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선택 …… (5)
칼리스타 제국, 황성의 한 서재.
제국의 총리대신 로제레트는 책상에 앉아 서류들을 훑어보고 있었다. 처리해야 할
서류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로제레트에게 있어서 이 정도의 서류들을 처리
하는 것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로제레트는 손가락을 움직여 서류철의 페이지를 넘겼다. 로제레트는 안경을 치켜
올리며 가볍게 미소지었다.
"할 일이 없는 것인가."
다만 문제라고 한다면, 서류의 내용이란 것이 문제였다. 지금 이곳에 쌓여 있는
서류들은 로제레트가 처리해야 할 만큼 중대차한 서류들이 아니었다. 사실 이런 정
도의 서류는 로제레트의 아래 선에서 해결되어 있어야 했다. 무능한 인간들. 할 일
이 없으니 이런 일이나 하는 것이겠지. 로제레트는 한쪽 입가를 살짝 치켜올렸다.
귀족들끼리의 사소한 분쟁이― 말 그대로 아주 사소한 분쟁, 이를테면 새로 지은
별장의 소유권, 새로 개간한 땅의 소유권 논쟁 따위― 총리대신이 처리할 만한 일
이었던가? 로제레트는 퍽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제레트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
고는 책상에 놓여 있던 와인잔을 들어 와인을 한 모금 목으로 들이켰다.
"할 일이 없는 모양이니… 할 일을 만들어 주어야 하겠지."
로제레트는 문득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8시 51분. 로제레트
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회의 시간이군."
로제레트의 얼굴에 조소가 떠올랐다.
"그럼 가 볼까. …상대해 주러."
회의장 안, 흰색이 천이 덮인 직사각형의 긴 탁자에 사람들은 둘러앉아 있었다.
사람들의 대부분은 귀족들이었다. 몸집이 크고, 배가 나온 귀족들. 로제레트는 입
가에 편안한 미소를 띄우고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금발의 머리칼을 뒤로 빗어 넘긴 한 귀족이 일어나 열띤 음성으로 말하고 있었다.
"…용병단이 대체 무엇 때문에 필요한 건가? 우리 제국은 그깟 용병단 없이도 강
하다는 것을 모르는가, 로제레트!"
남자는 로제레트를 노려보며 말했다.
"용병이란 쓰레기들이 우리 제국 내에서 활개치고 다니는 꼴을 보고 있으려니 울
분이 터지네. 모른단 말인가? 그 작자들은 돈이 있는 곳에 꼬이는 파리떼같은 존
재들이란 말일세!"
"……."
로제레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회의장 안의 다른 귀족들을 둘러보았다. 여기저기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찬동한다는 것인가…. 로제레트는 피식 웃었다.
이 귀족이란 자들… 현실 감각이 너무 뒤떨어진다. 역시, 한 번쯤은 이 나라를 갈
아 엎어야 할 필요가 있다. 각성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제국의 위명, 제국의 위
명 떠들어대지만 실상 이들이 원하는 것은 일신의 평안이겠지.
어차피 지금 이 문제―용병단이 과연 필요한가 하는 문제―는 부차적인 사항에 지
나지 않는다. 일단 로제레트가 밀리는 모습을 보이게 되면 그 때 이들은 정말 이들
이 원하는 문제를 끄집어내겠지.
'저열하군.' 로제레트는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하다. 칼리스타 제국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명색이 나라를 이끈다
는 인간들이 자신들의 이익만 바라보고 있다니.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것저것 뭐라고 하는 것, 이젠 지겨웠다. 차라리 그냥 말하
고 싶은 것을 말하든지. 속이 다 들여다 보인다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
남자의 말은 계속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심히 불쾌한 일이네. 난 그 구역질나는 자들이 우리 제국군에 들어
온다는 사실이 기분 나쁘기 그지없네!"
그렇게 말한 남자는 흘끗 시선을 돌려 로제레트를 바라보았다. 로제레트는 가볍게
조소를 내어 보이고 나서, 여유 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 끝나셨습니까?"
"그렇네. 하고 싶은 말이야 더 있지만 이 정도에서 끝내도록 하지."
"그럼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로제레트는 천천히 손짓해 남자를 자리에 앉혔다. 남자는 가볍게 눈썹을 오므리고
입술을 달싹거리는 것이 무언가 불만인 듯한 표정이었지만, 로제레트는 그에 상관
하지 않았다. 대신 로제레트는 스윽 고개를 돌려 회중을 한차례 바라보며 말했다.
