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스트로이어-104화 (105/158)
  • 4. 선택 …… (2)

    아침부터 린의 안색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린의 얼굴이 왠지 침울하다는 것을 세

    실은 물론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말을 걸기에는 린의 분위기가 이상해

    서 세실은 그냥 입을 다물고 있었다.

    '보나마나 세이어 씨에 관한 생각일 테지.' 세실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긴 린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이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다. 그동안 린, 세실 그녀의 언니는

    워낙 감정기복이 심했다. 세이어가 그녀에게 어떻게 대했느냐에 따라 하루 종일 울

    적해 있는가 하면, 하루 종일 기뻐서 활짝 웃고 다니기도 했다.

    이 복잡한 언니를 상대하다가 결국 세실이 깨닫게 된 것은, '상대하지 않는 게 최

    고다' 라는 것이었다. 린의 '투정'을 하나하나 다 받아줄 만큼 세실은 착한 사람은

    아니었다. 결국 그녀는 어지간하면 언니가 어떻게 하고 있든지 그냥 가만히 있기로

    마음먹었고, 지금도 그 결심을 착실히 지키고 있는 중이었다.

    "우욱."

    ―하지만, 그녀의 언니 린이 저녁 식사를 하다 말고 갑자기 헛구역질을 하며 욕실

    안으로 뛰어드는 것에까지 무관심하기는 아무래도 힘든 노릇이었다. 린이 입을 틀

    어막으며 욕실로 뛰어드는 것을 보고 잠시 영문을 몰라 당황했던 세실은, 욕실 안

    에서 들려오는 헛구역질 소리에 곧 상황을 깨달았다.

    "어떻게 된 거야?"

    욕실로 따라 들어가 린의 등을 두들겨주며 그녀가 물었다. 린이 움찔하는 것이 느

    껴졌다.

    "…뭐가?"

    평온을 가장한 얼굴로―그러나 얼굴 한 구석에 당황의 빛이 내비치는 것까지는 숨

    기지 못했다― 린이 반문했다. 세실은 살짝 미간을 오므리며 말했다.

    "지금 입덧한 거잖아. 임신한 거지?"

    "아, 아냐."

    린이 말을 더듬었다.

    "속이 좀 좋지 않아서 그래. ―그래, 체했나 봐. 그러니까 말야…,"

    세실은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는 그녀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녀가 임

    신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물론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린의 태도로 볼 때 확실한

    듯 싶다.

    보통 임신이란, 연인의 결합을 더욱 공고히 해주는 일이 아닌가? 린과 세이어가

    그렇고 그런 사이까지 갔다는 것은 물론 의외이긴 하지만. 지금의 린에게 있어 임

    신을 숨길 이유는 없을 텐데, 왜 숨기려는 걸까?

    …아니, 이상하다. 무언가 이상하다. 세실은 문득 한 가지 가설을 생각해냈다.

    "혹시,"

    세실이 입을 열었고, 린은 입을 다물었다. 세실이 하려는 말을 눈치챈 것일까, 린

    의 얼굴에는 분명한 긴장이 떠올라 있었다. 그녀의 연보랏빛 눈동자가 가볍게 경직

    되어 있었다.

    "세이어 씨가 아니야?"

    덜컥.

    그 말이 결정타인 모양이었다. 린은 마치 심장이라도 내려앉은 듯한 표정으로 세

    실을 바라보았다.

    "…언니?"

    정신이 나간 듯한 그 표정에 걱정이 된 세실이 조용히 린을 불렀다. 입을 가볍게

    벌린 채 린은 세실을 쳐다보았다.

    "세이어 님은…,"

    무언가 말하려던 린은 갑자기 입을 탁 다물더니, 순간 갑자기 예리한 눈빛으로 세

    실을 노려보았다. 세실은 움찔해서 그녀를 바라보았고, 린은 이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냐. 아무 일도, 아무 일도 없었어."

    린이 세실의 어깨를 강하게 붙들며 말했다.

    "아무 일도 없었어. 아무 일도 없었다구."

    "그… 그래."

    린이 어깨를 너무 강하게 붙든 덕에 어깨가 지끈거려오는 것을 느끼며 세실은 가

    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 일도 없었어! 알겠어?"

    "알겠다니깐. 알겠다고 했잖아."

    "난 아무 것도 하지 못했어. 넌 아무 것도 보지 못했어. 내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알겠어? 알겠지, 알아들었지? 내 말 무슨 소리인 줄 알겠지?"

    린은 마치 무언가에 사로잡히기라도 한 듯한 표정으로 외쳤다. 그 눈동자에는 광

    기마저 서려 있었다. 목덜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끼며 세실이 말했다.

    "알아…."

