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스트로이어-113화 (114/158)
  • 4. 선택 …… (10)

    지오는 머리를 긁적였다.

    "죽이지만 않는 거지?"

    "내려오기나 해."

    제시아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지오를 쏘아보며 말했다. 그 냉랭한 어조에 지오는

    잠깐 움찔했지만, 곧 예의 미소를 되찾으며 말했다.

    "싫어."

    제시아의 미간이 꿈틀했다. 순간 그녀의 눈이 빛났고, 살기마저 어린 그 눈빛에

    지오는 식은땀을 흘렸다. "그래…, 그렇게 나오겠단 말이지…?" 제시아가 미소지었

    다. 시리도록 차가운 미소였다.

    "서, 설마, 너?"

    지오가 외쳤고, 제시아는 자신의 품 속으로 손을 집어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자초한 일이야, 지오."

    그렇게 말한 제시아가 품 속에서 꺼낸 것은 길다란 가죽 채찍이었다. 지오의 얼굴

    색이 파랗게 변했다.

    "제… 제시아, 너."

    "문답무용이야!"

    촤악. 경쾌한 소리와 함께 길이 6예즈의 가죽 채찍이 허공을 갈랐다. 어느새 제시

    아의 입가에 즐거운 듯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마치 이 상황을 즐기는 듯한.

    "으헥!"

    공중에서 몸을 한바퀴 회전시켜 가까스로 제시아의 공격을 피해낸 지오는 식은땀

    을 흘리며 외쳤다.

    "그, 그만! 내려갈게, 내려갈 테니까,"

    "늦었어! 후훗, 후후후후훗!"

    촤악. 다시 한 번 울려 퍼지는 경쾌한 소리.

    무엇보다도, 담장 위에 서 있는 지오로서는 저 공격을 피해내기가 힘들었다. 가능

    한 동작이 한정되어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담장 저 편으로 도망갈 수도 없는 것

    이, 담장 저편은 왕성 정원이었다. ―물론 문제삼기로 치자면 왕성과 이곳을 가로

    막는 담장 위에 올라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문제가 되지만―

    슈슈슈슉. 촤악, 촤악 촤악 촤악!

    "제엔자앙―!" 숨돌릴 틈 없이 자신을 노려오는 채찍을 피하며 지오는 절규했다.

    물론 지오는 알고 있었다. 제시아가 이중 인격이란 사실을. 평소에는 약간 폭력적

    인 여성일 뿐이지만, 일단 일정 이상으로 화가 나면. 다르게 말해, 채찍을 잡으면

    사람이 변해버린다.

    "오호호호호호호호∼!"

    …저렇게 말이다.

    촤악. 철썩.

    "욱!" 상념이 너무 길었던 모양이다. 채찍에 얼굴을 강타 당한 지오는 오른손을

    들어 코를 움켜쥐며 비명을 내질렀다. 콧잔등이 쓰라렸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고통에 주춤하는 것 조차도 사치였다. 다시 또 날아

    오는, 이번엔 자신의 목을 노리고 날아오는 채찍에 지오는 기겁하여 옆으로 뛰었다

    .

    '살고 싶어!'

    지오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는 이 상황을 자초한 자신이 저주스러울 뿐이었

    다. 주위에 빙 둘러서서 이 상황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는 구경꾼들을 보며 그

    는 왠지 모를 절망감을 느껴야만 했다.

    물론 지오는 알지 못했다. 지금 그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단지 그들 주위의 구

    경꾼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당히 날렵한 움직임이군."

    로제레트가 순수한 감탄을 토했다. 그의 옆에 있던 잘츠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의

    빛을 표했다. 놀랐다는 듯 가볍게 눈썹을 씰룩이며 그가 말했다.

    "저건… 어쌔신의 움직임, 거기에 도적들의 움직임이 가미되어 있군요."

    "예상은 했지만…, 적격이야."

    로제레트가 말했다. 잘츠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예? 로제레트 님, 설마,"

    "무슨 문제라도 있나, 잘츠?"

    "아, 아니,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잘츠가 말끝을 흐렸다.

    "좀 더 둘러보고 결정해도 좋다는 뜻이겠지?"

    로제레트가 빙긋이 웃었다.

    "잘츠, 자넨 내가 신중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 아니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잘츠는 순간 표정을 굳히며 그렇게 대답했다. 정색을 하며 대답하는 그에게 로제

    레트는 가볍게 미소지었다. 그는 다시 저 편, 담장 위에서 채찍질을 피하기 위해

    현란한 몸놀림을 보이고 있는 지오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난 내게 사람을 보는 눈 정도는 있다고 생각하는데."

    손가락 끝으로 안경을 밀어 올리며 로제레트는 다시 말했다.

    "저건 싸움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예. 그렇습니다."

