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어긋남 …… (1)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그들도 처음부터 그런 결과를 원했
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놀랍게도, 그들 자신에게는 전혀 악의가
없었다. 비록 그들의 행동이 결과적으로는 다른 이들을 해치게 되었
다고는 하더라도, 그들 자신은 순수했던 것이었다.
만약 그들에게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들의 생각
범위가 그다지 넓지 못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들은 그저 당장을 생
각했을 뿐이었다. 당장 보이기에 좋은 일― 그러나 불행히도 그것이
멀리 보아서는 오히려 그들 자신을 파멸시키는 일이었던 것이었다.
결국 그들의 그러한 행동은 주위의 사람들을, 그리고 나아가 자신들
마저 파멸시켜 버린 것이다.…」
비전의 서, 프리네리아력 57년 발행
4장 '악의의 존재들' 에서 발췌.
그 날, 린은 울고 있었다.
어째서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일까… 그녀는 생각했다.
그저 행복해졌으면을 바랬던 것 뿐이었는데, 그저 세이어가 자신을 바라
봐 주기를 바랬던 것 뿐인데, 어째서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일까….
세실은 말했다― 세이어는 이미 그녀에게 마음을 열었다, 라고.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린은 울먹였다.
"알고 있단 말이야…. 그분이 날 바라봐 주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여태까지는 그것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세이어가 자신을 바라보지 않
는다고 해도, 세이어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은 사실이었으니
까. 하지만 이젠 틀려졌다. 그녀와 세이어의 사이에 세실이 끼어든 것이었
다.
'빼앗기고 싶지 않아…!'
린은 울부짖었다. 하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다만 목에서 걸린 꺽꺽
거리는 울음소리만이 나올 뿐이었다.
'내게서 연애 감정을 느낀 적은 없다….'
방금 전 세실의 외침이 아직도 귀를 때리고 있었다. "…끄흑…." 린의 눈
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고, 그녀가 눈을 깜빡이자
눈물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끄흑… 으흐흐흑…."
린은 바닥에 엎드린 채 울음을 터뜨렸다.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
다. 그리고… 그 때였다.
"자자, 울지 말고 여기 좀 봐 주실래요?"
웬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린은 화들짝 놀라며 얼굴을 들었다. 소매
를 들어 눈가를 훔치며 그녀는 앞을 바라보았다.
12세 정도 되어 보이는 귀엽게 생긴 소년이었다. 회색 머리칼을 어깨까지
기른 단발머리였는데, 순진해 보이는 인상과 더불어 선해 보인다는 느낌을
주었다. 아이는 애교 있게 웃으며 말했다.
"린 누나, 맞죠?"
"…그, 그런데… 넌… 누구?"
"에,… 다르라고 불러 주세요."
'다르'는 생긋 웃었다. 린은 이상하다는 듯이 그를 보며 말했다.
"그, 그래, 다르…. 그런데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니…, 언제?"
"뭐, 방법이 있어요."
다르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미소를 지었다. 보조개가 생겨 귀여워 보였
다. 순진해 보이는 미소와 함께 그가 말을 이었다.
"그보다, 중요한 게 있어요."
"중요한… 것?"
"예, 전 누나를 도와 주러 왔어요."
다르는 빙그레 웃었다. 그의 눈이 초승달마냥 가늘어졌다.
"날… 도와 준다고?"
"누나, 세이어 형과 친해지고 싶죠? 그 어느 누구보다도?"
"…세이어 님을 알아?"
"뭐, 알 만큼은 알죠."
소년은 가볍게 고개를 까닥였다.
"그보다 제 질문에 대답해 주실래요? 그 누구보다도 세이어 형과 친해지
고 싶지 않아요? 전 누나를 도와 주고 싶어서 이러는 거예요."
"으… 으응,"
린은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무슨 방법이… 있어?"
"예, 있어요."
"저, 정말?"
린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그녀는 갑자기 나타난 이 소년이 수상하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
었다. 린은 지금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세이어의 마음을 자
신에게로 돌려 놓을 방법이 있다면 마족에게 혼을 팔 수도 있을 것 같았다
. 그런 상황에서 나타난 이 소년이―소년이라는 것이 주효했다. 아이를 의
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방법이 있다'고 말하고 있으니, 귀가 번쩍
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르―는 미소를 지었다.
"어때요? 그다지 어려운 건 아닌데, 해 볼래요?"
"할게."
"아하하. 빨라서 좋네요."
그는 즐겁게 웃었다. 눈을 반짝이며 그가 말을 이었다.
"제가 요 한 달 간 지켜본 바에 따르면, 현재로선 누나와 세이어 형이 맺
어지기 힘들 것 같더군요. 그래서 그 이유를 조금 살펴봤죠. ―그래, 어
땠을 것 같아요?"
"…글쎄."
린은 가만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다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씨익 미
소지었다.
"결론은, 세이어 형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라는 것이었어요."
"세이어 님이 강한 것이 어때서?"
"들어 봐요. 너무 강하기 때문에 주위의 도움 같은 것이 필요 없잖아요.
그래서 주위에 신경 쓸 이유도 없는 거예요. 누나도 알 텐데요. 세이어
형이 언제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열던가요?"
"그래…."
대답하며, 린은 세실을 생각했다.
"그러니까 세이어 형을 약하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주위를 볼 수밖에 없
게 되겠지요."
