거의 동일했다

    .

    "하지만 그래 보아야 소용 없을 것 같은데."

    "글쎄, 어떨까요."

    이가 나갈 대로 나가 우툴두툴해진 검을 잡은 채 세이어는 차갑게 미소지

    었다. 분명 저 마족의 말대로다. 현재의 그로선 기껏 해봐야 시간 끌기가

    고작이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도 잘 모르는 일이다. 어쨌

    거나 이쪽의 공격은 전혀 먹혀들어가지 않는 반면에 저쪽의 공격은 잘도

    먹혀들어 오니까.

    '아니, 전혀 소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세이어는 생각했다.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헤쳐나갈 수 있

    을까. 잠깐의 대치상황. 길지 않은 시간이나마…… 충실하게 사용해야 한

    다.

    '도망칠 생각은 없어…… 그런다고 현실이 바뀌진 않아.'

    문득 배에서 고통이 느껴졌다. 아까 관통당한 배의 상처, 그리 작은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관통당했을 정도면 이미 작은 상처일 수가 없지만.

    세이어는 검을 고쳐잡았다.

    "각오는 됐나!"

    마족들이 달려들었다. 각오는 되었느냐고……? 물로 되어 있다. 각오 같

    은 것이라면 이미 예전부터 되어 있다. '대가는 죽음'이란 말은… 그 자신

    에게도 적용된다. 타인을 죽여가면서 살아온 삶이다.

    "죽음……."

    세이어의 입에서 그 한마디가 흘러나옴과 동시에 그의 몸이 왼발을 축으

    로 급격히 회전했다. 달려든 마족의 공격을 간발의 차로 피해낸 것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날아드는 두번째 마족의 공격. 세이어는 급히 상체를

    뒤로 젖혔다. 부웅 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마족의 팔이 그의 얼굴을 스쳤다

    .

    "죽어라!" 세번째 마족의 팔이 그의 배후를 노리고 휘어들어왔다. 세이어

    는 이를 악물고 튕기듯이 상체를 젖혀 가까스로 그의 공격을 피해냈다. "

    큭." 순간 배에서부터 전해져온 고통에 세이어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 빈틈이 치명적이었다.

    퍽. 마족의 팔이 그의 가슴을 관통했다. 인간이었다면 심장이 있을 부분

    ―. 퍼걱. 파각. 그리고 제 이, 제 삼의 공격이 그를 관통했다. 숨이 막힐

    것 같다. 지독한 통증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리고 날아든 마지막 마족의 팔이 세이어의 목을 꿰뚫었다.

    ====================

    아아, 시간이 많군요……. 한데 어째서 시간이 많으니까 더 게을러지는

    것인지. 시간이 없을 땐 없는 시간이나마 아껴서 열심히 소설을 썼는데.

    그것 참…… 이럴 때 보면 인간이란 정말이지 간사한 존재같아요.

    린, 멋지지 않아요? 덕분에 세이어가 좀 불쌍해졌죠. (하긴 따지고 보

    면 린이 그렇게 된 원인이 세이어지만)

    Neissy였습니다.

    번 호 : 11905 / 21165 등록일 : 2000년 11월 20일 20:37

    등록자 : NEISSY 조 회 : 135 건

    제 목 : [연재] ◈ 데스트로이아 ◈ # 126

    데스트로이아 DestroiA

    Fa-las de sy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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