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스트로이어-32화 (33/158)
  • 1. 운명을 거역하는 것이기에 …… (32)

    세이어는 세라린의 기척을 감지해내고 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과 마나

    파장이 거의 같은 존재였기에 그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깊은 숲 속―.

    높게 자란 나무들에 의해 빛이 차단되어 숲 속은 상당히 어두웠다. 키가 작은 식

    물들은 제대로 햇빛을 받지 못해 잘 자라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런 덕분에 걷기에

    는 편했다. 세이어는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니아의 검집에 달아 두었던 컨티뉴얼 라이트의 백색 빛이― 왠지 음산한 분위기

    를 풍겼다. 물론, 세이어가 그런 것으로 공포를 느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너무

    도 고요한 이 숲의 분위기, 그리고 별로 밝지 못한 시계는 세이어에게 약간의 불쾌

    감을 느끼게 했다.

    "……."

    문득 느껴진 마나의 파동에 세이어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스윽.

    어둠 속에서 한 인영 人影이 걸어나오고 있었다. 귀족적인 고급스러운 옷에 흑회

    색의 짧은 망토를 걸친 남자.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이어 자신과 거의 같은 얼굴,

    키, 그리고 존재감. 세이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라린… 이십니까?"

    "그렇다."

    그림자는 입을 열었다. 세이어와 거의 비슷한 톤의 목소리―단지, 약간 더 굵다는

    느낌이 드는 목소리―였다. 세라린은 여유 있는 발걸음으로 세이어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네가… 세이어인가?"

    "그렇습니다. 제가 세이어,"

    세이어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의 조각… 이지요."

    "…훗. 그런가…."

    세라린은 피식 조소하더니, 이니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이니아에서 검은

    색의 '빛'이 내뿜어지더니, 저절로 이니아가 검집에서 빠져나와 공중에 떠올랐다.

    "일시 환원이다. 이니아."

    세라린은 나직하게 말했다.

    즈즈즉.

    낮은 소리와 함께 롱 소드― 이니아의 형상이 일그러졌다. 검은 빛을 내뿜는 구체

    의 모양으로 변하더니, 이내 다른 모습으로 변해갔다. 인간…, 인간형의 모습이었

    다.

    천천히 이니아의 모습이 구체화되어갔다.

    키는 약 150센티예즈 정도―. 검은 색의, 몸에 착 달라붙는 옷을 입고 있었는데,

    목까지 올라오는 복장으로, 머리와 손을 제외한 온몸을 모두 덮고 있었다. 몸의 윤

    곽이 확실히 드러나고, 이어 얼굴이 구체화되었다. 검은 색의 단발머리, 약간 갸름

    한 얼굴, 그리고 동그랗고 큰 눈―. 14∼15세 정도로 보였는데, 귀엽다… 라는 느

    낌의 소녀였다.

    이윽고 그녀가 눈을 뜨더니, 천천히 내려앉아 세라린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오래간만에… 뵙는군요. 세라린 님."

    "아아… 그래."

    세라린은 가볍게 미소지었다.

    "오래간만이군, 이니아. 그동안 수고했다."

    "아닙니다. 그다지…. 나름대로 재미있었거든요."

    이니아는 살풋 미소지었고, 세라린은 훗 하고 가볍게 웃었다.

    "여전하구나, 너도."

    "예. 저야 언제나 여전하죠."

    이니아는 미소 띤 얼굴로 세라린을 바라보았다. 세라린은 가볍게 미소하더니, 고

    개를 돌려 세이어에게로 향했다. 세이어는 가만히 세라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라린은 피식 웃었다.

    "마치 알고 있었다는 얼굴 같은데, 세이어."

    "아아…,"

    세이어가 한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감시자 치고는 상당한 도움이 되었으니까요. …그보다, 어차피 상관없지

    않습니까. 이왕이면 조금 더 일찍 전해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비웃는 듯한 그의 말에 세라린이 피식 미소지었다.

    "글쎄…. 의식이 정신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렇습니까?…"

    세이어가 조소했다. 세라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보다."

    세라린은 이니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생략하도록 하지.

    이니아."

    "예."

    "세이어… 네 판단으로는 어떤가?"

    "…글쎄요……."

    이니아는 가볍게 고개를 갸웃하더니, 세이어를 바라보았다. 세이어는 무감정한 얼

    굴로 이니아를 마주보았고, 문득 이니아의 얼굴에 장난기어린 미소가 떠올랐다.

    "…이 녀석은,"

    이니아는 다시 세라린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세라린 님과 비슷해요."

    "…그런가."

    세라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어의 얼굴에 일순 의아함이 스쳐지나갔다. 세이어

    가 입을 열었다.

    "…무슨 뜻입니까……, 이니아?"

    "흐음?"

    이니아가 콧소리를 냈다.

    "직접 생각해보지 그래, 세이어?"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세이어는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고, 그런 세이어를 바라보며 이니아가 피식 웃었

    다. 이니아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며 입을 열었다.

    "우유부단함."

    "……?"

    세이어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고, 세라린이 입을 열었다. 과히 좋아 보이는 기색

    은 아니었다.

    "이니아."

    "네?"

    "그 말… 나에게도 해당되는 것인가?…"

    세라린은 그렇게 물었고, 이니아는 생긋 미소지었다.

    "사실이잖아요. 퓨어린 님이…"

    "…알겠다."

    세라린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이니아의 말을 끊었다. 세라린은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더니, 이윽고 자조적인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이니아. 그동안의 기억의 전송을 부탁한다."

    "네."

    이니아는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눈을 감았다. 세라린도 따라서 눈을 감았고, 세이

    어는 그런 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둘이 눈을 떴다. 세라

    린의 입가에 냉소가 떠올랐다.

    "…과연, 그렇군."

    세라린은 조소하며 세이어를 향해 입을 열었다.

    "확실히, 사라딘께서는 네 쪽을 좀 더 마음에 들어하시겠어."

    "……?"

    세이어는 묵묵히 세라린을 바라보았다. 세라린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별로… 마음에 들진 않는군, 너란 녀석."

    "무슨… 뜻입니까?"

    세이어가 입을 열었고, 세라린의 냉소가 더욱 진해졌다.

    "그 말 그대로다."

    "……."

    세이어는 입을 다물었다.

    "네 녀석은… 스스로마저 비웃고 있군."

    세라린이 말했다.

    "결국은… 무엇이지? 네 녀석의 행동은."

    "……."

    "너의 행동에는 의미가 없다. 신념도, 의지도 없어."

    세라린은 경멸에 가까운 시선을 세이어에게 던지며 말했다. 세이어는 무표정한 얼

    굴로 세라린을 마주보았다. 그리고 그런 둘을 이니아가 불안한 듯한 눈동자를 하고

    번갈아 바라보았다.

    세라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가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세이어?"

    세이어는 고개를 들어 세라린을 바라보았다. 세라린은 여전 조소 띤 얼굴로 자신

    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이어는 한숨 섞인 소리로 말했다.

    "제가… 살아가는 이유…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세라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어는 씁쓸하게 웃었다.

    "제가 살아가는 이유…라…."

    세이어는 고개를 저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겠군요, 그런 것."

    "큭, 그런가?…"

    나즈막히 세라린이 조소를 터뜨렸다. 세라린은 가볍게 고개를 가로젓더니, 이내

    입술 끝을 치켜올렸다.

    "…좋아. 널 흡수하겠다."

    "!…"

    "무의미한 생일 뿐이다. 원래 존재치 않았을 자아였을 터. 이제 와서 사라진다고

    두렵진 않겠지."

    세라린은 조소하며 세이어를 바라보았다.

    - To be continu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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