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선택 …… (9)
"반복되는 역사. 인간들은 과오를 되풀이하지."
테라스. 대리석 난간에 기대 선 로제레트는 한 손에는 와인잔을 들고 수도의 야경
을 감상하고 있었다. 로제레트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다시 한 모금 와인을 목으로
넘겼다.
"정상화시키기 위해서라도, 여기서 끊어야만 할 필요가 있지. 올바른 방향으로 흘
러가지 않는 역사란 의미가 없으니까."
로제레트는 와인을 한 모금 입에 머금고 그 향을 음미했다. 부드러운 향기…. 로
제레트는 미소지었다.
"로제레트 님." 목소리가 등을 타고 넘어왔다. 로제레트는 천천히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제복을 입은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90도로 상체를 숙여
깍듯이 인사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달하신 일, 끝마쳤습니다."
"문제는 없었겠지?"
"예상하신 대로입니다."
"그렇군." 로제레트는 입술 끝을 치켜올렸다. "그 외에 특별한 일은 없었나?"
"없었습니다."
"그런가…."
로제레트는 빙긋 미소지으며 와인잔을 들어 입술을 적셨다. 그러는 그를 약간 불
안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남자는 이윽고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정말 이것으로 좋겠습니까?"
"무엇이 말인가, 잘츠?"
"희생이 너무 큽니다. 물론 아시겠지만 이런 식의 전쟁은…."
"개혁에는 언제나 희생이 따르기 마련이지."
"그러나…!"
"잘츠," 로제레트는 나직이 말했다. "내 말은 끝나지 않았다."
"……."
"어느 시대에서고, 민중들이 원하는 것은 변화가 아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안
식이고 평화이지. 그들은 그들을 싸고 있는 현실이 송두리째 깨어져 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아. 물론 언뜻 생각하면 그것이 옳게 보일 수도 있겠지. 우선 당장은
피를 흘리지 않으니까. 그러나 잘츠. 눈 앞의 일만 생각한다면 인간이 다른 동물
과 무슨 차이가 있겠나."
"……."
"현실에 안주해선 안 돼. 우리는 보다 앞날의 일을, 미래를 생각해야만 한다. 그
리고 그 미래를 위해 나아가야 한다. 설령 그것으로 인해 지금 고통받는다 해도,
고비를 넘기면 보다 밝은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로제레트 님."
잘츠는 눈동자를 불안하게 굴리며 말했다. 그의 미간이 살짝 좁혀져 있었다.
"그 희생이란 것이 너무도 큽니다. 굳이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지 않아
도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민중들의 의식은 깨이지 않아."
"그러나…."
"전쟁을 통해 인간들의 역사는 발달해 왔다."
로제레트는 조용히 말했다. 와인잔을 기울여 그 안에 담긴 붉은 빛의 액체를 바라
보며, 로제레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 잘츠. ―'인간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다' '인간들은
자신의 존재를 계속 주장하기 위하여 계속 그들과 싸워 왔다'… 라고."
"비전의 서… 로군요."
"그렇다. 비전의 서."
'비전의 서'. 프리네리아 대륙 최고의 현자라 일컬어지는 안트페르펜이 집필했다
는 책. 이 책은 일종의 예언서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는데, 저자가 저자이니만큼 그
지명도는 다른 어느 책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물론 혹자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책이 안트페르펜 본
인이 쓴 것인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하고. 어쨌든 세상에는 가짜가 많은 법
이니까. 하지만 이 책에는 안트페르펜 자신이 썼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몇 가지
증거가 있었다.
첫 번째는 필체였다. 이 책은 인쇄된 것이 아니고 순수히 손으로만 쓰여져 있었는
데―이것이 이 책이 몇 권 존재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필체는 알려진 그
의 필체와 동일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 책에 걸려 있는 보존 마법이었다. 세월
이 흘러 책이 삭아 없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는지 이 책에는 보존 마법이
걸려 있었는데, 이 보존 마법의 마나 파장은 분명히 그의 것이었다. 필체는 복제가
가능해도 마나 파장만큼은 결코 복제가 불가능하다. 결국 이 책은 그 본인이 쓴 것
이 확실한 것이었다.
로제레트는 와인잔을 난간 위에 살짝 올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그의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투쟁을 통해 자신을 발견해 나가지. 스
스로를 한 단계 높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역시 투쟁인 거다."
"하지만, 로제레트 님…. 그것은 약간 틀리지 않습니까? 그 책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인간에게 적대적인 존재들과의 투쟁이었지 인간과의 투쟁이 아니었습니다."
"후후." 로제레트는 낮게 웃음 지었다. "자넨 아직 모르는군."
"예?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인간의 가장 큰 적은 인간이다."
로제레트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힘이 있었다.
"인간이 절멸된다면 그것은 다른 존재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인간 자신 때문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잘츠 자넨 모르겠지만, 실제로 인간은 이미 파멸을 향
해 치닫고 있다. 스스로를 망쳐 가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외상이
있다면 그것은 차라리 고칠 수 있다. 하지만 안에서부터 곪아 들어가는 것은 오
히려 고치기 힘든 것이다."
