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아무도 믿을 수 없다면 …… (29)
세실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뒤쪽에서도 몰려오고 있어요."
"…그렇군."
아룬이 이를 악물었다.
'포위당했나.'
"샐러맨더!"
쿠오오.
샐러맨더가 화염을 뿜었다. 그러나, 그 화염의 위력은 아까보다 훨씬 약해져 있었
다. 아룬의 힘이 떨어짐에 따라, 샐러맨더도 점점 그 힘을 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샐러맨더, 언딘, 노움, 실프. 각기 불, 물, 대지, 바람에 대응되는 4대 저위 정령
이다. 이 세계에 그들을 존재시키기 위해서는 소환자의 마나를 지속적으로 부어 주
어야 했다. 다시 말해, 정령을 소환시켰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소환한 정령에게
끊임없이 마나를 보내야만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필요로 하는 마나는 고위의 정령에 비해서는 적은 양이다. 그러나 그
것은 어디까지나 고위 정령에 비해서이다. 저위 정령이라 해도, 필요로 하는 마나
가 결코 적지는 않은 것이다.
아룬은 점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는 도플갱어들. 그들의
수는 도무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 비해, 자신의 정령들
은 확실히 눈에 띌 정도로 약해져 있었다. 이대로라면 10분 안에 정령들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어떻게 하지…!'
얼굴 가득 땀을 흘리며 아룬은 계속해서 도플갱어들을 공격했다.
쿠앙…!
이미 언딘과 노움은 정령계로 돌아가버리고 없었다. 남아 있는 샐러맨더와 실프로
어떻게든 공격을 하고 있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도 곧 끝날 것이다. 그리고
, 정령이 완전히 정령계로 돌아가버리면….
'끝나는 건가.'
정령과 교감하기 위한 최소한의 마나마저 고갈된다면 아룬은 평범한 장님에 지나
지 않게 된다. 여태까지 정상인 못지 않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정령
들 덕분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룬은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죽을 순 없어…! 적어도, 린과 세실만큼은…!'
"꺄악―!"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에 아룬의 주의가 순간 흐트러졌다. 아룬은 당황하며 비명
소리의 주인공, 세실에게로 주의를 돌렸다.
'…이런!'
세실에게로 한 도플갱어가 달려들었다. 세실은 양팔을 들어 그 공격을 막아내었으
나, 팔을 다치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찌익. 옷이 찢기고, 팔에서 피가 흘러나
와 옷에 배어들었다.
아룬이 외쳤다.
"큭, 샐러맨더!"
샐러맨더가 불을 뿜었다. 도플갱어가 타올랐고, 아룬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이대로라면 정말로 당한다.
"제길, 제길…!"
애초부터 아룬 혼자 신나게 적들을 상대한다고 될 문제도 아니었다. 린과 세실도
지키면서 싸워야만 했다. 자신들을 포위한 채 전방향에서 달려드는 저 도플갱어들
을 상대로.
'…미칠 것 같군.'
아룬은 차라리 절규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디서 이렇게 많은 수의 도플갱어들이
쏟아져나온 것인지―이런 수이리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라고 해도― 이들
의 수는 경악할 만했다. 수백, 수천…. 끝없이 올려드는 적들.
아룬과 린, 세실은 거리 한가운데에 갖힌 상태였고, 빠져나갈 구멍 같은 것도 전
혀 없었다. 여기서 이렇게 저들을 막아내다가 힘이 딸리면 죽는 수 밖에 없다… 라
고 생각할 수밖에는 없었다.
'…그럴 순 없어!'
"…거야."
돌연, 린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의아한 얼굴로 아룬이 말했다.
"린, 뭐라고?"
"…오실 거야."
린이 말했다. 그 목소리는 비록 크진 않았지만, 강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세이어 님이… 오실 거야."
"……."
아룬은 입을 다물었다. 세이어가 온다… 라. 살아나갈 수 있다는 희망인가. …과
연, 자신들은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다.'