"약하게 한다고?"
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그녀가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안 돼, 그런 일은…,"
"누나를 위해서 하는 말이에요. 세이어 형이 죽는 것도 아닌데요, 뭘."
"그래도…!"
"누나만을 위해 주는 세이어 형이 되게 할 수 있는 방법이에요."
"――!"
린의 얼굴이 변했다. 진지해진 얼굴로 다르를 바라보며 그녀가 중얼거리
듯 말했다.
"나만을… 위해 주는…?"
"누나만의 세이어 형."
"나만의……."
그러나, 린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런 일, 가능할 리가 없잖아."
"아뇨, 있어요."
다르는 싱글싱글 웃으며 자신의 품 속에서 스크롤을 하나 꺼냈다. 회색의
스크롤… 그것은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다르는 그것을 린에게 건넸
다.
"이걸 펼치고 '크세이델 덴 플라마, 세이어 디 쟈이레느 루 햐이나르'라
고 외치면 돼요."
"크세이델… 덴 플라…마, 세이어… …뭐라고?"
"크세이델 덴 플라마, 세이어 디 쟈이레느 루 햐이나르."
"크세이델 덴 플라마…, 세이어 디… 쟈이레느 루 햐이…나르. …알겠어.
"
린은 천천히 스크롤을 받아 들어 품안에 갈무리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세이어 님은 어떻게 되는 거야…?"
"아, 별 건 아녜요." 다르는 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품 안에서 또 하나
의 스크롤을 꺼내 린에게 건네며 그는 말을 이었다. "일단 그걸 사용하면
세이어 형의 힘이 일시적으로 줄어들 거예요. 뭐, 그렇게 많이 줄어드는
건 아니지만, 주위를 바라보게 할 수는 있겠죠. 그리고 세이어 형이 누나
를 바라보게 되면, 그 때 이걸 사용하세요. '에-르테'라고 하면 돼요. 그
럼 원래대로 돌아올 거예요."
"에-르테?…"
"그래요, 그렇게."
"그래…."
린의 얼굴에 순간 화색이 돌았지만, 곧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것에 생각이 미친 탓이었다.
"…하지만, 역시 안 돼…. 지금의 난… 세이어 님과 함께 할 수가 없어…
."
다르는 빙그레 미소지었다.
"임신해서 말인가요?"
"……!"
린의 눈이 크게 떠졌다. 눈에 띄게 당황한 모습을 보이며 그녀가 외쳤다.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흐음…. 설마 절 평범한 소년이라 생각하신 건 아닐 텐데요?"
다르는 히죽 웃었다. 장난을 치는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재미있다는
듯이 미소지으며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다 아는 방법이 있어요."
"그…래?"
약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린은 다르를 믿어 보기로 했다. 어쨌
거나 세이어가 자신만을 위하도록 할 수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게다가,
이 소년이 자신을 속인다고 해서 그에게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다르가 말했다.
"걱정 마세요. 그것도 다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까요."
"해결할 수 있다고 하면…."
"지금 당장은 곤란하고, 그 스크롤을 사용한 다음에 하도록 하죠."
"그런데, 그 방법이란 건…."
"깨끗이 지워 드릴게요."
다르는 싱글거리며 말했다. 린은 약간 머뭇거렸다.
"지운… 다고?"
"말 그대로, '지워' 버린다고요. 마법으로 말이죠. 원래부터 있지도 않았
던 것처럼 될 거예요."
"될까…."
품 속에 넣어둔 스크롤을 만지작거리며, 린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아,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게 있는데요, 그 스크롤, 누나하고 형 단둘이
있을 때 사용해야 해요. 만약에 다른 사람이 있을 때 사용하면 제대로
된 효과가 나오지 않을 거예요.'
"단둘이라…."
린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마 힘들 것이다. 전쟁 준비라고 하던가…
최근에 들어서는 세이어의 모습을 보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성기사들의 일
원이 된 지금의 세이어는 꽤나 바쁘게 움직여야 했던 것이었다. 단둘은 커
녕, 만나는 것조차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우우…."
세실이 끙 하고 신음을 내뱉는 소리가 들려왔다. 린은 조용히 눈동자를
굴려 세실을 바라보았다. 세실은 침대에 누운 채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었
다.
세이어와 만나기 힘들게 된 것은 세실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딱히 할
일이 없어져 버린 그녀는 그냥 방 안에서 책을 본다던가 하는 등의 소일거
리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다지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린과의 관
계가 불편해져 버린 때문에, 린과 같은 방에서 같이 지낸다는 것은 그녀에
겐 퍽 불쾌한 일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아, 마음에 들지 않아, 마음에 들지 않아…."
중얼거리던 세실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의식적으로 린에게서 시선을
피하며 그녀는 몸을 움직여 문가로 걸어갔다. "……." 린도 세실에게서 눈
을 돌렸다. 예전 같았다면 '어디 가니?' 라고 한마디 물어 볼 만도 했건만
, 어긋나 버린 이 자매는 이제 서로를 피하고 있었다.
"……흥."
누구를 향한 조소일까, 짧게 코웃음 친 세실은 방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
다.
"…후우……."
그리고 방 안에 남은 린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언가 크게 틀어져 있다― 린은 그것을 알 수 있었다. 하긴, 조금만 생
각해보면 간단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린은 며칠 전 세실이 했던 말을 떠
올렸다.