"다른 분들도 모두 길즈 님과 같은 의견이십니까?"
장내의 사람들은 입을 열어 대답하진 않았다. 다만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로
제레트를 바라볼 뿐이었는데, 마치 압력이라도 넣는 듯한 그 시선에 로제레트는 쓴
웃음을 흘렸다. '하긴, 물어볼 필요도 없었던 것 같군.' 로제레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군요."
어차피 이들의 눈에는 현실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방금의 지적, 용병들이 파리떼
와도 같은 존재다… 라는 것, 맞는 말이기는 하다. 용병들이 돈을 더 많이 주는 곳
으로 모이는 것은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것은 당연한 일, 용병들이란 돈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니까.
어쨌건 현실적으로 용병들의 능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 비록 조직력은 정규병들보
다 떨어질 지 몰라도 개개인의 능력만큼은 확실히 뛰어나다. 전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니만큼 그들의 전투능력이 뛰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로제레트는 조금쯤 이들에게 현실을 일깨워 줄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들은 현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겠지만. 로제레트는 가볍게 입술을 일그러
뜨렸다.
"맞습니다. 용병들은 쓰레기들이지요."
로제레트는 좌중을 향해 빙긋 여유 있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까 열변을 토했던
금발의 남자가 말했다.
"자네도 안다고 말하는 건가? 그렇다면 그런 것을 알면서도 그들을 고용했다는 것
일 테지. 대체 왜…."
"제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길즈 님."
로제레트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고, 길즈는 머쓱해져 입을 다물었다. 로제레트는
부드러운 미소를―그러나 퍽이나 조소에 가까운― 지었다.
"물론 우리 제국은 용병단 없이도 강합니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났을 시 전혀
피해를 입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겠지요."
로제레트는 그렇게 말하고 힐끗 귀족들의 표정을 살폈다. 예상대로 시큰둥한 표정
이었다. 일반 병사들이 좀 죽는 것에 귀족들이 관심을 가질 이유는 없는 것이니까.
로제레트는 왼손을 들어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
"그 피해가 용병들로 인해 줄어들 수 있습니다."
로제레트는 여유 있는 태도를 견지하며 말을 이었다. 또다른 한 귀족이 성급하게
끼어들었다.
"그럼 결국 뭔가, 어쨌든 용병단이 없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런 것이 아니지요."
로제레트는 가볍게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제국군이 죽는 대신, 그 용병들이 죽게 되는 것입니다. 간단한 일이 아니겠습니
까. 이것은 칼리스타 제국의 위명을 더럽히지 않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
병사들이 많이 죽을 만한 위험한 곳에는 용병들을 투입한다―라는 것이었다. 물론
로제레트는 그렇게 할 생각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용병은 전투의 베테랑들, 적절하
게 사용해야 하겠지.
로제레트는 이어 뒤에 덧붙였다.
"말씀드리자면― 소모품이지요."
당신들과 같이, 말이지. 로제레트는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이 정도만 말씀드려도 아시겠지요…. 용병들의 필요성에 대해서."
귀족들은 대강 이해했다는 표정이었다. 로제레트는 그것을 보며 낮게 쿠쿡 하고
웃었다. 어차피 이 용병들에 관한 것은 이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일단 납득할 만
한 명분을 하나 제시했으니, 이제는 원하는 이야기를 해 주어야겠지.
로제레트는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 시각, 용병들의 막사.
밤―, 군데군데 화톳불이 피워져 있었고, 곳곳에서는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인생, 즐길 수 있을 때 화끈하게 즐기며 살자' 가 그들의 신
조였으니만큼, 오늘도 용병들의 막사는 시끌시끌했다.
그리고 그 중의 한 막사에서는 지금 열띤 도박판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너댓
명의 사람들이 둥그렇게 둘러앉아 카드를 펼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사뭇 진지했
다.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고, 이윽고 패가 펼쳐졌다.
"으아아아아악∼!"
그들 사이에 만감이 교차했다. 그리고 그 중, 한 남자가 유독 과장된 몸짓으로 비
명을 질러댔다. 아무래도 꽤나 잃은 모양이었다.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는데, 갸름하면서도 동그란 얼굴선을 지닌 동안의 남
자였다. 그는 어떻게 보면 귀여운 그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뭐라고 투덜거렸다.