"자멸… 한다는 것입니까?"
"그래." 로제레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도시의 야경을 내
려다보았다. "시대는 변해간다." 그가 다시 말했다.
"시대는 변한다. 역사도 변하지. 그러나 인간만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들
은 과오를 되풀이하지. 그래서 결국 역사는 반복된다. 결국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거다. 인간 자신이 변하지 않는 이상 그 어느 것에도 의미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전쟁을 일으키려는 것이다."
"……."
"이것은 역사를 올바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하기 위해서다. 반복되는 과오. 반복되
는 역사. 여기서 끊어야만 한다. 그 어떠한 희생을 치루어서라도 말이다."
잘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을 다문 채 눈썹을 씰룩거리고 있는 그를 보며
로제레트는 피식 조소했다. "자네는 나의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군." "…
…." 로제레트는 난간에 올려놓았던 와인잔을 잡았다. "피." 그는 천천히 와인잔을
기울여 안에 담겨져 있던 붉은 액체를 바닥에 흘렸다.
"피 없이는 각성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잘츠."
잘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혈 혁명이라. 듣기에는 좋은 말일 지 모르지. 그러나 너무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해. 지금은 그리 시간이 많지 않아. 빠른 시간 내에 민중의 각성을 이루어낼 수
있는 방법은 피에 의한 것 뿐이다. 그것 뿐이야."
로제레트는 바닥을 흐르는 붉은 액체를 음울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 나서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래도 후세 사람들은 나에게 감사할 것이다… 라는 따위의 말을 지껄일 생각은
없다. 그러나 나는 지금의 내 생각이 분명히 옳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무어라고 말하든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해 나가는
것 뿐이다. 나는 이미 이 길을 선택했다. 망설임이 있어서는 안 돼."
"그러나 로제레트 님…," 탄식과도 같은 긴 한숨과 함께 잘츠가 입을 열었다. "그
것은 로제레트 님께서 선택하신 길이지 다른 사람들이 선택한 길은 아니지 않습니
까."
"그래, 맞아."
로제레트는 잘츠의 말을 긍정했다.
"이것은 내 선택이지 그들의 선택은 아니다."
"그렇다면…!"
"민중은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아. 그들은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
네라면 알고 있겠지.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또 하나의 선
택이라는 것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선택을 따르려는 것, 그것이
그들의 선택이다."
잘츠는 입을 다물었다. 대신 그는 불안감이 가득찬 눈빛으로 로제레트를 바라보았
고, 그 눈빛에 로제레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내 생각을 이해해 주길 바라는 것은 아니다. 잘츠."
잘츠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착 가라앉은 어조로, 조심스럽지만 그러나 단호하게 그는 말했다.
"받아들이기 힘든 것 뿐입니다. 전쟁은 이상이 아닙니다. 전쟁은 현실입니다. 그
어느 것으로도 전쟁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상은 현실과는 다르다….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잘츠?"
로제레트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는 야망가이기는 했지만 독단적인 사람은 아
니었다. 잘츠의 반론은 분명 이치에 합당한 것이었으므로, 로제레트는 그의 말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취해 보였다.
잘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런가…, 아쉬운 일이군."
로제레트는 우울한 기색을 보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나에게도, 자네에게도 그리 좋은 일은 아니지. 서로 생각이 맞지 않는다는 사실
은 말이야. 특히나 이같이 국가적 중대사를 눈앞에 두고 있는 시점에서는…."
그의 목소리는 마치 속삭이는 것처럼 퍽 낮은 톤의 목소리여서, 잘츠는 그의 말을
놓치지 않기 위해 청각에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바람에 흘러가는 듯하던
그의 목소리가 어느 순간 다시 높아졌다.
"묻고 싶군. 잘츠, 자네는 이 일을 후회하나?"
"……아니오," 잘츠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다행이군."
굳어졌던 로제레트의 표정이 비로소 펴졌다. 안심했다는 듯이 다시 미소를 띤 그
가 말했다.
"그런데 잘츠, 적당한 사람은 찾아냈나?"
"아직…."
잠시 로제레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해하던 잘츠는 곧 그가 말하는 '
적당한 사람'이 무엇인지를 기억해내고 말했다. 로제레트가 조용히 물었다.
"맡겠다는 사람이 없는 건가?"
"예.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잘츠는 곤란하다는 것을 드러내려는 듯 슬쩍 미간
을 오므리며 말했다. "목표가 목표인 만큼, 어지간해서는 힘이 들 것 같습니다."
"하긴 그렇겠군."
로제레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잘츠 자넨 아무래도 상관 없는 건가? 자네도 제국민이 아닌가."
"예? 아, 아닙니다. 제가 안위를 걱정하는 분은 오직 로제레트 님 뿐입니다. 그런
것에 대해서는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잘츠는 고개를 도리질 쳤다. "그런가." 로제레트의 입가에 조금 어색한 미소가 떠
올랐다. 흡족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해하는 듯한 그런 미소였다. 잘츠가 말했
다.
"조금 더 찾아볼까요? 외부에서 찾아보는 것도…."
"아니, 됐다."
로제레트가 손을 내저었다.