    "거짓말, 거짓말하지 마! 넌 지금 날 비웃고 있어, 그렇지? 넌 다 알고 있었던 거

    지? 주제도 모르고 세이어 님을 좋아한다고, 깨끗한 몸도 아닌 주제에 그분을 사

    모한다고 비웃고 있는 거야! 내가 우습지? 내가 우스워 보이지?"

    "언니, 제발."

    세실은 왠지 린이 두려워지는 것을 느꼈다. 린은 미쳐 버린 것 같았다. ―아니,

    정말로 미쳐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세실은 편안하게 미소지

    으려 애썼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언니. 내가… 언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잖아."

    "아냐, 아니야!"

    린은 스르륵 세실의 어깨를 잡았던 손을 풀고서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곧 그녀는

    양손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언니."

    세실은 조용히 린의 어깨를 토닥였다. 린의 귀에다 대고 세실이 속삭였다.

    "난 언니 편이야. 알잖아."

    린은 그에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흐느끼기만 했을 뿐이었다. 세실은 안쓰

    러운 눈으로 린을 바라보았다.

    사실 말하자면, 정말 답답한 것은 린이 아니라 세실일지도 모른다. 세이어에게 이

    상할 정도로 집착하는 린도 린이지만, 점점 망가져가는 린을 옆에서 바라보는 세실

    의 심정도 그렇다. 자신의 가족, 자신의 언니가 이상해져가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

    아야만 하는 그녀의 심정이란 어떤 것일까.

    "…세실…."

    한참을 흐느끼던 린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난… 두려워."

    린이 겁먹은 눈으로 말했다. 그것을 바라보며 세실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린

    이 말을 이었다.

    "세이어 님께서 날 어떻게 생각하시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세실…. 난, 난 말야

    …. 세이어 님께서 날 특별하게 생각해 주셨으면 해. 단지 그것뿐이야. 그것뿐이

    라구."

    "……."

    세실은 린이 눈치채지 못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세이어 님은… 내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에 있는 것 같아. 내 꿈은

    … 내 꿈은 그 분에게 있지만…, 그 분의 꿈은… 내게 있는 것 같지 않아."

    여기까지 말하고 린은 다시 한 번 흐느꼈다. 감정이 복받쳐 오르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소매를 들어올려 눈가를 닦고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낮게 웃었다.

    "후훗…. 우습지. 나와 같이 있을 때보다, 너와 같이 있을 때의 세이어 님이 더

    즐거워 보여. 내… 착각일까?"

    "……."

    "동생을 질투…하는 내가 한심스러워. 나… 난 왜 이렇게 돼버린 걸까."

    린은 슬프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세이어 님은… 날 떠나는 일이 많아. 물론… 다시 돌아오시지만, 언제나 그러리

    라고는… 언제나 그러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잖아. 언젠가… 다시 돌아오시지 않

    는다면, 그 때 난…."

    린은 세실은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난 그게 두려워. 세이어 님께서 날 떠나는 것이 두려워. 지금 그 분이 내 임신

    사실을 알면…."

    "누구의… 아이인데?"

    세실이 조심스레 말했다. 린은 잠시 얼굴을 돌렸다가, 이내 체념한 듯 한숨을 한

    번 내쉬고 말했다.

    "…시도아 시의 영주, 디간 데이빈."

    "……그랬구나."

    평민인 린이 귀족인 디간에게 존칭을 붙이지 않았지만, 세실은 개의치 않았다. 디

    간을 말하는 린의 어투에서 묘한 증오심 같은 것이 전해져왔기 때문이었다.

    왠지 세실은 린과 세이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세실이 물었다.

    "모르겠어."

    린이 한차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불안한 표정으로 손톱을 깨물고 있었다. 손톱

    을 뜯어 뱉어내고 나서 린이 말했다.

    "낳고 싶지는… 않아."

    "그럼, 중절?"

    "중절…이라고는 해도."

    린은 무언가 망설이는 모양이었다.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어. 중절…이라는 건…."

    "휴우."

    세실이 고개를 저었다. 한숨을 내쉬고, 이어 고개를 거칠게 흔든 후 세실이 이윽

    고 침착한 표정으로 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확실하게 하자, 언니."

    "응? …으응."

    "임신, 확실한 거지?"

    "…응."

    "시도아 시 영주의 아이, 확실한 거지?"

    "……응."

    - To be continued... -

    ===========================================================================

    오늘부터 연재 재개입니다. 아마 매일연재일 듯 하네요. (매일연재에 구애받을

    생각은 없습니다만, 가능하다면 매일연재로 나갈 생각입니다.)

    부활! Neissy였습니다!

    번 호 : 9252 / 21118 등록일 : 2000년 08월 10일 22:37

    등록자 : NEISSY 조 회 : 200 건

    제 목 : [연재] ◈ 데스트로이아 ◈ # 103

    데스트로이아 DestroiA

    Fa-las de syent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