"믿을 수 없어, 믿을 수 없어, 믿을 수 없어! 어째서! 내가! 아악∼!"
그는 거의 발광에 가까운 몸짓을 선보이다가 고개를 팍 옆으로 돌렸다. 그가 고개
를 돌린 곳에는 한 여성이 앉아 있었다. 마치 타오르는 듯한 붉은 색의 길다란 머
리칼을 뒤쪽으로 한 차례 묶어 내린 여성이었는데, 약간 짙은 눈썹과 깊은 눈동자
가 이지적이었다. 남자는 그녀를 향해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제시아."
"왜."
"돈 좀 꿔줘."
"……."
제시아는 거칠게 남자의 귀를 잡아당겼다. 남자가 비명을 질러댔고, 주위의 사람
들이 왁자지껄하게 웃어댔다. 제시아가 눈썹을 모으며 소리쳤다.
"지오, 이 얼간아! 너 지금 대체 돈을 얼마나 날렸는지 알아? 자그마치 50실이야,
50실! 그런 주제에 또 돈을 꿔 달라고? 너 양심이란 게 있는 거야?"
"잃은 만큼 다시 따면 되잖… 아야야, 아퍼!"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너, 따라 나와!"
제시아는 몸을 일으켜 지오를 막사 밖으로 끌고 나갔다. 지오는 귀를 붙들린 채
고통에 얼굴을 찡그리며 꽤나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끌려 나갔고, 그 모습을 보며
막사 안에 있던 사람들이 휘익 하고 휘파람을 불어댔다. "요오∼ 꽉 잡혔는데, 지
오?" "하하하핫, 잘 해보라구!"
"…저기, 제시아."
"뭐야?"
"이 귀 좀 놓아 주면… 안 될까?"
"싫어."
지오가 애절하게 말했고, 제시아는 매몰차게 응수했다. 제시아가 말했다.
"스물 다섯 살이나 먹었으면 정신 좀 차리고 살아. 어떻게 스물 다섯 살이나 되가
지고 사람이 철이 없어. 어떻게 넌 밥먹고 맨날 하는 일이 도박뿐이야?"
"도박을 인생이라니까. 왜 이해하지 못하는 거야? 걸 때의 스릴, 딸 때의 쾌가…
아야야, 귀 잡아 당기지 마!"
지오가 비명을 질러댔고, 제시아는 더욱 힘주어 지오의 귀를 잡아당겼다. 이윽고
지오의 귀가 벌겋게 달아올랐을 때에야 제시아는 지오의 귀를 놓아 주었다. 지오가
귀를 매만지며 죽는 소리를 냈다.
"으으으. 뜨거워, 뜨거워."
"말 되는 소리를 좀 해 봐. 내가 그러나."
제시아는 쏘아붙이듯이 말했고, 지오는 머리를 긁적였다.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
며 지오가 말했다.
"난 언제나 말 되는 소리밖에 안 하잖… 아야, 왜 때려?"
"시끄러, 바보야."
제시아는 지오의 머리를 때린 손을 가볍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제시아는 슬쩍 눈
을 감았다 뜨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려던 이야기는 이게 아니었지."
"……?"
지오가 고개를 갸웃했다. 제시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소식 들었어?"
"무슨 소식?"
"곧 전쟁이 일어날 모양이야."
- To be continu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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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정말 엄청나게 오래간만이네요. 기다리신 분들―있으려나
-_-;;―께는 죄송합니다. 따로 변명은 않겠습니다.
지오와 제시아, 재등장입니다. 3장 초반부에 잠깐 얼굴을 보였었습니다만… 기
억하실 분이 있으려나 모르겠네요. 뭐, 모르신다고 해도 모르시는 대로 읽으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어째 말이 조금 이상하네)
아, '魂のルフラン'이란 노래, 판츠 멀티미디어 자료실에 올렸습니다. 혹시 들
어보실 분이 계시다면 들어 보세요.
Neissy였습니다.
번 호 : 9749 / 21118 등록일 : 2000년 08월 23일 20:39
등록자 : NEISSY 조 회 : 184 건
제 목 : [연재] ◈ 데스트로이아 ◈ # 106
데스트로이아 DestroiA
Fa-las de sy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