"어차피 결과는 비슷할 거다. 제국 사람들에게 그런 일을 시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이겠지."
"그럼, 프리네리아 왕국에 의뢰를?" 잘츠가 물었다.
"아니, 그것은 불가능해. 오히려 이쪽이 약점을 잡힐 수 있다."
로제레트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럼 어떻게…?"
"글쎄," 로제레트는 무언가 좋은 생각이 난 모양인지 빙긋 미소지었다. "제국이나
왕국 그 어느 쪽에도 소속되지 않은 사람이 필요하겠지."
"그럼 렌샤 공국이나 샤이어 제국에…? 하지만 그 곳은 너무 멀잖습니까?"
"멀리 갈 것도 없지."
로제레트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 모습은 어떻게 보나 이미 해결책을 찾아낸 사람
의 것이었기 때문에, 잘츠는 그가 어째서 이런 여유 있는 태도를 보이는지에 대한
강한 궁금증을 느꼈다.
그에 대해 잘츠가 물어보려는 순간, 로제레트가 입을 열었다.
"당장 이 제국 내에 있지 않나? 그 어느 쪽에도 소속감을 가지지 않는 자들이. 조
국과 적국 같은 것을 가리지 않는 이들이."
"예? 그런 자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잘츠는 약간 당황해서 물었고, 로제레트는 조용히 대답했다.
"용병."
"물론 이상과 현실은 달라."
지오는 어찌 보면 뻔뻔스러워 보일 정도로 여유 있는 미소와 함께 말했다.
"머릿속에서야 그것이 좋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 하지만 몸은 그에 따
라 주지 않는 거야."
"…그렇다고 해서," 제시아는 애써 화를 억누르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의 관자
놀이가 실룩거리고 있었다. "네가 또 도박을 한 게 정당화 되는 건 아냐!"
"어, 그거야 물론이지."
여전히 뻔뻔스러운 미소와 함께 지오가 다시 말했다.
"하지만 어쩌겠어? 이건 엄연히 현실이야. 그리고 넌 이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거야. 관념론과 실제론 사이에서 헤매이는 너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안타까워서
하는 소리야."
"…너 그게 무슨 뜻인지나 알고 하는 말이야?"
"그야," 지오는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말했다. "당연히 모르지."
"…그건 그렇게 가슴을 펴고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을 써서는 훌륭한 남자가 될 수 없어, 제시아."
"난 여자야."
제시아의 극히 타당한 반박에 지오는 잠시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눈을
감고 미간에 손을 짚으며 잠시 고민하던 지오는 곧 해결책을 찾아낸 듯 밝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앗, 저기 소가 넘어간다!"
"…소가 넘어가긴 어딜 넘어가."
"앗하하. 속아 넘어갔다!"
"……," 잠시 할말을 잊어버린 제시아는 이내 입가를 실룩이며 말했다. "…유치해
."
"괜찮아! 유치함 속에 진리가 있으니까! 이건 명언집에도 나와 있는 말이라구!"
"어떤 명언집에 그런 헛소리가 쓰여 있는데."
"지오 명언집!"
"……."
얼마 지나지 않아 제시아는 지오의 헛소리를 계속 상대해주다가는 자신만 바보가
된다는 결론에 귀착했다. 그리고 그 결론에서 그녀는 한 가지 결론을 얻어낼 수 있
었다. 결국, 그녀는 담장 위에 올라가 있는 지오를 향해 소리를 질러댔다.
"헛소리 집어치우고 당장 이리로 내려오지 못해!"
"싫어. 내려가면 또 귀 잡아당길 거잖아."
현재, 지오는 높이 3예즈의 담장 위에 올라서 있었고, 제시아는 그 아래에서 지오
를 쳐죽일 듯한 사나운 눈초리로 노려보고 있었다. 물론, 그 주위에는 그와 더불어
약 스무 명 정도 되는 구경꾼들이 진정 즐거운 듯한 눈빛으로 이 둘을 바라보고 있
었다.
제시아가 소리쳤다.
"내 돈까지 다 날려먹고선 그런 소리가 나와!? 당장 내려와!"
"싫어. 내려가면 날 죽일 것 같아."
"죽이진 않을 테니까 당장 내려와!"
"……."
- To be continu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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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레트의 저 말들은… 궤변입니다. 씨익. 물론 저 말에 공감하실 리는 없으시
겠지만….
이번 편은 보시기에 어떠셨는지 모르겠군요. 누가 좀 뭐라고 말 좀 해 주셨으면
감사하겠는데…. 감상이나 비평, 언제나 환영입니다. 간단한 메모라도 좋으니 제
발 좀 보내주셨으면… -_-;; 여러분의 한 마디가 작가에게는 원동력이 됩니다.
혹시 제가 부담가지실까봐 걱정하실 필요는 전혀 없으니 걱정 마시고 보내시길…
^-^;;
Neissy였습니다.
번 호 : 10137 / 21118 등록일 : 2000년 09월 04일 23:49
등록자 : NEISSY 조 회 : 179 건
제 목 : [연재] ◈ 데스트로이아 ◈ # 110
데스트로이아 DestroiA
Fa-las de sy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