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스트로이어-114화 (115/158)

4. 선택 …… (11)

아룬은 정령사이다. 그는 눈이 보이지 않는 만큼 다른 감각이 상당히 발달해 있어

서, 오히려 정령을 느끼기에는 더 좋은 몸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정령사로서의 뛰

어난 감각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을 정도까지 이르러 있었

다.

최근 그는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아끼고 있는 동생인 린의 모습이 어딘

지 심상치 않았던 것이었다. 그녀의 감정은 다른 많은 사람들과 비교해 너무 격했

고, 또 너무 감정기복이 심했다. 물론 그녀가 예전부터 계속 그랬던 것이었다면 별

로 상관할 일이 아니었겠지만, 최근 들어서 갑자기 이렇게 변해 버린 것이었기에

아룬으로서는 신경을 쓰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때문에 아룬은 린에게 크게 신경을 쓰게 되었고, 린을 예의 주시하던 중에 그는

린의 몸에 무언가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몸 안에 또다른 존재

가 있었던 것이었다. 이 같은 경우 상정 가능한 가능성은 하나였다. 바로― 임신.

하지만 아룬으로서는 그녀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변했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무

엇 때문에 저렇게 불안한 태도를 보이는 것일까? 물론 짐작 가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결국, 아룬은 그에 대해 린에게 직접 물어 보기

로 결정했다.

"후우."

린의 방―엄밀히 말하면, 왕성에서 린이 기거하는 방― 앞에 서서, 아룬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긴장된 눈동자로 잠시 방문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손을 들어

노크했다.

똑똑.

"누구세요?"

린의 목소리였다. 아룬은 조용히 대답했다.

"나야, 아룬. 들어가도 괜찮을까?"

"예, 들어 오세요."

문이 열렸고, 아룬은 안으로 들어섰다. 둘은 식탁 안에 있던 의자를 끌어당겨 적

당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예상대로 방 안에 세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린 혼

자 있었다. 물론 아룬은 세실이 방 안에 없는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지만, 짐짓 모

른 체하며 물었다.

"세실은 어디 갔어?"

"예…. 세이어 님께 간 모양이에요."

"그렇구나."

아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마침 잘 됐어. 할 말이 있는데."

"제게 말인가요?"

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룬은 어깨를 한차례 으쓱하며 싱

긋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너한테."

"무슨…?"

"글쎄, 뭐라고 서두를 꺼내야 할 지 적당한 말이 떠오르질 않지만…. 사실 그냥

넘어갈까도 생각해 봤지만 아무래도 대화를 좀 해 봐야 할 것 같아서 말하는 거

야."

"무슨…."

린의 얼굴에 불안감이 떠올랐다. 육감이랄까, 그녀는 아룬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한 모양이었다. 아룬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요즘, 네가 아무래도 불안해 보여."

"……."

"그러니까…. 나, 알고 있어."

아룬은 차라리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버리기로 했다. 좀 낯뜨거운 말이긴 했

지만, 어쨌든 빙빙 돌려서 말하는 것은 영 그의 성격에는 맞지 않았다.

린은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아, 알고 있다니요?"

그녀의 목소리가 불안정했다. 아룬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나서 말했다.

"네가 임신…했다는 거."

린의 얼굴색이 파랗게 변했다. 무릎 위에 얹혀진 그녀의 손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

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 무슨 말이죠?"

"이해해, 린. 내가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꺼내서 당황했겠지. 하지만 아무래도 말

해야 할 것 같았어. 그러니까…."

이야기를 이어 나가려던 아룬은 흠칫했다. 어느새 린의 표정이 변해 있었다. 표독

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린을 보며 아룬은 당

혹감에 젖었다.

린이 입을 열었다. 낮고, 차가운 어조였다.

"세실이 말했군요, 그렇죠?"

"어…, 아닌데."

"그럼 오빠가 어떻게 그걸 알고 있는 거죠? 어째서 그걸 알고 있는 거예요?"

"그게…,"

따지듯 묻는 린에게 아룬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알고는 있었지만, 확실히

지금의 린은 어딘지 이상했다. 아룬은 머뭇거리며 말했다.

"저기, 난 정령사…잖아. 그래서 어떻게 하다 보니까 알게 되었거든."

"그래요?…"

린은 맥이 탁 풀려버린 듯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그

녀가 말했다.

"그래요. 저, 임신했어요. 그런데 그게 왜요?"

"어, 그러니까…," 아룬은 머리를 긁적였다. "네가 요즘 불안해하는 것 같아서 이

야기를 좀 하고 싶었어. 난 네 오빠잖아."

"'오빠'…."

린은 나직이 '오빠'라는 단어를 되뇌였다. 아룬은 그 모양을 보고 안심한 듯 편안

하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걱정이 있는 것 같아서. 넌 옛날부터 그랬잖아, 무슨 걱정이 있어도 혼자서

속으로 삭히기만 하고. 난 네 성격을 알아."

"……."

"너, 세이어 씨를 좋아하고 있지? 나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어."

"아룬 오빠…."