'…아룬 오빠하고나 잘 놀아 보라고!…'
세실, 무언가 착각하고 있는 걸까. 린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룬 오
빠와 히히덕거렸다고…. 하지만, 나는 그런 기억이 없는걸. 세실은 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걸까?
게다가 이젠 왠지 세이어 님과도 멀어지는 기분이 들고….
"…괜찮아."
린은 거칠게 고개를 흔들었다. 스스로에게 확신을 주려는 듯한 강한 어조
로 그녀가 다시 한 번 말했다.
"이제 괜찮아질 거야. 나한테는 이게 있으니까."
린은 품 속의 스크롤을 만지작거렸다. 양피지의 부드러운 촉감이 손끝에
전해져 왔다. "……." 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
에에∼. 5장 시작입니다.
Neissy였습니다..
번 호 : 11084 / 21128 등록일 : 2000년 10월 12일 23:01
등록자 : NEISSY 조 회 : 158 건
제 목 : [연재] ◈ 데스트로이아 ◈ 외전 Ⅱ # 1
데스트로이아 DestroiA
Fa-las de syent
외전 Ⅱ. 인식 …… (1)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누렇게 색이 바랜 벽
지였다. 본래는 깨끗한 하얀 색이었을 벽지는 낡아서 너덜너덜해진 채 벽
에서 반쯤 떨어져 있었다.
"……."
다음으로 그가 느낀 것은 약간은 딱딱한 바닥의 감촉, 그리고 자신의 몸
을 덮고 있는 낡은 이불의 감촉이었다. 천천히, 그는 고개를 돌렸다. 방
안의 정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한 3 제곱예즈 정도 될까… 그리 크지 않은
아담한 크기의 방 안에는 자그마한 화장대, 그리고 옷걸이가 놓여 있었다.
옷걸이 위에 옷은 걸려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 사실들에서 그는 한 가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어디지, 여긴?"
그는 가볍게 미간을 오므리며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웃하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분명했다, 이 방은 그의 기억에 없었다.
―기억?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무엇인가 잘못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기억'이란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애초부터 있지 않았던
것처럼. 희다. 휑하니, 텅 비어버린 기억에 그는 당혹감을 느꼈다.
"…난 누구지?"
몸을 일으킨 그는 화장대에 놓인 거울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탁하게 흐
려진 거울에 그의 얼굴이 비춰졌다. 그는 물끄러미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
았다.
새까만, 검은 색의, 칠흑의 눈동자가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길
다란 흑색의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심연의 눈동자. "……."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문 쪽으로 향했다.
"꺄악."
문을 열자 처음으로 들려온 것은 비명소리였다. 길게 기른 흑발을 뒤로
넘겨 한차례 묶어 내린, 푸른색 눈동자의 여성이 그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
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여자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일어…났네요?"
문을 사이에 둔 채, 옷가지를 양손으로 받치며 약간은 엉거주춤한 모양으
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오랫동안 일어나지 않아서 걱정했어요." 그렇게
말한 그녀는 가볍게 입가를 끌어당기며 남자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절… 아십니까?"
"에? 아뇨?"
그의 질문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녀는 잠
시 이상하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아니요…. 별로."
"흐응."
그녀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아, 참." 문득 그녀는 들고 있던 옷가
지를 내밀었다. "……?"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고, 그 표정에
그녀는 이상하다는 듯한 눈초리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왜 그러냐니요…, 이거, 당신 옷이라고요. 자기 옷도 몰라 보는 거예요?
"
"예…, 제 옷?"
그는 잠시 멍한 얼굴을 했다. 그녀가 내민 옷은 꽤 고급의 옷이었다. 목
까지 완전히 단추를 채우는 흰색의 셔츠, 그리고 그 위에 입는 진회색―거
의 검정색에 가까운―의 조끼. 언뜻 보기에도 상당히 부드러워 보이는 재
질의 바지. 그리고 회색의 망토.
―문제는, 이것이 자신의 것인지 아닌지 그로서는 알 수 있는 방법이 없
다는 사실이었다. 도무지 기억이란 것이 나질 않았으니 말이었다.
그는 난색을 표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실은―."
"실은?"
"그것이 제 옷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기억이 없거든요." 그가 어색하게 웃
음 지었다.
"…기억이 없다뇨?"
그녀가 이맛살을 조금 찌푸렸다. 아마도 그가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별로 재미 있는 농담은 아니었다. 이윽고 그녀는 한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거 농담이라면 재미 없고, 진담이라면 더더욱 재미 없어요. 세상에 자
기가 입었던 옷이 뭔지도 기억 못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요? 설마하니
기억 상실증에라도 걸렸나 보다고 우길 생각은 아니겠죠? 그럼 이제 이
름이고 나이고 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겠네요?"
"그렇군요."
"그렇군요는 뭐가 그렇군요에요? 어설픈 미소로 어물쩡 넘어가려 하지 말
아요."
"아니요, 그게……."
남자는 가볍게 머리를 긁으며 입술을 끌어당겨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무엇인가 말할 것이 있는 듯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곧 할 말을 정리했는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예, 이름이고 나이고 다 기억나지 않는군요. 제가 왜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고요."
