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스트로이어-105화 (106/158)
  • 4. 선택 …… (3)

    "낳을 거야?"

    "……."

    린은 입을 다물었다. 머뭇거리는 린을 세실은 답답하다는 눈으로 스윽 쳐다보더니

    , 이내 고개를 돌리며 "답답한 건 하나도 안 변했네."라고 중얼거렸다.

    세실은 린의 이마에 탁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린은 눈을 깜빡이며 세실을 바라보

    았고, 세실은 푸우 하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선택은 언니가 하는 거야."

    "그래."

    "글쎄, 난 언니한테 뭐라고 해야 할 지 모르겠어."

    세실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린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내가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어." 세실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연보랏빛 눈동자가―

    그녀의 언니의 것과 같은― 빛났다.

    "뭐, 좋아. 천천히 생각하자."

    "천천히…."

    "입덧, 심해?"

    "아니." 린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세실은 그녀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

    윽고 린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그럼 일단 저녁 식사부터 계속 하자. 먹어야 힘을 내지."

    "갈수록 태산이군." 로빈은 책상 앞에 앉아 거칠게 머리를 긁적여댔다. 책상 위에

    가득 쌓인 서류철들을 뒤적이며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로빈은 서류를 책상 위에

    탁 소리가 나게 집어던졌다.

    "전쟁이 나긴 할 것 같군."

    최근 들어 칼리스타 제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제국에 심어둔 첩보원들이

    보내온 정보에 따르면 제국은 약 16만 명 정도의 군사를 양성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 물론 이 숫자는 단지 정규병의 숫자일 뿐으로, 용병단이나 마법사단까지 계산한

    다면 그 병력은 실로 대단할 것이다.

    최근의 이 갑작스런 군대의 증강은 분명히 수상한 일이었다. 이에 대한 항의문을

    보내 보았지만, 제국에서는 제국 내의 일이니 상관할 것 없다는 투의 답신만을 보

    내왔을 뿐이었다.

    로빈은 책상 위의 찻잔을 집어들었다. 후루룩. 차 맛이 썼다. 로빈은 눈살을 찌푸

    리며 왼손을 움직여 책상 위의 서류를 정리했다.

    …입맛이 썼다. 이 서류들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였다. 도발. 말하자면 제국은 지

    금 도발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저들의 의도가 명백한데도 불구하고 별달리 대응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 로빈을 짜증나게 했다.

    달칵.

    로빈은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16만. 거기에 플러스, 용병단 약 삼만, 마법

    사단 만 오천. …거기다가 숨겨진 요소, 마족인가?" 로빈은 씁쓸하게 웃었다.

    제국과 프리네리아 사이에 불가침조약을 맺은 지 이제 10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제국에서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전쟁이란 것이 그리 간단히

    일어나는 것은 아닌데.

    어쨌든, 섣불리 대처해 전쟁을 부를 생각은 없다.

    "뭐, 알 수 없지."

    팔을 위로 쭉 뻗으며 로빈은 등을 의자에 기댔다.

    "뭐 좋아, 아무래도 좋다고."

    가볍게 손을 흔들어 손체조를 한 다음, 로빈은 의자를 뒤로 밀어붙이고 몸을 일으

    켰다.

    어차피 여기서 이러고 있어봐야 머리만 아플 뿐이다. 자신이 서류를 붙들고 있는

    다고 별다른 방법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로빈은 머리나 좀 식힐 겸 정원으로 나가

    기로 마음먹었다.

    "어라."

    정원으로 들어서려던 로빈은 문득 정원 입구에 웬 여성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단순히 서 있는 자세가 아니라, 머리만 슬쩍 내민 채 안을 훔쳐보는 듯한 모습이었

    다.

    "흐흠."

    장난기가 발동한 로빈은 슬금슬금 소리를 죽여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녀는 로빈

    이 다가온 것도 모른 채 안을 훔쳐보는 것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곧 로빈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시네라 레이디카 프리네리아. 프리네리아 왕국의 제 1

    왕녀였다.

    '…무슨 일이지?'

    로빈은 그녀를 놀래키려던 애초의 계획을 접어두기로 했다. 숙녀를 놀래키는 것은

    예의가 아니니까. 대신 로빈은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

    "왕녀님?"

    "헉."

    시네라는 깜짝 놀라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는 로빈이 작게 미소를 띤

    채 서 있었다. 시네라는 살며시 한숨을 내쉬었다.

    "…놀랐어요."

    "하하. 놀래켜드렸다면 죄송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로빈이 물었고, 시네라가 반문했다.

    "뭐가요?"

    "…아,"

    숙녀의 행동에 대해 캐묻는 것은 실례다. 로빈은 뒤늦게서야 자신의 실책을 깨달

    았다. 나름대로는 예의를 차린다고 했지만, 이미 충분히 무례하고 있었다. 사실 예

    의를 지키려고 했다면, 애초에 모른 척 하고 지나갔어야 옳았다.