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아룬은 말을 멈췄다. 말해 보라는 듯, 그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린은 잠시 머뭇거렸다.

"말하기 힘든 거라면 말하지 않아도 돼. 난 널 힘들게 하려고 하는 게 아니야."

아룬의 그 말이 기폭제가 된 모양이었다. 린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고, 그 모습에

아룬은 당황해서 말했다.

"리, 린? 왜 그래?"

"전… 전 이제 세이어 님께 가까이 갈 수가 없어요…."

"뭐? 무슨 말이야?"

"임신…했으니까요."

린의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넘쳐 그녀의 볼을 타고 흘렀다. 눈물은 그녀의 얼

굴 굴곡을 따라 입술을 지나 턱에 맺혔다. "……."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며 아룬이 말했다.

"무슨 말이야? 세이어 씨가 무슨 말을 했길래 그러는 거야? 일을 벌여 놓고서 이

제 와서 나몰라라 한다는 거야? 그렇다면 내가 말을…."

"그런 게… 그런 게 아니에요!"

린이 쥐어 짜내는 듯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어째서 그녀 주위의 사람들은 다 이러

는 걸까. 세실도, 아룬도. 당연히 세이어일 거라 단정짓고 말을 걸어온다. 하지만

… 그가 아니다.

원하지 않는 임신― 강간에 의해서. 어째서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 그녀는 절규

했다. 그녀가 세이어를 원망할 수 있었다면 그녀의 마음은 차라리 편했을 지도 모

른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그녀는 한 번 상대에게

마음을 주면 그에게 강하게 집착했고, 그에 대해 결코 나쁘게 생각하질 못했다.

그녀는 세이어를 원망하지 않았다. 차라리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그녀의 운명

을―만약 운명이란 것이 정말로 있다면 말이지만― 원망하면 원망했지, 세이어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그런 게 아니면…,"

"세이어 님이 아니란 말예요!…"

린은 소리쳤다.

그녀는 세실에게도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말하진 않았다. 그것은 자신보다도 더

세이어와 친해 보이는 세실에 대한 일종의 질투였을 것이다. 질투. 그녀는 세이어

에게 집착했다. 세이어가 자신만을 바라보아 주길 원했다. 그러나 세이어는 자신에

게 별다른 관심을 보여 주지 않았다. 오히려, 세실에게….

"왜, 왜 자꾸 그런 걸 물어 보는 거죠. 왜 그런 걸…."

그리고 린은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억눌려 있던 감정. 그것이 일시에 폭발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상체를 앞으로 숙이

며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순간 고요해진 방 안에는 린의 흐느낌 소리만이 들려오

고 있었다.

아룬은 적잖이 당황했다. 무슨 사정이 있었던 걸까?

"린…."

린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무엇이 그렇게 서러운 것일까, 그녀는 울음을 멈추질 못

하고 있었다. "린…." 아룬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를 보듬어 안았다. 부드

럽게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그가 말했다.

"미안…. 내가 괜한 걸 물었구나…."

그렇게 말하며 아룬은 약간 놀라고 있었다. 린이 이렇게 가냘펐던가? 꽉 쥐면 부

스러질 것 같이, 가느다란 그녀의 몸은 너무나도 연약했다. 흔들리는 그녀의 몸.

눈물 가득한 그녀의 얼굴은 너무도 애처로웠다.

"오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젖어 있는 목소리…. 아룬은 순간 가슴 속이 뜨거워지는 것

을 느꼈다. 린이 고개를 들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룬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

였다.

"……."

린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전… 저는…," "말

하지 마…, 린." 아룬은 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흑, 흐윽…."

복받쳐 오르는 감정에 휩쓸려 린은 또다시 눈물을 쏟아냈다. 여태껏 참아 왔던 모

든 것들이 일시에 솟구쳐 오르는 것 같았다. 신음과도 같은 흐느낌이 잇사이로 새

어 나왔다.

"린…."

아룬은 조용히 린을 안았다.

린의 예상대로, 세실은 세이어와 함께 있었다. 일단 기본적으로 그녀의 목적은 세

이어에게 '감정'이란 것을 불어 넣어 주는 것이었다.

어디까지나 세이어에게 접근(?)한 최초의 목적은 린, 그녀의 언니를 위한 것이었

으니까. 린은 이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지만. 물론 세이어와 그녀가 즐겁게―어디

까지나 세실이 일방적으로 즐거워하고 있는 것 뿐이지만― 대화를 하는 것은 사실

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를 어찌해보고자 하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감정이

란 것을 느끼게 해 주려는 것이었다.

…적어도 최초의 목적은 그랬다.

어떻게 된 일인지, 언제부턴가 세실은 세이어와의 대화가 실제로 '즐겁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말이 없고 차가운 그이지만, 그에게는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매력

이 있었다. 일종의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마력이랄까. 겉으로 보아서는 느낄 수 없

는 것이 그에게는 있었다.