여자의 얼굴이 약간 일그러졌다. 그다지 짙지 않은 눈썹을 움찔거리며 황
당하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던 그녀는 잠깐의 침묵 후 이윽고 차분한 목소
리로 말했다. "……진담…인 것 같네요." "재미 없는 진담이지요." 남자는
빙그레 웃었다.
"그래서 조금 이야기해 주셨으면 하는데요…. 제가 왜 여기에 있는 겁니
까?"
"……하아."
그녀는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과 함께 짤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별로 마음
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어투로 그녀가 중얼거렸다. "너무 상투적이잖아…,
이런 일."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뇨.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고개를 흔들어 보이더니, 거실에 놓인 나무 의자를 가리켰다.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죠. 언제까지나 이렇게 계속 서서 이야기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아… 예."
그들은 자리에 앉았고, 그녀는 천천히 이야기의 서두를 꺼냈다.
"벌써 일주일 전의 이야기네요."
유우―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유우라고 밝혔다―는 그날도 숲으로 먹을 것
을 구하러 갔다고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를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그
는 숲 속에 쓰러져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특이…한 겁니까?"
"특이한 거죠. 쓰러져 있었다니까요?"
의아해하는 그에게 유우가 보충 설명을 했다.
숲속에 쓰러져 있던 것 치고는 그의 몸이 너무 깨끗했던 것이었다. 보통
그같은 경우 상처를 입고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숲에서 잠을 자고 있
는 것도 아니고, 기절한 사람―기절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어딘가 크게 다쳤다던가, 어떤 충격을 받았다던가 하는―의 모습이 너무 '
평온'해 보였던 것이었다.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고, 옷도 마치 방금 나온 것처럼 깨끗했다. 이것은
분명히 어딘가 이상한 일이었다.
유우는 그를 깨워 보려 한참이나 애를 써 봤지만, 그는 전혀 깨어날 생각
을 하지 않았다. 결국 포기한 유우는 그를 집으로 데리고 왔다. ―그냥 버
리고 올 만큼 유우는 몰인정하지 못했다―
"그리고 당신이 지금 깨어난 거예요."
유우는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래서… 깨어나면 설명을 좀 들어 보
려고 했는데, 일이 틀어져 버렸네요. 오히려 제가 설명을 해야 하는 쪽이
되어 버렸으니 말예요."
"그렇군요."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예요? 지금 같은 시기에 특별히 할 일이
있을 리도 없는데."
"지금 같은 시기?"
"…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었죠. 알 리가 없겠네요. 마왕 세라린이
봉인된 것이 불과 일주일 전 이야기잖아요."
"세라린."
그는 그 이름을 되뇌었다. 왠지… 이전부터 그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요. 마왕 세라린. 사신 전쟁도 다 끝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마왕 세라린이 날뛰었어요. 엄청난 '학살극'이었죠. 천사장 넷,
천사 이백 칠십, 그리고 사람들 이천 오백만 명이 죽었어요. 다행히 일
주일 전에 그가 봉인되었지만……."
유우는 생각하기도 끔찍하다는 듯 거칠게 머리를 흔들었다.
"살아남은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아요. 어쨌든 무지무지하게 죽어 버렸으
니까요. 이기긴 했지만 뒤가 좀 씁쓸한 셈이예요. 그래서 요즘 사람들의
분위기가 조금 험악해요."
"그렇습니까……. 마왕 세라린 때문에."
"그래요."
유우는 '세라린'을 향한 분명한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긴 그녀의
말을 들어 보니 충분히 그럴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어째서 '세라린'이란 이름이 친숙하게 느껴지
는 것일까? 단순히 '알고 있다'라는 정도가 아닌 것 같았다. 친근한 이름
이다…. 알 수 없었다. 이런 느낌이 드는 이유.
"세라린이라…."
그는 가볍게 미간을 오므렸다.
====================
와아아아아아아앗!! 정말, 정말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그간 연재가 늦
어진 것에 대해 사과 드립니다.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말이지요. 이제부
터 다시 천천히 올라갈 겁니다. (…라고는 해도, 아직 본편의 연재가 언
제 재개될 지는 모르겠군요^^;;)
외전, (2)로 이어집니다∼^^
Neissy였습니다.
번 호 : 11099 / 21128 등록일 : 2000년 10월 13일 23:40
등록자 : NEISSY 조 회 : 134 건
제 목 : [연재] ◈ 데스트로이아 ◈ 외전 Ⅱ # 2
데스트로이아 DestroiA
Fa-las de syent
외전 Ⅱ. 인식 …… (2)
"뭐 해, 에르?"
나무 그늘 아래 앉아서 멀리 산을 바라보고 있는 에르에게 유우가 말을
걸어왔다. "아." 에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유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
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냥, 생각을 좀 하고 있었어."
"흐음……. 기억, 아직이지?"
"아직은."
"흐음. 그렇구나."
유우는 빙그레 미소지으며 에르의 옆에 앉았다. 에르는 약간 움찔하며 옆
으로 조금 자리를 옮겼다. 그런 그를 보며 유우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내가 무서운가 보지?"
"……그런 게 아니잖아."
"흐흥."
