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스트로이어-23화 (24/158)
  • 1. 운명을 거역하는 것이기에 …… (23)

    …….

    어디선가 들려오는 새소리에 린은 눈을 떴다. 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이

    눈부셨다. 린은 가볍게 눈을 찡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은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린은 의아한 눈으로 자신을 훑어보았다. …왜 아

    무것도 입고 있지 않지? 린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방 저편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는 옷가지들이 보였다.

    동시에, 자신의 배 아래쪽에서 극심한 고통이 느껴졌다. 린은 미간을 찌푸리며 아

    래를 내려보았다. …뭐지?

    피?

    "……!!"

    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제서야 기억난 것이었다. 지난 밤의 일이.

    "……흐윽…."

    굳게 악문 잇사이로 신음이 새어나왔다. 린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린은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하며 자신을 살펴보았다.

    "이…이건…"

    린의 눈동자가 커졌다. 어느새 메말라 버린 입술이 따가웠다.

    "아… 아냐… 아냐……,"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 싸늘한 느낌.

    "아니야아아아아――!!!!"

    "이틀 남았군요."

    세이어는 그렇게 말하며 이니아를 집어들었다.

    <약속 말야?>

    "그렇습니다."

    세이어는 쓰게 미소지으며 어깨에 망토를 걸쳤다. 세이어는 가벼운 몸짓으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다.

    "정리는 대강 끝냈으니… 이만 가 볼까요."

    <…어딜?>

    "영주의 성… 으로, 말입니다."

    세이어는 천천히 방을 나섰다. 이니아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영주의 성? 이제 와서 거기엔 뭐 하러?

    대체 가서 뭘 하겠다는 거야?>

    "모르겠습니다."

    세이어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고, 이니아는 헛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너란 녀석,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그렇습니까…?"

    세이어가 한차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이해할 수 없다… 입니까.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글쎄, 안 됩니다."

    경비병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세이어는 몇 차례 더 부탁해 보았으나, 돌아오는 대

    답은 마찬가지였다. 세이어를 성 안에 들여보낼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잖아.>

    이니아가 말했다.

    <네가 여기 영주와 무슨 연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성을 제집 드나들듯 들낙날락

    할 수는 없는 거 아냐?>

    "…그렇기도 하군요."

    세이어는 피식 웃었다. 경비병이 미간을 찌푸렸다.

    "뭐가 그렇기도 하다는 겁니까?"

    "……."

    세이어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는 나직하게 중얼거렸

    다.

    "―디텍트 퍼슨 Detect person."

    디텍트 퍼슨. 사람―정확히 말하자면, '인간형 생물'―의 존재를 탐지해내는 마법

    이다. 세이어는 눈을 뜨더니, 의아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경비병을 무시한 채

    성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입니까."

    다음 순간, 세이어의 몸을 흰 빛이 감쌌다. 경비병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세이어

    를 바라보았다. 흰 빛이 점차 강렬해진다. 경비병은 견디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이윽고 흰 빛이 사라진 것을 느낀 경비병이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세이어

    의 모습이 사라진 뒤였다.

    공간이 일그러졌다.

    즈즈…즈즈즈즉.

    강렬한 흰 빛이 내뿜어졌고, 공간이 열리며 그곳에서 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감정해 보이는 얼굴. 흑색의 머리칼, 눈동자, 상의, 하의, 망토. 온통 검은 색으

    로 몸을 덮은 남자― 세이어였다.

    세이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방 안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져 있는 흐트러진 옷가지. 침대 위에 앉은 채 가만히

    있는 린. 옷은 입고 있지 않았다.

    세이어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대로 찾아 온 것 같군요."

    세이어는 린에게 다가가, 자신의 망토를 걸쳐 주었다. 그러나 린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듯, 가만히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세이어는 린의 눈동자를 살펴보았다. ―눈동자에 초점이 없었

    다. 자신을 향해 고개는 돌리고 있었으나, 멍한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세이어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고작 그 정도로…."

    <고작이라고?!!>

    이니아가 소리치는 것이 들려왔다. 세이어는 미간을 찡그리며 이니아를 내려보았

    다.

    <넌, 이게 '고작'이라고 생각해?!>

    이니아는 그렇게 소리쳤고, 세이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니란 말씀이십니까?…"

    <이… 바보 같은 녀석아!!…>

    이니아가 고함지르는 것이 들려왔다. 세이어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차분한 목

    소리로 말했다.

    "린 씨가 잃은 것은 없습니다. 어째서 화를 내시는 것입니까?…"

    <…잃은 것이 없다고?…>

    황당하다는 듯이 이니아가 물었다. 세이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이니아는

    버럭 소리쳤다.

    <너 대체 린을 뭐라고 생각한 거야! 린이 너같은 냉혈한인 줄 알아?!!>

    "……."

    세이어는 입을 다물었고, 린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너… 정말 느껴지는 게 없는 거야? 아무것도?>

    세이어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이니아를 풀어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이니아가

    당황하며 뭐라 소리쳤지만, 세이어는 그 말을 무시했다.

    "…굳이 당신에게 말해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세이어는 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린은 그 자세 그대로, 일말의 움직임도 없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세이어는 린의

    어깨 위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그러나, 아무 반응도 없었다. 세이어는 자조적인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듣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꿈틀.

    순간, 약간이지만 린의 몸이 움직였다. 세이어는 얼굴을 린에게로 가까이하며 다

    시 한 번 말했다.

    "듣고 싶은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대답하지 않으신다면 그냥 가겠습니다."

    린의 몸이 다시 한 번 움직였다. 하지만 그 뿐, 다른 움직임은 없었고, 세이어는

    한숨을 내쉬었다.

    "감정에 파묻혀 버린 것입니까…."

    짝.

    세이어는 린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 린은 그대로 침대 위에 쓰러졌고, 세이어는

    낮지만 위압적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 약해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일어나십시오."

    "……살아…갈…"

    문득 린의 눈동자에 눈물이 맺혔고, 그녀의 입이 열렸다.

    "…왜……"

    세이어는 무감정한 눈으로 린을 내려다보았다. 린은 천천히 상체를 들어올렸다.

    세이어가 아까 걸쳐주었던 망토가 주륵 흘러내렸다. 세이어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

    리며 그 망토를 다시 제대로 걸쳐 주었고, 린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다시 오신… 거죠?…"

    세이어는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듣고 싶은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듣고… 싶은… 것?…"

    린이 고개를 숙이더니, 낮게 웃기 시작했다. 어딘지 처절하다는 느낌이 드는 그런

    웃음이었다. 세이어는 가만히 린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래서 다시 오신 거라고요…?"

    린은 허무하다는 듯이 미소지었다.

    "그래요… 그런가요… 후… 후후후후… 후후후훗…."

    린의 어깨가 들썩였다.

    "…왜……?"

    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왜… 왜 그때 절 구하셨던 거죠?!…"

    세이어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 To be continued... -

    ===========================================================================

    뭐…, 세이어란 녀석은 이런 녀석입니다.

    Neissy였습니다.

    번 호 : 6593 / 21139 등록일 : 2000년 04월 24일 23:45

    등록자 : NEISSY 조 회 : 316 건

    제 목 : [연재] ◈ 데스트로이아 ◈ # 24

    데스트로이아 DestroiA

    Fa-las de syent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