    이쪽에서는 담장 너머의 광경은 보이지 않았지만, 지오의 표정만 보아도 그 정도

    는 알 수 있었다. 저건 싸움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장난에 가까웠다. ―물론 좀 살

    벌하긴 하지만.

    "저런 몸놀림이 자연스럽게 나온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자네라면

    잘 알겠지."

    "예."

    "데려 오게."

    "예?"

    로제레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잘츠가 눈을 깜빡였다.

    "저들을 데려 오라고."

    "저들… 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저들."

    로제레트는 조용히 답했다. 농담인 듯 진담인 듯 가볍게 미소지으며 그는 말을 이

    었다.

    "쓸만한 인재야. 데려오도록 해."

    로제레트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그대로 몸을 돌려 자신의 집무실을 향해

    걸어가 버렸다. 우두커니 서서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잘츠가 중얼거렸다.

    "즉흥적인 결정인가? 아니면…."

    그로부터 약 5분이 지난 후, 로제레트의 집무실에 지오와 제시아가 도착했다. 문

    앞까지 그들을 안내한 잘츠는 문 앞에 서서 집무실을 지켰고, 지오와 제시아만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소파에 앉아 있던 로제레트는 맞은 편의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앉아라."

    지오는 주저 없이 털썩 주저앉았고, 제시아는 약간 머뭇거리다가 지오가 앉는 것

    을 보고 따라 앉았다. 로제레트가 미소지었다.

    "자네들의 이름은?"

    "지오 세이버스."

    "제시아 이오리카."

    "흐음," 로제레트는 안경을 치켜올렸다. "내가 왜 자네들을 불렀는지 아는가?"

    "알 거라고 생각하고 묻는 건가요?"

    지오의 반문이 의외였는지 로제레트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재미있다는 듯이 미소지었다.

    "후훗. 마음에 드는군, 자네."

    "저흴 부르신 이유는 무엇이죠?"

    약간은 냉랭한 어조로 제시아가 물었다. 그녀는 이 로제레트란 남자가 마음에 들

    지 않았다. 이전에 그녀가 지오에게도 말한 바 있지만, 역시나 로제레트의 눈빛은

    어딘지 그녀를 오싹하게 했다.

    로제레트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자네들의 직업은?"

    "용병, 아니면 뭐겠어요?"

    제시아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녀는 이런 식의 대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그것 말고."

    로제레트는 눈을 가늘게 떴다. 탐색하는 듯한 눈길이 지오와 제시아를 한차례 훑

    고 지나갔다. 오싹한 느낌에 둘은 움찔했다.

    "용병이 되기 전에 무슨 일을 했었지?"

    "……."

    "암…."

    지오가 대답하려는 찰나, 제시아가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대답하지 마!' 그

    녀는 곁눈질로 지오를 째려보았다.

    "대답하고 싶지 않다는 건가? 뭐, 아무래도 상관 없지만."

    로제레트는 정말로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듯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제시아는 얼

    굴을 찌푸리며 따지듯이 물었다.

    "저희에게서 무엇을 원하시는 거죠?"

    "글쎄."

    로제레트는 피식 웃었다. 그는 잠시 지오와 제시아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이윽고

    슬며시 고개를 가로 저었다. 미안하다는 얼굴로 그가 말했다.

    "실례했군."

    "……?"

    "잘츠."

    "예." 문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제레트가 천천히 말했다. "이들을 다시

    데려가라."

    "예."

    삐걱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잘츠가 안으로 들어왔다. 제시아와 지오가 당황한

    얼굴로 로제레트와 잘츠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제시아가 말했다.

    "이게 무슨 뜻이죠?"

    "몰라서 묻는 건가?"

    "멋대로 부르고는,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다시 그냥 가라고요? 그렇게는 못하겠는

    데요."

    '당돌한 여성이군.' 로제레트는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총리대신인 자신에게 저런

    태도를 취할 수 있는 부류는 두 부류다. 자신의 신분을 믿고 있거나, 자신의 실력

    을 믿고 있거나. 하지만 용병에게 믿을 만한 신분이란 것이 있을 리 만무하다.

    '자신의 실력에 상당한 자부심이 있는 모양이군. 하긴 그럴 만도 하겠지만.'

    그렇게 생각한 로제레트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갈 수 없다면, 어떻게든 내 이야기를 듣겠다는 건가?"

    "그래요."

    "하지만 자네들의 태도를 본다면 대화를 나누기는 조금 힘든 것 같은데. 자네들이

    조금 더 협조적으로 나와 주지 않으면 원활한 대화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그건…," 제시아는 인상을 찌푸렸다. 잠시 후 이윽고 한숨을 한차례 내쉰 그녀가

    말했다.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다행이군. …잘츠,"

    "예."

    "지키고 있어라."