에르―가 유우의 집에서 살게 된 지도 이제 거의 한 달 째. 그 사이에 그
와 유우는 어느새 말을 놓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여전히 에르의 기억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지만, 에르도 유우도 그에 대해 그다지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지금으로서도 그다지 나쁜 편은 아니었고, 무엇보다 유우가 말해
준 이야기들로 미루어 보면 잃어버린 그의 기억이 기억해내서 좋은 기억일
가능성은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에르의 '기억 상실'이 마왕
세라린의 인간 학살과 관계가 있을 거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에르는 아직 자신의 이름도 기억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에르'란 이름은
유우가 지어 준 것이었다. '상냥함'이란 뜻이었는데, 유우는 그의 눈동자
가 상냥해 보인다고 했다.
"그나저나…… 어떻게 할래?"
"응?"
가만히 앉아 있던 유우가 문득 툭 질문을 던졌고, 언뜻 그녀의 질문을 이
해하지 못한 에르는 눈을 깜빡이며 유우를 쳐다보았다. 유우는 그녀의 연
녹색 눈동자를 빛내며 말을 이었다.
"여기 계속 있을 거야? 어차피 특별히 할 일도 없을 텐데. 나하고 같이
일이라도 할래?"
"일?"
짧게 깎여진 뒷머리를 매만지며―장발이 마음에 안 든다며 유우가 잘라
주었다― 에르가 반문했다. "그래, 일." 유우가 빙긋 웃었다.
"일이라고…. 하지만 유우, 네가 하는 일이 있었어? 너도 특별히 하는 일
은 없는 걸로 아는데."
에르가 의아하다는 듯 눈썹을 끌어올렸다.
"일이라고 해서 다 같은 일이 아니지.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너, 힘든 일
같은 걸 할 여력도 없잖아? 근육도 별로 없는 게 그다지 강해 보이지도
않는걸."
"뭐, 그렇긴 하지만."
"그러니까 말이야. 나하고 같이 숲에라도 가자고. 할일 없이 있는 건 꽤
나 따분한 일이니까 말이지."
"결론은 같이 숲에 가자는 거군."
에르는 가볍게 미소 띤 얼굴로 유우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의 의미를 눈
치챘는지 그녀의 얼굴이 약간 상기되었다.
"뭐, 뭐야. 뭐 잘못 됐어?"
"아니, 별로."
바지를 툭툭 털며 에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그를 유우의 시선이 쫓았다. "어디 가게?" 에르는 고개를 돌려 유우를 바
바라보며 빙긋 웃어 주었다.
"그냥. 주위를 조금 둘러볼까 해서."
"흐응."
유우는 조그맣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혼자서 제대로 돌아다닐 수 있
겠어? 내가 같이 가 줄게."
"가 주는… 건가?"
"뭐야…. 싫으면 싫다고 해."
"그럴 리가."
에르는 어깨를 으쓱했다.
"가자. 안내 부탁해."
"걱정 붙들어 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빙긋. 두 사람의 얼굴에 미소가 떠
올랐다.
유우의 집은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숲 속에 위치해 있었다. 말하자면 혼
자 동떨어져 사는 셈이었다. 위험한 시기에―세라린의 '학살극'이 일어난
지 불과 한 달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굳이 사람들과 떨어져서 사는 것
은 언뜻 생각하면 위험한 일이었지만, 유우의 말에 의하면 그것이 그렇지
만도 않았다.
"오히려 위험한 것은 사람들이거든."
유우의 말 그대로였다. 어쩌면 지금 같은 때엔 사람들과 섞여서 사는 것
이 오히려 더욱 위험한 일일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차라리 그들 틈에서 빠
져나와 홀로 살아가는 것이 속편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에게서 해코
지당할까 두려워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위험한 것은 사람이라고…. 그런데 왜 난 구해주기까지 하고, 멀리 하지
않는 거지? 나도 사람, 게다가 남자인데?"
이러한 에르의 질문에 유우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넌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넌 '에르'니까."
그녀의 대답에 에르는 가볍게 콧잔등을 긁적였다. 뭔가 납득이 되는 듯
안 되는 듯한 대답이었다. 그런 그를 보며 유우는 피식 웃었다.
"괜히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우리. 하여튼 넌 그런 사람이 아냐. 그런
느낌이 들어."
"흐음……."
에르는 가만히 턱을 만지작거렸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그가 입을 열었
다.
"그런데, 언제부터 마을에서 떨어져 나온 거지? '세라린'이 그 학살극을
벌인 것이 불과 한 달 정도 전의 일이라고 하지 않았어? 사람들의 분위
기가 험악해진 것은 그것 때문이라더니, 그렇다면 앞뒤가 맞지 않잖아."
"에에."
유우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에르의 시선을 피하며 유우는 가볍게 한
숨을 내쉬었다. "…뭐," 무언가를 털어내기라도 하려는 듯이 고개를 절레
절레 저으며 그녀가 말했다.
"맞아. 내가 따로 떨어져 나온 건 조금 옛날부터지. 사정이… 조금 있었
거든."
"사정?"
"조금, 뭐랄까. 끔찍한 남자가 있었거든. 지긋지긋하게 달라붙는데……,
정말이지 생각하기도 싫어. 그 추근덕거림이란. 이래저래 마을에선 좋은
일이 없어서 말이지. 그래서 나와 버렸어."
"아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
에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이후로 마을에는 안 간 건가?"
"…뭐, 그건 아니야. 마을에 안 갔었다면 사람들 분위기가 어땠는지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최근에 갔던 게 한 달 조금 전 일이야. 널 발견하고
삼일쯤 되는 날 한 번 갔다 왔지. 그래도 사람들, 내가 여기에서 살고
있는 줄은 몰라."