세이어와 대화하는 것은 즐겁다― 세실은 그 사실을 굳이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어쨌건 이왕 대화를 할 거면 즐겁

게 하는 것이 좋고, 요즘에 들어서는 세이어도 조금씩 변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

다. 애초의 계획대로 그에게 감정이 생기면, 그도 린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것으로 좋은 걸까?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모르겠어.'

세실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마음을 자신도 잘 알 수가 없었다. 세이어와 린이

맺어진다면 좋겠지. …하지만, 정말로 좋은 걸까?

"아악, 모르겠어!"

그녀는 소리치며 거칠게 고개를 흔들었다.

"…왜 그러십니까?"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세실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왕성 정원 안, 맞은 편 벤치에 앉아 있는 세이어가 이상하다는 듯이 자신을 쳐다

보고 있었다. 세실은 머쓱하게 웃었다.

"아하하. 그냥 생각을 좀."

"그렇습니까."

세이어는 가볍게 고개를 한차례 끄덕였다. 감정이 배제된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감정이 배제된? 아냐, 틀려.'

세실은 생각했다. 세이어는 감정을 숨기고 있는 게 아니다. 저것이 그에게는 자연

스러운 거다. 물론 그에게 감정이란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단지 그의 감정은 얼어붙어 있는 것 뿐이다.

'그러니까… 내가 그걸 녹여 버리겠다는 거지.'

세실은 빙긋 웃었다.

"이만, 가겠습니다."

"…에?"

들려온 세이어의 목소리에 세실의 정신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세이어는 이미

벤치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시간이 되었습니다."

"어… 훈련장에 가시게요?"

"그렇습니다."

그렇게 답하며 세이어는 몸을 돌렸다. 휘익. 바람이 일어났고, 망토가 펄럭였다.

그가 입은 백색의 갑옷이 태양 빛을 반사해 아름답게 빛났다. 세실이 말했다.

"바쁜 모양이네요?"

세이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그대로 발걸음을 옮겨 정원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 뒷모습을 보며 세실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차피 세이어가 대답

할 거라고 생각하고 한 질문은 아니었지만.

세이어가 바쁘다는 것 정도는 세실도 잘 알고 있었다. 원래도 그랬긴 했지만, 성

기사로 임명받고 나서는 그의 모습을 보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훈련장에 간다면

그의 모습을 얼마든지 볼 수 있긴 하겠지만, 아무래도 성기사들뿐인 훈련장에 여자

혼자 간다는 것은 낯뜨거운 일이었다― 세이어에게 대련을 청하는 성기사들이 꽤

많았던 탓이었다. 제 65 람베르티라는 높은 서열을 쉽사리 납득하지 못해서인 모양

이었다.

물론 세이어와 검을 겨루어 보고 나서는 다들 그의 높은 람베르티를 인정하게 되

었다. 세이어는 이곳의 누구도 간단히 이길 수 있는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한데

잘된 일이라 해야 할지, 잘못되었다고 해야 할 지, 그에 대한 대련 요청은 전혀 줄

어들지 않고 있었다. 일종의 호승심인 모양이었다.

"슬슬 돌아가 볼까?"

세실은 히쭉 하고 웃었다. 지금쯤 린 언니는 무얼 하고 있을까? 그러고 보니 요즘

그녀는 밖에 잘 나오려 하지 않는다.

"또 질투하려나…? 하지만 그건 내 잘못이 아닌걸."

정원을 빠져나와 왕성 안으로 들어서며 세실은 어깨를 으쓱했다. 문득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그런대로 세이어와 잘 지내고 있는데 정작 당사자인 린은

세이어에게 대시를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머리를 스쳐서였다.

탁탁탁.

세실은 나선형 계산을 빠르게 두 단씩 뛰어 올라갔다. 경쾌한 발놀림이다.

'언니의 질투를… 이용해 보는 건 어떨까?'

세실은 생각해 보았다. 린은 자신보다도 세이어와 더 친해 보이는 세실을 질투하

고 있다. 그것을 잘 이용하면 린이 적극적으로 나서게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괜찮을까나.'

세실은 슬며시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복도로 들어

서며 그녀는 슬며시 고개를 저었다. "아아, 복잡해."

그녀는 자신과 린에게 주어져 있는 방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녀가 눈을 찡그렸

다. 방 안에서 무언가 대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누가 있나? 린 혼자

였을 텐데?

세실은 이상하게 생각하며 조용히 문을 열었다.

"……!"

그리고 보여진 안의 광경에, 세실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린은 방바닥에 주저앉아 있었고, 그런 린을 아룬이 끌어안고 있었다. 둘은 무언가

속삭이고 있는 듯 했다. "…꿀꺽." 세실은 침을 삼켰다. 당황스러운 광경이었다.

"……."

세실은 다시 조용히 문을 닫았다.

- To be continu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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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즐거운 인생이어라. (의미불명)

Neissy였습니다.

번 호 : 10236 / 21128 등록일 : 2000년 09월 08일 23:47

등록자 : NEISSY 조 회 : 167 건

제 목 : [연재] ◈ 데스트로이아 ◈ # 112

데스트로이아 DestroiA

Fa-las de sy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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