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운명을 거역하는 것이기에 …… (21)
"오래간만이야."
퓨어린은 생긋 웃으며 말을 건넸다. 세라린은 가볍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아아… 확실히, 오래간만이군."
"정확히 말하자면, 1321년 하고도 4개월 13일 만이지."
퓨어린은 손가락을 까닥여 보이며 그렇게 말했고, 세라린은 피식 웃으며 그런 퓨
어린을 바라보았다.
"이런… 그걸 다 세고 있었던 건가?"
"물론이야."
퓨어린이 눈웃음을 쳤다. 세라린은 쓰게 웃으며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다.
"쓸데없는 짓을…."
"쓸데없다니."
퓨어린이 정색을 했다.
"나한텐 중대사라고."
"그런가…."
"그래. 그런데 말야… 왜 하필 이런 곳에 있는 거야? 찾느라 힘들었잖아."
퓨어린이 불만을 토했고, 세라린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귀찮은 일은 피하고 싶으니까."
"…욱. 그거 내가 귀찮다는 뜻이야?"
"아니…. 단지 쓸데없이 덤벼오는 버러지들을 상대하고 싶지 않을 뿐이지. 이런
동굴 속에 있으면 인간놈들 눈에는 뜨이지 않으니까."
"그래도…."
퓨어린은 마땅찮다는 듯한 눈길로 동굴 안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말했다. 어두컴컴
한 종유석 동굴 안. 아, 동굴…이라기보다, 땅 속의 공동이라는 표현이 정확하겠지
만. 입구도 출구도 없고 그저 땅 속에 공간이 있는 것 뿐이다. 확실히, 귀찮은 일
을 피하기에는 적절한 공간이었다.
세라린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뭐… 어쨌든 만났으니까 됐고.
그보다, 그 녀석에게 이니아는 잘 전해준 건가?"
"아…. 응."
퓨어린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석만 보면 기분이 나쁘단 말야. 너무 건방져."
"뭐…. '나'이니까."
"그래도 말이지…. …그런데 걜 왜 그 녀석에게 전해주라고 한 거야?"
궁금하다는 듯이 퓨어린이 물었고, 세라린은 피식 웃었다.
"일종의 시험이랄까."
"응?…"
"별로 대단한 건 아니니 신경 쓸 건 없어."
세라린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단지… 녀석이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가 궁금한 것 뿐이니까."
"응?… 그게 무슨 소리야?"
퓨어린은 미간을 찌푸렸고, 세라린은 가볍게 미소지었다.
린과 헤어진 후, 세이어는 한 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오늘이 27일. 약속된 날짜인 30일까지는 아직 사흘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다. 그
때까지 세이어는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세이어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곰팡이가 슬어, 군데군데 푸르게 변한 벽지. 여기
저기 갈라져 있는 나무 책상. 조잡하게 만들어진 나무 침대. 보통 흔하게 볼 수 있
는 하급의 방이다.
"하급, 이라…."
세이어는 피식 웃으며 망토를 벗어 침대맡에 개어 놓았다. 세이어는 침대에 걸터
앉으며 허리춤에 걸어놓았던 이니아를 검집째 빼어들었다.
"영주의 침실이라면, 역시 고급이겠지요."
세이어는 이니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불편하진 않겠지만."
<…미련이 남아 있는 거야, 세이어?>
이니아가 말했다. 세이어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곧 고개를 저었다.
"미련이라…. 그런 것이 있을 리 없잖습니까."
<그럼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답답하다는 듯이 이니아가 물었다.
<대체, 네가 바라는 게 뭐야? 정말 이해가 안 가는 행동만 하고 있잖아.>
"그렇습니까?…"
세이어가 자조하듯 미소지었다. 이니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를 위하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론 아니고. 어떤 일에서고 보호해 줄 것 같
이 굴더니만 결국엔 내던지고. 대체 어느 쪽인 거야?>
"물론… 후자이겠지요."
세이어가 웃었다. 왠지 쓸쓸해 보이는 웃음이다.
"전 린 씨가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보고 싶었을 뿐이니까요."
<더더욱 이해가 안 돼.>
이니아가 말했다.
<단지 그것뿐이라고? 그럼 대체 지금 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거야? 납득할 수가
없단 말야.>
"안절부절못하고 있다고요…?"
세이어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세이어는 잠시 고개를 숙이더니, 이어 나직하게
웃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렇게 웃던 세이어는 이윽고 웃음을 멈추고는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렇게 보였단 말입니까?"
<…그럼, 아니야?>
이상하다는 듯한 어조로 이니아가 물었다. 세이어는 피식 웃더니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절부절이라… 적절한 표현인지도 모르겠군요. 분명…."
세이어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뭔가… 꺼림직한 것은 사실이니 말입니다."
<그럼 지금이라도 린한테 가 보면 되잖아.>
"아니오."
세이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린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화려하게 치장된 방 안. 어디선지 은은하게 꽃향기가 나고 있었고, 벽에는 금은의
장식품들이 걸려 있었다. 무슨 문장 같았는데, 처음 보는 무늬여서 린으로서는 무
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방 한켠에는 보기에도 푹신푹신해 보이는 고급의
매트리스가 깔린 침대가 놓여 있었다.
"세이어 님…."
한숨과 함께, 린은 침대에 몸을 뉘었다.
"어째서… 인가요…?"
린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백색의 벽지. 아무런 무늬도 없는 그냥 백색의 벽지를 그녀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
…이젠 정말로 혼자다.
세이어는 가 버렸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어째서…?"
린은 입술을 달싹였다.
'결국 린 씨의 선택은 이것입니까?…'라고. 세이어는 그렇게 말하고 떠나가 버렸
다. 경멸의 기색마저 내비치며.
하지만…. 대체 자신이 무얼 선택했다는 것일까. 왜… 그러고 가 버린 것일까.
"전 모르겠어요…."
린은 중얼거렸다.
"제게서 무엇을 바라신 건지….
어째서 그런 표정을 하시는 건지…."
왜…, 왜…. 왜…?
여러 생각들이 어지럽게 머리속을 맴돌았다. 린은 양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음 속은 따뜻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착각… 이었나요…?"
린의 목소리가 점점 젖어갔다.
"저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었나요…?"
어느새 린의 눈가가 촉촉히 젖어 있었다. 흐르는 눈물을 닦으려고도 하지 않은 채
, 그녀는 허무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왜…."
어째서….
뭐가 잘못된 것인지….
"대답해 주세요…. 세이어 님…."
- To be continu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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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만한 연습장이 하나 생겼길래 거기다가 설정을 옮기는 중입니다…. 캬핫, 그
나마도 정리하자니까 좀 힘들군요. 큐후후…. 1장이 끝나고 나면 설정 & 잡담을
또다시 올릴 생각입니다. 이번엔 잡담보다는 설정에 가까울 테니(…정말일까?)
읽어 보세요. 냐하하……;;
Neissy였습니다.
번 호 : 6536 / 21139 등록일 : 2000년 04월 22일 22:58
등록자 : NEISSY 조 회 : 317 건
제 목 : [연재] ◈ 데스트로이아 ◈ # 22
데스트로이아 DestroiA
Fa-las de sy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