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스트로이어-117화 (118/158)
  • 4. 선택 …… (14)

    비는 줄기차게도 내려대고 있었다. 하늘을 온통 뒤엎은 회색 먹구름. 그

    위에서는 태양이 밝게 빛나고 있을 테지만….

    "때가 별로 좋지 못한 것 같은데." 지오는 가볍게 인상을 찌푸리며 제시

    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제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몸에 걸친 경장의

    플레이트 메일이 영 어색한지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오므렸다.

    "좋지 않아."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히 지금은 한낮임에도 불

    구하고 주위는 저녁처럼 어둑어둑했다. 비는 계속 내려 길은 진흙탕으로

    변했고 10월 말의 싸늘한 바람은 살을 에이는 듯해 길을 이동하기에는 결

    코 적절한 때가 아니었다.

    하지만 때를 가려 움직일 처지가 아닌 것이, 지금 이들은 가능한 한 빨리

    프리네리아 왕성에 가야 했던 것이었다. "그래도 전하께선 마차 안에 계시

    니 조금은 나을 지도." 케일프로이 2세 황태자가 타고 있는 마차를 바라보

    며 제시아가 말했다. "우린 비를 다 맞아야만 하니. 별로 내키진 않는 일

    이지만."

    "명색이 기사인데 그 정도를 가지고 투덜거리긴."

    지오는 면박을 주는 말투로― 그러나 빙긋 미소지으며 말했다. 말에 탄

    채 적절한 간격을 유지하며 마차를 호위하고 가는 '진짜 기사들'을 바라보

    며 지오가 속삭였다.

    "확실히 기사는 말을 타고 가는 모습부터가 다르지 않아? 뭔가 격조가 있

    어."

    "지금은 우리도 기사야."

    "지금은, 일 뿐이잖아."

    지오는 히쭉 하고 입가를 끌어올렸다. 다리에 단단하게 힘을 줘 말에서

    미끄러지지 않게 단단히 고정한 후 팔짱을 끼며 그가 말했다.

    "의외였지, 우리가 기사가 다 되다니."

    "그거야 그렇지."

    제시아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슬쩍 고개를 돌려 앞 뒤

    에서 말을 달리는 다른 기사들을 흘끗 바라보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난 그것보다는 이 사람들이 우리를 간단히 받아들였다는 것이 더

    신기해. 게다가 난 여자잖아."

    "뭐, 여기사가 없는 건 아니니까."

    "그렇더라도 확실히 파격적인 인사인 것 만은 사실이지."

    "흠. 그건 당연한 거고."

    지오는 그렇게 말하며 거칠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머리카락 끝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튕겨 나왔다. 제시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너, 지금 네가 기사라는 걸 잊었어? '품위'를 지키란 말이야."

    "거 성가시네."

    지오는 한쪽 눈을 찡그리며 머리를 긁었다. 기사라, 그다지 익숙하지 않

    은 이름이다. 아니, 아무래도 익숙해질 것 같지 않다.

    "익숙해 지는 것이 좋을 겁니다, 나이트 세이버스."

    '나이트 세이버스'를 강조하며 잘츠가 말했다. 약간은 딱딱한 웃음과 함

    께 그는 지오가 걸친 경장의 플레이트를 슬쩍 눈짓해 보였다. "아마 곧 익

    숙해지실 것이긴 합니다만." 지오가 난색을 표했다. 얼굴에 어색한 미소를

    띤 채 뒷머리를 가볍게 긁으며 지오가 말했다.

    "기사라니, 좀 문제가 있지 않아요?"

    "어떤 의미에서의 문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우선 저희가 갑자기 기사랍네 하고 등장한다고 해도 믿어 줄 것 같지도

    않고, 그리고 그런 저희가 황태자의 호위기사를 한다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요?"

    "그것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법 날카로운 지오의 지적이었지만, 잘츠는 문제 없다는 듯 미소지었다.