그렇게 말하고 유우는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조용해진 그녀를 에르는 의
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유우는 심각한 표정을 하고는 손을 들어 에르의
뒤쪽을 가리켰다. "뒤에……." "뒤에?" 에르는 긴장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쿡. 순간, 에르의 뒷덜미를 강타하는 충격이 느껴졌다. "!!" 에르는 움찔
하며 다시 몸을 돌려 유우가 있을 방향을 바라보았다.
거기에서는 유우가 오른손을 활짝 펼친 채 장난스레 미소짓고 있었다. "
어느 손가락으로 찔렀게?"
"……."
에르의 입가가 실룩거렸다. 긴장했던 스스로가 왠지 바보같다고 생각하며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 하자는 거야……."
"쿡쿡쿡." 유유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오른손을 흔들어 보이며 그녀가
말했다. "자, 자. 맞춰 봐. 어느 손가락으로 찔렀을 것 같아?"
"……모르겠는데."
"흐흥."
유우는 새끼손가락을 까닥여 보였다. "맞춰봐." "…후우." 에르는 가만히
그 손가락을 가리켰고, 유우는 빙긋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췄어
."
그녀는 즐거워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에르 쪽도 마찬가지였다. 만난 지
한 달. 그들은 스스럼없이 말을 놓고 장난을 칠 수 있을 정도까지 가까워
져 있었다. 행복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불안한 행복―. 언제 깨어질 지 모르는 얼음판 위를 걷고
있는 것과도 같았다. 유우도 에르도, 나름대로의 사정 안에 불안 요소가
잠재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에르의 기억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
실수가 있길래 다시 올립니다.
보시기에 어떨 지 모르겠네요…. 나름대로는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핫
핫핫핫. (…왜 웃을까?)
외전, (3)으로 이어집니다.
Neissy였습니다.
번 호 : 11189 / 21128 등록일 : 2000년 10월 18일 00:58
등록자 : NEISSY 조 회 : 135 건
제 목 : [연재] ◈ 데스트로이아 ◈ 외전 Ⅱ # 3
데스트로이아 DestroiA
Fa-las de syent
외전 Ⅱ. 인식 …… (3)
그리고 다시 일주일이 지났다. 특별할 것 없는 평온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 그러나 에르도, 유우도 알고 있었다. 이 평온은 제한된 평온이라는 것을
. 영원히 계속되었으면을 바라나… 결코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다는 것을.
별안간에… 갑작스럽게 행복은 깨어지는 것이었다.
그 날, 에르는 밖에 나가 있었고, 유우 혼자서 집을 지키고 있었다. 왠지
무료했다. 에르가 없어서일까? 어느새 에르에게 많은 것을 기대게 되었다
는 것을 깨닫고 유우는 조금 놀랐다.
탕탕탕.
그 때였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고, 유우는 활짝 웃으며 문가로 나갔
다. "에르니?" 유우는 미소지으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유우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굳었다. 밖에 서 있는
남자는 에르가 아니었다. 그녀가 결코 보고 싶어하지 않던 남자, 그를 피
해서 나왔을 정도로 싫어하던 남자……,
"……아그리큘."
"오래간만이군, 유우."
남자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깔끔하게 빗어 넘긴 갈색의 머리칼을 만지
작거리며 그가 말했다.
"이런 곳에 살고 있었다니… 몰랐어. 어째서 말하지 않았지?"
"왜 왔지?"
"……이거 실망인데.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이 정도의 대접밖에 해 주지
않는 건가? 우린 친구였잖나?"
"멋대로 말하지 마."
그렇게 말하며 유우는 아그리큘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깔끔해 보이는 미
소와 이지적인 얼굴―. 분명 잘 생긴 편이지만, 유우의 눈에는 천박해 보
일 뿐이었다. 유우는 그를 밀쳐냈다. "돌아가. 난 당신과 할 이야기 없어.
"
"미안하군. 난 할 이야기가 많아."
그는 유우의 양 팔을 잡아 양쪽으로 벌렸다. 유우의 눈이 찌푸려졌다.
"이게 무슨 짓이지?"
"뭐…… 별 거 아냐."
아그리큘은 낮게 웃으며 유우의 얼굴 가까이로 자신의 얼굴을 갖다댔다.
…역겹다. 바로 앞에서 느껴지는 그의 숨결에 유우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
다. "치워." "쿠쿡." 그는 입가를 끌어당겨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겐
안 되지. 내가 그동안 널 찾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 대가 정도는 받
아야 하지 않을까…?"
"찾으라고 한 적 없어."
"그렇게 삐딱하게 나올 것 없잖아… 큭!"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유우에게 몸을 붙이려던 그가 순간 비명을 지르
며 바닥에 엎어졌다. 유우가 무릎으로 그의 사타구니를 찍어 버린 것이었
다. "이게…!" 그의 얼굴에 노여움이 떠올랐다.
그리고 다음 순간 유우는 그가 왼쪽 허리에 롱 소드를 차고 있었다는 것
을 알아차렸다. 스릉. 그가 검을 뽑아들었다.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그는
검을 들어올려 유우의 얼굴로 향했다.
"고분고분하게 있어…. 죽고 싶지 않다면."
