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스트로이어-40화 (41/158)

1. 운명을 거역하는 것이기에 …… (39)

"널 구해줄 사람 따윈 없어."

그가 입을 열었다. 그림자.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린은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린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온통 어두운 흑암. 사방은 뚫려 있는 것 같았지만 동시에 막혀 있었다. 도망칠 곳

은 없었다. 이 공간 안에 존재하는 자는 그녀와 그, 둘 뿐이었다.

"날 잊지는 않았겠지, 린?…"

그가 이죽거리듯이 말했다. 린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왜? …어째서? 그는 이미 죽지 않았던가? 세이어 님께서 그를 죽이지 않았던가?

린의 입이 열렸다.

"세… 세이어 님…."

그가 지겹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도 그 소리냐. 지겹지도 않는가 보지?

게다가… 아직도 모르는 거냐?"

그가 다가왔다.

"아무도. 널 구해줄 사람 따윈 없어. 알겠어?"

"아… 아니예요, 아녜요!"

"그는 널 버렸어.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그가 낮게 웃었다. 린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는 히죽히죽 웃으며 다가오더니

, 거칠게 린의 옷을 잡아챘다.

"시… 싫어, 싫어…."

…그 때였다.

"…일어나십시오."

……?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린은 순간 어리둥절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린은 자신

의 몸이 가볍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일어나십시오."

목소리는 다시 한 번 말했다.

"… 일어나십시오."

그 소리에, 린은 눈을 떴다. 눈을 뜨자 처음 보인 것은 눈부신 햇살이었다. 그리

고 다음 순간 보인 것은 사람의 윤곽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팔을 붙들고 있었다.

린은 가볍게 두어 번 눈을 깜빡거렸다.

천천히 '그'의 모습이 드러났다. …세이어였다.

세이어가 약간 근심스런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린은 잠시 혼

란한 정신을 추스렸다.

"…세이어 님?"

"괜찮으십니까."

세이어가 물었고, 린은 활짝 웃어 보였다.

"돌아… 오셨군요!…"

"돌아오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당연하다는 듯이 세이어가 말했다.

"그보다… 괜찮으신 겁니까. 좋지 못한 꿈을 꾸신 듯 한데."

"아니요… 괜찮아요."

린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세이어 님께서 돌아오신 걸요…."

"… 그렇습니까."

약간 차갑게 말하며 세이어는 몸을 돌려 창가로 걸어갔다. …착각이었을까? 린은

문득 세이어가 가볍게 미소짓는 것을 본 것 같았다.

"불안하셨던 모양이군요."

드르륵.

창문을 열며 세이어는 그렇게 말했다.

"너무 남에게 의지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린 씨."

바람이 불었다. 세이어의 길다란 머리칼이 흩날렸고, 린은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

았다. …아름다웠다. 남자에게 어울리는 말은 아닌 듯 싶지만, 확실히 지금 세이어

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문득 세이어가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린 씨는…."

"…?"

무언가 말하려다 말고 세이어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세요?"

"아닙니다."

세이어는 피식 웃었다.

"이제부터… 지켜드리겠습니다. 린 씨를."

"예?…"

"갈까요."

세이어는 손을 내밀었다. 린은 잠시 물끄러미 세이어의 손을 바라보더니, 살짝 미

소지으며 그 손을 잡았다.

세이어와 린은 여관을 나왔다.

정오… 7월의 햇살은 따스했다. 가볍게 불어오는 바람에 상쾌한 기분을 만끽하며

린은 가볍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콧노래를 흥얼흥얼.

세이어는 가만히 고개를 돌려 그런 린을 바라보았다. 린은 기분이 좋은 듯 했다.

적어도… 그냥 보기에는 말이다. 하지만, 세이어는 린의 눈동자 속에 담겨 있는 슬

픔을 놓치지 않았다.

세이어는 알 수 있었다. 지금 린의 행동은 과장된 것, 슬픔을 억누르기 위한 가면

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어째서 슬퍼하는가? …간단하다. 린은 이곳에서 디

간에게 당했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세이어에게도 책임이 있는 일이다.

"후우."

세이어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소리에 린이 고개를 돌려 세이어를 바라보

았다. 걱정스럽다는 듯이 린이 물었다.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세이어는 속으로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인지 알 수 없었다. 이 린이

라는 여성은. 자신을 걱정해도 모자랄 판에 남을 걱정하고 있다니.

세이어는 알고 있었다. 강간당한 여성들이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지를. 세이어는

여태껏 살아오면서 그런 여성들을 많이 보아 왔다.

세이어는 고개를 저었다.

'…이해할 수 없군요…….'

세이어는 허리에 걸려 있는 이니아를 바라보았다.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이니

아는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세이어는 정신을 집중해 이니아의 말에 귀를 기울

여 보았다.

<… 섬세하지 못한 녀석. 내가 왜 이런 녀석을 따라가야 한다는 건지. 에이… 세

라린 님 쪽이 훠얼∼씬 멋있는데 말야…>

"……."

이니아의 말이 자신에 대한 불평임을 확인한 세이어는 피식 웃었다.

'세라린이라….'

세이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그고, 나는 나…. 그에게 연연해야 할 필요는…'

"…없겠지요."

세이어는 빙긋 미소지었다. 린이 이상하다는 듯이 세이어를 바라보았다. 무엇인지

아까부터 계속 중얼거리고 있긴 한데,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세이어는 입을 열었다.

"레이아다 시로… 가도록 할까요."

"예…?"

애초부터 레이아다 시로 가려던 것 아니었던가? 린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세이어

는 이어 다시 말했다.

"어떻게 갔으면 하십니까?…"

"예?"

어조로 보아 아까의 것이 중얼거림이었다면, 이번의 것은 확실한 질문이었다. 그

러나, 어떻게 갔으면 하냐니. 무슨 뜻인지 종잡을 수 없는 말만 하는 세이어였다.

린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눈치챘는지 세이어가 보충설명을 했다.

"도보로 가셨으면 하십니까, 아니면…"

"그냥 함께 걸어가요."

린이 말했다. 세이어는 린을 바라보며 물었다.

"도보로…. 힘들지 않으시겠습니까?"

"힘들지 않아요."

린은 생긋 웃었다.

"세이어 님께서 함께하시는 걸요. 게다가… '지켜주겠다'고까지 하셨잖아요?"

"…그렇군요."

세이어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 시작하는 건가. 문득 세이어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여기서부터

시작인 거다… '나'로서의 생은.

"새로운 시작…."

세이어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 Chapter 1 Fin... and to be countin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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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것으로 1장을 끝냅니다. 내일부터 계속되는 2장도 즐겁게 보아 주시길!

(뭔가 대단한 것처럼 말하는군…-_-;;)

Neissy였습니다.

번 호 : 7033 / 21081 등록일 : 2000년 05월 18일 23:42

등록자 : NEISSY 조 회 : 295 건

제 목 : [연재] ◈ 데스트로이아 ◈ # 40

데스트로이아 DestroiA

Fa-las de syent

"희생양이 필요한 것이겠지요."

세이어는 그렇게 말했다. 시리도록 차가운 그의 어조에 린은 왠지모를 불안감

을 느꼈다. 낮게 조소한 후, 세이어는 이어 말했다.

"추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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