    그리고 이번 일에 관한 설명이 이어졌다. 로제레트는 제국 최고의 기사단

    을 양성하겠다는 기치 아래 수십의 기사들을 훈련시키고 있다. 그들은 모

    두 최고로 엄선된 기사들이며, 특성상 외부에 알려져 있지 않다. 지오와

    제시아가 그 기사들 중 하다라고 둘러대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오는 찝찝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기사라니 당황스러운데요."

    "나이트 세이버스에게 맡겨진 일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겁니다. 나이트

    세이버스께서는 이미 로제레트 님의 말씀을 받아 들이지 않으셨습니까."

    "끄응." 지오는 가볍게 신음을 흘렸다. "이런 방법일 것이라고는 생각하

    지 못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게다가 기사라니, 정말이지 저하곤 안 맞는다

    고요!"

    "그렇다면 이제부터 맞추시면 됩니다."

    잘츠는 조용히 말했다. "너무…!" 지오가 뭐라 항변하려 했지만, 그 순간

    잘츠가 가볍게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지극히 사무적인 딱딱한 어조

    로 그가 말했다.

    "명심해 두십시오. 절대로 이번 일의 혐의가 우리에게 돌아와서는 안 됩

    니다. 저쪽의 소행인 것으로 해 두지 않으면 곤란합니다. 이해하시겠습

    니까?"

    "……."

    "로제레트 님께서 말씀하시길, 당신들은 믿을 수 있다고 하시더군요. 솔

    직히 말씀드려 저로서는 그 말에 의문이 가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일단

    그분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믿어야 하겠지요. 하긴 용병들은 약속 하

    나는 충실히 지킨다고 들었습니다만."

    "…약속은 지킵니다."

    지오가 약간 불쾌한 듯이 말했다. 잘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잘 됐군요. 가능한 한 세련되게 일을 처리해 주십시오. 물론

    당신들이 이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고 해도 로제레트 님의 일이

    크게 타격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만……."

    "……."

    "그분은 세련된 것을 좋아하십니다. '나이트' 세이버스."

    잘츠는 서늘하게 미소지었다.

    "나이트라는 것에 조금은 익숙해지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우르릉.

    저 편 하늘이 순간 밝아지고, 이어 천둥 소리가 들려 왔다. 아무래도 이

    비는 앞으로도 한동안 그칠 것 같지 않다. 분명히 말해 좋지 못한 일이다.

    달가닥, 달가닥.

    빗 속을 달리는 마차, 그리고 그 마차를 호위하며 말을 달리는 기사들.

    아무리 망토를 걸치고 있다고는 해도, 비가 이렇게까지 내려버리면 대책이

    없는 모양인지 기사들의 안색은 과히 좋지 않았다. 하긴 망토까지 젖어 버

    린 지금, 망토는 따뜻함은 커녕 오싹한 한기를 전해 주고 있을 뿐이었다.

    젖어 버린 대지. 축축하고 싸늘한 공기. 멀리 산이 보이는 숲 속.

    나이트 폰타나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 보았다. 저 앞 쪽에 약간 넓은 빈터

    가 있는 것이 보였다. 잠깐 쉬기에 적당할 만한 곳이다. 나이트 폰타나―

    파르네제는 고삐를 당겨 마차 바로 옆으로 말을 몰았다.

    "황태자 전하."

    "…무슨 일입니까?"

    창문이 열렸고, 그 안에서 황태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파르네제는 얼굴에

    천천히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적당한 장소가 보입니다. 마침 점심 때가 되었는데 잠시 쉬고 가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아아, 좋을 대로 하십시오."

    "예, 그럼……."

    파르네제는 다시 선두로 나서며 주위의 다른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저 빈터에서 잠시 쉬고 가기로 한다. 주위를 잘 살피도록!"

    빈터에 도착했고, 천천히 마차가 멈춰 섰다. 기사들은 마차를 중심으로

    원형을 그리며 말에서 내려섰다. 휴식을 취한다고는 해도, 어쨌든 경계를

    게을리 해서는 곤란한 것이다. 숲 속이란 언제나 위험이 함께 있는 곳이니

    까.