"당신…."
"닥치고 있어!"
아그리큘은 롱 소드의 옆면으로 유우의 얼굴을 후려쳤다. "아악!" 유우는
맥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그녀의 입술이 찢어져 피가 맺혔다. 그 모습을
보며 아그리큘이 새디스틱한 웃음을 흘렸다.
"쿡쿡쿡쿡……. 너무 그런 얼굴 하지 말라고. 이제 곧 쾌락이란 것이 어
떤 것인가를 가르쳐 줄 테니까. 기쁨에 몸부림치고, 더 해달라고 조르게
될 테지."
그가 천천히 유우의 앞으로 다가왔다. 왼손을 움직여 주머니에서 밧줄을
꺼내며 그가 눈짓했다. "뒤로 돌아."
유우는 반항하려 했지만, 그의 오른손에 들린 롱 소드 때문에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녀는 뒤로 돌아섰고, 곧 그녀의 양손은 밧줄
에 의해 결박당했다.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됐어. 다시 앞으로 돌아서."
그녀는 천천히 앞으로 돌아섰다. 롱 소드가 눈앞에서 흔들거리고 있었다.
―라고 느낀 순간, 그녀는 몸에 와닿는 차디찬 검날의 감촉을 느꼈다.
찌지직…. 그가 검으로 그녀의 옷을 찢어내고 있었다. 그녀의 상반신이
그대로 드러났고, 수치감에 유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후우. 멋진 가슴이
잖아." 아그리큘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그의 숨결이 다가오는 것
이 느껴졌다.
에르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우아아아아아아아아!!"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아그리큘의 몸이 크게 휘청했다. 어느새 돌아
온 에르가 장작 조각으로 그의 머리를 후려친 것이었다. 그 소란에 유우는
눈을 떴고, 놀란 눈으로 그녀가 외쳤다. "에르!?"
"이 새끼가…."
아그리큘은 이를 갈았다. 휘청거리던 그는 어느새 다시 자세를 제대로 잡
고 롱 소드로 에르의 가슴을 겨누고 있었다. 가늘게 뜬 눈으로 에르를 노
려보며 그가 말했다.
"그렇군…, 이런 놈팽이가 있었으니 유우가 날 피했던 거로군. 같이 살고
있던 건가…? ……흥, 병신 같은 새끼가… 죽인다."
에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장작을 오른손에 든 채 조심스럽게 아그리
큘의 반응을 살피고 있을 뿐이었다. "뒈져 버렷!" 아그리큘이 달려들었고,
에르는 움찔하며 장작을 위로 들어올렸다. 순간 아그리큘의 입가에 조소가
떠올랐다. "병신……."
퍼억. 내밀어진 롱 소드가 에르의 가슴을 관통했다. 정확히― 심장이 있
을 부분에. "꺄아아아아아아악―!" 유우의 비명이 들려왔다. 콱. 콰악. 콰
악. 아그리큘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검을 좀더 밀어넣었고, 이내 검막이
에르의 가슴에 닿았다. 그러자 아그리큘은 발을 에르의 배에 대고 밀었다.
스르르륵―! 섬짓한 소리와 함께 검이 에르의 가슴에서 뽑혀나왔다. 풀썩.
에르는 맥없이 쓰러져 버렸다.
"큭큭큭…." 음산한 웃음과 함께 아그리큘은 뒤를 돌아보았다. 유우는 창
백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녀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
다. "그래. 그 얼굴이다. 이제 좀 고분고분해 지겠군." 그는 손에 들려 있
던 롱 소드를 다시 검집에 집어넣고는 유우를 향해 다가왔다. 천천히 허리
끈을 푸는 그의 손을 유우의 멍한 눈동자가 응시하고 있었다.
―죽은 것일까, 나는.
에르는 생각하고 있었다.
검에 가슴을 관통당했다. 그것도 아마 심장이 있을 부분에. 정상적이라면
극심한 고통과 함께 절명해야 하리라. 그러나… 이상하다. 고통이 없다.
느껴지지 않는다. 무감각하다. 오히려… 머릿속이 차분해진다.
'관통' '무감각'
숲에서 돌아온 그의 눈에 처음 보인 것은 웬 남자에게 희롱당하고 있는
유우의 모습이었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분노가 차올랐고, 그는 옆에 보이
는 장작을 들고 그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지킨다'
갑자기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그의 속에서 무언가가 깨어나려 하고
있었다. 잃어버린 나의 기억일까…?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젠 소용 없
는 일이었다. 어쩔 수가… 없는 일인 것이었다.
'소용이 없어지다' '이젠 늦어 버린' '어쩔 수가 없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이미지의 단편들에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하다. 이건 무언가 이상하다.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분명하다.
'아직 지킬 것이 남아 있는가?'
질문……. 이것은, '내'가 '나'에게 묻는 것일까?
'지키려던 그것에게 배신당할 지도 모른다. 그래도 끝까지 그것을 지키려
하겠는가?'
'난, 이들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거야.'
'죽어 버려… 모두 죽어 버려!'
'이것이… 너희가 원하던 나의 모습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배신당해도… 좋은가?'
……상관 없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조각."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눈을 돌려 유우가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거기에 있는 것은…….
한 남자… 그리고 시체 한 구였다.