    "예."

    잘츠는 깍듯이 인사하고 나서 다시 방을 나섰다. 끼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

    려오는 것에 맞춰 로제레트가 입을 열었다.

    "그럼 이야기를 계속할까."

    "……."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제국에 있어 극히 중요한 이야기다. 그러니 절대 비밀

    로 해 주었으면 한다. 자네 같은 용병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확실히

    불안한 일인 것이 사실이니까."

    "황송하군요." 제시아가 중얼거렸다. 로제레트가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지 않는 모

    양이었다.

    "먼저 한 가지 묻지. 자네들, 프리네리아 왕국에 가 본 적이 있나?"

    "있죠."

    지오가 대답했다. 볼을 긁적이며 그가 물었다.

    "그런데 그건 왜 묻죠?"

    "부탁할 것이 있기 때문에."

    로제레트는 조용히 답했다. 제시아가 이상하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부탁? 일국의 총리대신이 일개 용병에게 '부탁'해야 할 일이 있나요?"

    "있지." 로제레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제시아는 갑자기 왠지 모를 불안감이 자신을 엄습해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

    는 로제레트를, 정확히 말해 로제레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잿빛 눈동자에서

    강렬한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말 그대로― 타오르는 듯한 눈동자였다.

    제시아는 제국에 온 이래 계속 느껴왔던 기분 나쁜 예감이 점점 그 고개를 쳐드는

    것을 느꼈다. ―이 남자,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거지?

    "뭐죠, 그 부탁할 일이라는 게?"

    "그보다 먼저 해둘 말이 있는데."

    로제레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해두지. 이 일을 절대 비밀로 해 줄 수 있겠나?"

    "뭐, 그러죠. 그야 어렵지 않지만. 대체 뭘 그리 조심하는 거죠?"

    지오가 고개를 갸웃했다. 로제레트는 그런 그를 보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심

    각한 표정으로 그가 말했다.

    "간단히 말하지 말고, 좀더 심사숙고했으면 하는데."

    "……?"

    "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시키려는 거죠? 보통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제시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 로제레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밤중에 영문도 모르고 불려온 것도 일단 불만인데, 대체 무슨 심각한 말을

    하려는 것인지는 몰라도 이런 식으로 자신들을 밀어붙이는 분위기라니, 확실히 마

    음에 들지 않았다.

    앞서 말한 적이 있지만, 제시아는 이런 식의 대화는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 그녀가 지금 이 자리에 계속 있는 것은, 단지 이야기를 듣지 않고 끝까지 나가면

    아무래도 찝찝하기 때문이었다.

    로제레트가 말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자네들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다."

    "……?"

    "이 일의 특성상 용병이 필요했다. 그래서 용병들 중에서 적임자를 찾아보았다.

    그리고 그 중 자네들이 가장 적격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지. 아까의 모습은 약간

    의외였지만."

    "아까의 모습?" 지오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담 위에서 잘 움직이더군."

    로제레트는 대수롭잖다는 듯 대답했다.

    "뭐,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니까. 이어서 말하지. 나는 자네들이 이 일에

    가장 적격이라는 결론에 도달했고, 그래서 자네들을 불렀다."

    "아까부터 계속 이 일, 이 일 하는데,"

    제시아는 찡그린 눈으로 말했다.

    "대체 '이 일'이 뭔데 그래요?"

    "비밀은, 지킬 수 있겠지?"

    "지켜요, 지킨다니까요. 지겹게 왜 한 질문 또 하고 또 하고 그래요?"

    "자넨 대답하지 않았으니까."

    로제레트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확실히, 지오는 비밀로 하겠다고

    대답했어도 그녀는 그렇게 대답한 적이 없다.

    "그럼… 말하도록 하지. 물론 승낙하든 거절하든 그것은 자네들의 자유이지만, 가

    능하다면 승낙해 주었으면 한다. 보수는 결코 적지 않으니 그에 대해서는 걱정할

    것 없다."

    "뭐, 알겠으니까," 지오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지루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서 말이나 해 봐요."

    로제레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암살해 주었으면 하는 사람이 있다."

    - To be continued... -

    ===========================================================================

    지난번 지오의 대사 중, '실제론'을 '실재론'으로 정정합니다. …으으, 난 바보

    다;; 어째서 실재론을 실제론으로 쓴 거지…;

    음, 그리고 격려해주신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특히 TOPAZ85님, 메일 감사했습

    니다. 웃샤, 힘을 내자, 힘을!

    Neissy였습니다.

    번 호 : 10190 / 21128 등록일 : 2000년 09월 06일 23:32

    등록자 : NEISSY 조 회 : 168 건

    제 목 : [연재] ◈ 데스트로이아 ◈ # 111

    데스트로이아 DestroiA

    Fa-las de syent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