    "곤란하잖아." 지오가 중얼거렸다. 이렇게 비고 오고 있으니 모닥불도 피

    울 수가 없다. 어서 마을에라도 도착해서 쉴 수 있다면야 그보다 좋은 방

    법이 없겠지만, 가장 가까운 마을은 여기에서 약 50 킬로예즈 정도 더 가

    야 나온다.

    지금 이들이 있는 곳은 샴-드 산맥과 드라이나 산이 서로 만나는 지점,

    다시 말해 양옆으로 산이 늘어서 있는 산기슭이다. 제국 수도 리단을 출발

    한 지 5일째… 아직 그들은 제국을 벗어나지도 못하고 있었다.

    "드십시오."

    파르네제는 황태자에게 부드러운 빵과 냉수 한 잔을 건넸다. 지금은 숲

    속을 이동하는 중이니만큼 왕성과 같은 좋은 식사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 "……." 황태자는 조용히 그것을 받아들며 파리한 안색의 파르네제를 바

    라보았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힘들어 보이시는군요."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파르네제는 괜찮다는 듯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러나 창백해진 그의 얼

    굴은 그의 말과는 다른 것을 말하고 있었기에, 황태자는 조금 걱정스럽다

    는 눈빛을 했다. 하지만, 파르네제는 오히려 황태자가 걱정인 모양이었다.

    "오히려 전 전하가 걱정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아아. 아주 편안합니다."

    황태자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러나, 마차 안의 다른 사람들―시종들

    ―은 그와는 다른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마차란 것은 타고 있는 사람을 그다지 배려하지 않는 탈것이다. 어쨌든

    나무 바퀴란 것은 충격을 전혀 완화해주지 않는 것이니까. 물론 천천히 간

    다면야 그것이 큰 문제는 되지 않겠지만, 지금은 한가롭게 여행을 하는 중

    이 아니니 어느 정도의 속도를 내야 한다. 그런데다 이 길이란 것이 울퉁

    불퉁하고 질척질척한, 다시 말해 마차가 달리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는 길인 덕택에 마차는 꽤나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못 견딜 정도는 아니라 해도, 황태자의 말대로 '아주 편안할' 리는 없다.

    그것은 황태자와 같이 마차를 타고 있는 시종들의 얼굴이 말해주는 사실이

    다. 얼굴이 해쓱해진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멀미가 상당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파르네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럼…."

    하기는 이 정도는 견뎌야 하겠지. 아직 갈 길의 사분지 일도 가지 못했다

    . 벌써부터 쓰러진다면 곤란하다.

    "휴우."

    마른 빵을 씹으며 지오는 슬며시 한숨을 내쉬었다.

    "좀 낫군."

    한기가 좀 덜해지는 기분이다. 오늘따라 마른 빵이 반가운 지오였다. 우

    물 우물, 냠냠…. 그런 그를 보며 제시아가―그녀 역시 마른 빵을 씹고 있

    었다― 빙긋 웃었다.

    "살 것 같은가 보지?"

    "으응. 좀 낫다."

    "그래. 힘을 내야지. 아직도 갈 길은 머니까."

    "…상기시켜주지 않아도 잘 알아."

    지오가 투덜댔다. 확실히 아직도 갈 길은 멀다.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

    를 생각하고 지오는 문득 우울한 기색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예가의 후계자로서 명령한다."

    네이시는 조용히 말하고 있었다.

    "미풍의 축복, 바람의 혼 실프여. 나의 힘이 되어 지금 이곳에 그 존재를

    펼쳐라."

    휘이이잉….

    네이시는 양손을 앞으로 뻗었다. 바람이 뭉쳐오고 있었다. 방 안에 아무

    도 없는 것을 확인하며 그는 다시 한 번 말했다.

    "미풍의 축복, 바람의 혼 실프여. 나의 힘이 되어 지금 이곳에 그 존재를

    펼쳐라."

    바람은 뭉쳐 사람의 형상을 이루었다. 바람의 저위 정령, 실프…. 아름다

    운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것은 점점 그 모습을 뚜렷이 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거세게 바람이 휘몰아쳤다. 어느새 실프의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휘익!