아룬은 고개를 저었다.
…월야. 밤하늘에 떠 있는 하현달은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덕분에 그리 어둡지는
않았으나… 푸른 그 달빛은 오히려 음습함을 제공했다. 푸른 달빛. 하늘에 잔뜩 끼
어 있는 검은 구름….
레이아다 시, 한 거리에서 아룬은 절대다수의 도플갱어들을 상대로 힘겹게 싸우고
있었다. 이미 한계에 도달한 모양인지, 이제 남아 있는 정령은 샐러맨더 한 마리
뿐이었다. 상황은 전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린과 세실은 아직까지는 비교적 무사한 모습이었다. 여기저기 옷이 찢기고 피가
배어나오고 있기는 했지만, 심각해 보이는 상처는 없었다.
"죽을 순… 죽을 순 없다!"
아룬이 외쳤다. 처절하다는 느낌이 드는 그런 외침이었다. 절대다수의 상대. 그리
고 그들에 비해 자신들의 힘은 너무도 미약하다.
"크윽!…"
달려든 도플갱어의 공격을 가까스로 막아내며 아룬은 신음을 내뱉었다.
…마치 야수 같다, 저들의 공격은. 아룬은 그렇게 생각했다. 도플갱어라는 것은
기보적으로 한 인간의 기억과 모습을 훔치는 몬스터. 당연히 전투 방식은 흉내내는
인간의 것과 동일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금 이들의 공격은 그런 것과는 달랐다.
재빠르게 달려들어 날카로운 손톱을 찢는다. 보통 사람들이 사용하는 공격법은 아
니다. 결국, 이것은 이들의 고유한 공격 방법이라는 말이 된다.
'이들, 정말 도플갱어인가?…'
아무래도 이상했다. 무엇보다도, 도플갱어라면 이렇게 조직적인 전법 따윈 사용하
지 않는다. …조직적인 전법 자체를 사용할 수 있을 수가 없다. 어쨌든 이들이 이
렇게 많이 출현하는 일 자체가 없으니까.
'알아봐야겠어….'
아룬은 그렇게 생각하다가, 문득 실소를 터뜨렸다.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다면 말이지….'
"아악!!"
세실이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룬은 당황해하며 주의를 그
쪽으로 돌렸다. 근처에 존재할 정령들에게서 사정 설명을 듣기 위해서였다.
"……!?"
그러나, 정령이 느껴지지 않았다.
'뭐야? 한계인가!?'
아룬은 순간 당황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샐러맨더도 사라진 지 오래였
다. 자신이 완전한 암흑 속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아룬은 뒤늦게 깨달았다.
'…설마!'
정령들과 교감하기 위해 필요한 마나마저 다 써버린 것인가? 물론… 마나야 약 10
분 가량 지난다면 다시 회복되겠지만…!
'그땐, 늦어!'
아룬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촤악.
"컥!?"
순간, 아룬은 배에서 타는 듯한 통증을 느꼈고,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꺄아아아―!!"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아룬은 오른손을 배에 대 보았다. …뜨뜻미지근한 느낌.
아룬은 배에서 뜨거운 액체의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피… 인가…?"
아룬이 중얼거렸다.
공포감… 절망감이 한데 혼합되었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지금의 아룬은 움직이
는 것조차 변변히 할 수 없다. 하물며 저들을 상대하는 것은 어림도 없다. 린과 세
실이야 말할 것도 없고…. 아룬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죽는… 건가?'
…그 때였다.
- To be continu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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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연참입니다. 그냥 기분이 나서 올립니다. 하하하. (……바보 아냐?)
뭐, 어쨌건 다음 주는 시험 기간이라 접속을 안 할 테니.
Neissy였습니다.
번 호 : 7813 / 21096 등록일 : 2000년 06월 25일 15:00
등록자 : NEISSY 조 회 : 240 건
제 목 : [연재] ◈ 데스트로이아 ◈ # 69
데스트로이아 DestroiA
Fa-las de sy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