남자는 욕설을 내뱉으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시체―의 입에서 피가 흘
러나오고 있었다. 남자는 마땅찮다는 눈으로 시체를 바라보며 고개를 흔들
었다. "빌어먹을 년." 그는 천천히 바지를 추슬렀다.
시체의 꼴은 처참했다. 옷이 모두 벗겨진 채― '그녀'의 몸은 이미 남자
에 의해 더럽혀져 있었다. 툭. 그녀의 벌려진 입에서 무언가가 굴러 떨어
졌다. 그것은…
그것은 반도막난 혀였다.
"……아아아아."
그 소리에 남자가 움찔 놀라며 이 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경악이 떠
올랐다. "네놈…! 살아 있었나!" 스릉. 그가 롱 소드를 뽑아 들었다.
"……."
조용히 서 있는 '그'를 남자는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침묵.
이내 남자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흥……. 어쩔 수 없는 녀석이군, 네놈도. 정말이지 꽤나 유약한 녀석이
구만. 이봐, 네 여자는 자살했다. 화도 나지 않는 거냐?"
"……."
"쿠쿡…. 하긴 '네 여자'도 아니지. 이년, 아직 처녀더군. 의외였어. 네
녀석…과 특별한 관계일 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래…, 조금, 뻑뻑하더라
그 말이지."
그렇게 말한 남자는 킥킥 웃으며 '그'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철저한 무표정만 떠올라 있을 뿐이었고, 그가 바라던 반응을 보
이지 않자 남자는 조금 실망한 표정이었다.
"아아, 그래그래. 어쨌든 네놈, 죽어 줘야겠어. 목격자가 있으면 곤란하
거든."
"……."
"크큭, 죽어라!"
남자가 달려들었고, '그'는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콰악! 검날은 '그'의
얼굴에 틀어박혔다. "큭큭큭…." 남자가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가 손을 들어올려 남자의 얼굴
을 잡아 올렸기 때문이었다. 남자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창백해진 얼
굴로 그가 신음을 흘렸다. "크… 크윽…!?"
툭. 투툭! 주먹 쥔 그의 손이 '그'의 팔을 쳤다. 그러나 충격은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굴곡 없는 어조로 '그'가 중얼거렸다.
"무의미……합니다."
'그'는 천천히 자신의 얼굴에 '박힌' 검을 뽑아 던졌다. 그 얼굴에는 상
처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을 본 남자의 얼굴이 보기 안쓰러울 정도
로 일그러졌다. '그'는 천천히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웃음… 그것은 냉소
였다.
"죽어 주십시오……." 남자의 얼굴을 붙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우두두… 두두둑. 남자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끄…끄에에…." 남자
의 머리에서 뼈가 우그러지는 소리가 났다. 끔찍한 고통에 남자는 기절하
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우드드… 끄득, 와득, …빠자작!
잘 마른 나뭇조각이 바스러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남자의 머리가 박살났
다. 마치 폭발이라도 하는 것처럼 피가 터져나왔고, '그'는 그대로 피를
뒤집어썼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시체… 유우를 바라보았다
.
유우의 모습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집은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길은 모든 것을 삼키고 있었다. 불타오르는 집… 모
든 것이 불타올라 사그라들고 있었다. 그랬다. 사그라드는 모든 것… 유우
와 에르, 두 사람의 추억도 불길 속에서 사그라들고 있는 것이었다.
나무에 기대앉아 조용히 불길을 바라보던 흑발의 남자는 천천히 몸을 일
으켰다. 그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안녕히…… 유우." 그는 불타오
르는 집을 뒤로 한 채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생각했다. 자신은 대체 누구인 것일까…. 자신은 '세라린'도
'에르'도 아니다. 그는 여전히 아무 것도 지킬 수 없었다. 어느 것에도…
어느 곳에도… 의미가 없는 존재. 이제부터의 그의 삶은 누구를 위해서인
것일까. 문득 그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여행이라도… 조금 해 볼까요."
답을 찾기 위한 여행. 어쩌면 영원히 찾지 못할 지도 모를 '답'을 찾기
위한 여행이다. 그러나… 상관은 없다.
시간은… 많이 있으니까.
====================
세이어의 외전이었습니다. 세라린의 외전 바로 뒤에 붙는 이야기입니다
. 즉, 이것도 현재에서 천 년 이상 전의 이야기라는 것이죠. (그 천 년
동안 세이어가 무엇을 했느냐 하면…… 여행을 했습니다!! 하하하;)
솔직히 세이어는 외전을 좀 더 쓰고 싶은 생각도 있긴 합니다만…… 도
대체 천 년 이상이나 살아온 놈이라, 너무 이야기가 길어져요……; 중요
한 이야기만 하나 잡아서 써 볼까 싶기도 합니다만…. 아마 네이시의 외
전―이런 걸 또 쓸 생각이냐!!―에서 또 등장하긴 할 것 같군요.
그럼 작가는 이만 물러갑니다∼∼^_^;;
Neissy였습니다.
P.S. 본편은 이번 주 내로 연재 재개합니다…… 기다리신 분들께는 죄
송합니다. ^_^;;
번 호 : 11232 / 21128 등록일 : 2000년 10월 20일 00:25
등록자 : NEISSY 조 회 : 164 건
제 목 : [연재] ◈ 데스트로이아 ◈ # 120
데스트로이아 DestroiA
Fa-las de sy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