    강한 바람이 네이시의 몸을 휩쓸었고, 네이시는 맥없이 튕겨나가 벽에 부

    딪혔다.

    그리고 다시 조용해졌다.

    "…크윽."

    나직한 신음과 함께 네이시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역시, 안 되나. 실프 하나 '다스리지' 못하다니. 갈 때까지 갔구나, 네

    이시."

    네이시는 씁쓸한 미소를 입에 머금었다. 알고는 있었다. 자신이 정령들에

    게서 거부당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어차피 별로 기대하고 있지도 않았다.

    기대가 크지 않았으니 실망도 적었다.

    "흥……."

    그는 작게 코웃음쳤다. 어차피 안 될 거라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단지 확인한 것에 지나지 않아.

    "역시 만나봐야겠지."

    네이시는 조용히 어질러진 방을 정리했다. 실프가 휩쓸고 지나간 자국.

    "쳇……."

    실프 하나 다루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슬퍼졌다. "…새삼스럽게." 네

    이시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마음에 들지 않아.

    방 정리가 끝나고 나서 네이시는 방을 나섰다. 세이어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자기 방에서 묵묵히 뭔가 생각에 잠겨 있을 테지. 비가 내리

    는 게 다행이야. 밖에 나갈 일이 없게 되니까.

    쾅.

    "어라?"

    방문을 여는 순간 무언가가 방문에 부딪히는 둔탁한 느낌이 전해져왔다.

    네이시는 약간 황당하다는 얼굴로 아래를 내려보았다. 웬 소년이 얼굴을

    움켜쥐고 바닥에 나동그라져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회색 머리칼을 어깨까

    지 기른 12세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였다.

    "왜 거기서 그러고 있어?"

    이상하다는 듯이 네이시가 물었다. 소년은 재빨리 몸을 일으키더니 연신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저, 그게,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리길래…."

    "헤에."

    네이시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니까,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뭔가

    하고 왔는데 갑자기 문이 열렸다, 그건가?

    "별 일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예, 예…."

    소년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사과하고는 뒤로 돌아 달음질쳤다. 어느

    새 복도 저 멀리로 사라져버린 소년의 모습을 바라보며 네이시는 고개를

    갸웃했다.

    "뭘 저렇게 허둥대는 걸까?"

    뭐, 별 일 아니겠지. 대수롭잖게 생각하며 네이시는 세이어의 방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멈칫.

    "…음?"

    순간 복도 저 편―즉, 소년이 사라진 쪽―에서 느껴진 이질적인 기운에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미약한, 정말 아주 미약한 기운이었지만, 분명 그

    것은…. "…마의 기운?" 네이시는 미간을 오므렸다.

    생각이 끝난 순간, 그는 튕기듯이 뛰쳐올랐다. 재빠르게 소년이 향한 곳

    으로 달려가며 네이시는 인상을 찌푸렸다.

    '좋지 않은데….'

    복도의 끝에는 나선형 계단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계단에 소년의 모습은

    없었다. 벌써 계단을 다 내려갔다고? 그럴 리가 없었다. 이 계단은 상당히

    길었다. 네이시는 의아한 눈으로 아래를 내려보았다.

    계단을 내려가 보았으나, 역시 그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귀신에 홀린 듯

    한 기분에 네이시는 어리둥절해했다.

    "…대체 뭐였지, 방금 그건?"

    뭔가에 속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왠지 모를 위화감….

    "기분 나쁜데."

    ====================

    전번에 깜빡 잊고 말을 안 했는데… 추천해주신 FORXC11님, 감사 드립

    니다. ^^ 더불어 독촉―일까? -_-;;―을 해주는 루시형에게도 감사를.

    열심히 쓰겠습니다!

    Neissy였습니다.

    번 호 : 10573 / 21128 등록일 : 2000년 09월 18일 23:42

    등록자 : NEISSY 조 회 : 152 건

    제 목 : [연재] ◈ 데스트로이아 ◈ # 115

    데스트로이아 DestroiA

    Fa-las de sy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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