    하지만 시네라는 그의 행동이 무례하다고 질책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시네라의 품

    격이 고아해서라기보다는,―물론 시네라의 품격이 고아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시네라 역시 무례한 행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무언가를 훔쳐본

    다는 것을 예의 있는 행동이라 하기는 조금 무리가 있지 않을까.

    로빈은 가볍게 고개를 젓더니 이내 땅에 한쪽 무릎을 꿇고 말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왕녀님."

    "…아니요, 괜찮아요."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한 것이었는지, 시네라의 표정이 샐쭉해졌다.

    "저, 갈게요."

    시네라는 몸을 돌리더니 총총걸음으로 사라져갔다. 로빈은 마치 도망치는 듯한 시

    네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가볍게 뒷머리를 긁었다.

    "쩝." 입맛을 다시며 로빈은 고개를 돌렸다. 어쨌든, 대체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길래 시네라 왕녀가 저 안을 훔쳐보고 있었나 하는 호기심은 풀어야 하

    겠지.

    "…오호."

    안을 바라본 로빈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바야흐로 시간은 저녁. 황혼이 지

    는 저녁 하늘을 바라보며 벤치에 앉아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두 연인.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모습이다.

    로빈은 미소지으며 그 둘을 바라보았다. ―에이드와 엘피였다. 성기사 에이드, 그

    리고 엘피 왕녀. 이 둘은 아직 정식으로 인정된 사이는 아니었지만,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사이였다.

    로빈은 곧 몸을 돌려 정원에서 멀어졌다. 한창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두 연

    인을 방해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도중, 로빈은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네라 왕녀의 태도가 조금 이상했

    다. 분명 행복해하는 동생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로빈

    은 고개를 갸웃했다.

    "확실히."

    그보다는, 뭐랄까, 부러워하는 것 같은? 아니, 조금 틀리다. 말하자면… 시샘. 그

    렇다. 시샘에 가까운 것 같다. ―하지만, 무엇에 관한 시샘?

    "…그렇군."

    문득 떠오른 생각에 로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시네라는 에이드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안된 일이다

    . 에이드는 이미 엘피에게 마음을 주고 있었으니까. 이미 그 둘은 거의 공인된 사

    이가 아닌가?

    "안됐군."

    언니로서 동생을 질투하게 되다니. 로빈은 시네라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생각한다고 별 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뭐…, 난 에아네스에게나 가 볼까."

    자신의 연인을 생각하며 로빈은 씨익 웃었다.

    "이봐, 네이시."

    니리아와의 데이트를 끝내고 방으로 돌아온 네이시를 향해 시린은 진지한 목소리

    로 입을 열었다. 그 모습이 사뭇 엄숙했기에―시린과 어울리지 않게― 네이시는 얘

    가 왜 이러나 하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할 말이 있는데 말야."

    시린은 아주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진지하다는 것을 시위라도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시린은 모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네이시는 문득 시린이 귀엽

    다는 생각이 들었다.

    "……?"

    시린은 피식피식 웃는 네이시를 이상한 듯이 쳐다보았다. 기껏 엄숙한 분위기를

    잡으려는데 왜 저러는 거야? 그러나, 네이시로서는 웃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

    다. 그 이유란 것은―

    "시린."

    네이시가 입을 열었다.

    "입가에 묻은 소스 좀 닦아."

    "……."

    서둘러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닦는 시린을 향해 네이시가 한 마디 덧붙였다.

    "귀여워, 시린."

    "……."

    시린은 퍽이나 굴욕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그거야 어쨌든, 다시 애써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시린이 말했다.

    "할 말이 있다고."

    "뭔데?"

    "우리 미래."

    "……!!"

    순간 불에라도 데인 듯 뒤로 펄쩍 뛰어 멀리 떨어져나가는 네이시. 네이시는 왕방

    울만하게 커진 눈을 하고 말했다.

    "저리 가!"

    "이봐,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착각? 음, 착각."

    네이시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했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물들인 셈이긴 하지만… 그래도 난 저런 호모틱한 말은 하지 않았다구. 세상에, '

    우리 미래'라니. 그야 물론 나와 시린은 정신적인 연인이긴 하지만… 난 플라토닉

    한 사랑으로도 충분한데…,"

    "이봐."

    가만히 있다가는 무슨 가공할 대사가 더 흘러나올지 몰랐기에 시린은 서둘러 네이

    시의 입을 막았다.

    "그런 게 아냐."

    "응? 그럼?"

    생글생글 웃는 네이시. 또 당했다… 라는 생각이 드는 시린이었지만, 일단은 넘어

    가기로 했다. 시린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 거냐?"

    "응?"

    "여태까지와 마찬가지로 계속 세이어 씨를 쫓아다닐 거냐? 솔직히 난 이해가 잘

    안 된단 말이다. 겨우 호기심 하나 해결하자고 이 고생을 할 필요는 없잖아."

    "고생? 헤에."

    네이시는 생긋 웃었다.

    - To be continu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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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공고 * 버그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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