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운명을 거역하는 것이기에 …… (12)
"역시 이곳에 계셨군요."
들려온 목소리에 에이드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았다.
지금 에이드가 위치해 있는 곳은 사이아스 왕성 제 0정원.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은 아니다. 귀족이나 기사. 그 중에서 허락받은 사람들만 들어올 수 있는 곳. 그
렇기에 보통은 방해받지 않고 쉴 수 있는 장소였다.
마왕 부활…. 그 일이 일어난 지 사흘 만에 에이드는 사이아스 시로 돌아왔다. 당
시 에이드가 받았던 내상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고, 의사로부터는 절대 안정을
취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충고를 받아 둔 상태였었다.
하지만 에이드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육체의 안정이 아니라 마음―정신의 안정이
었다. 인간으로서는 감히 대적할수 없는 존재와 맞닥트린 충격. 그리고 또한… 인
정하고 싶지 않았으나, 공포스러웠다. 그의 앞에서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
그래, 안정이 필요했다.
에이드는 지금 누구와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정신이 혼란스러웠고, 자신이 아무
힘도 지니지 못했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의식되었다. 그러한 상태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단지… 그냥 혼자 조용히 생각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러
기 위한 곳으로는 이곳이 적격이었다.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으니만큼
, 말이다. 근래 며칠간 에이드는 이 정원에서 하루를 보내곤 했고, 그러는 중 그런
대로 회복되어가던 중이었다. 그리고 그런 중에… 불청객이 찾아온 것이었다. 솔직
히 말하자면, 달갑지가 않았다. 그러나…
"아…, 시네라 님…!"
에이드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하자마자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시네라 레이디카 프리네리아. 슈나로드 레이디카 프리네리아의 장녀로……,
프리네리아 왕국의 왕녀였다.
"여기엔 무슨 일로……."
에이드는 예를 표한 자세 그대로 고개를 들지 않고 말했다. 시네라는 입을 가리며
가볍게 미소짓고는 에이드에게 말했다.
"무슨 일이라니요…, 에이드 님. 왠지 달갑잖다는 뜻으로 들리는데요?…"
"아, 아닙니다. 그런…. 당치않습니다."
시네라는 가볍게 웃었다.
"그런가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일어나세요, 에이드 님."
"말씀 받들겠습니다."
에이드는 고개를 숙였다 들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에이드의 키가 시네라 왕녀
의 키보다 더 컸기에 에이드는 시네라를 내려다보는 모양이 되었고, 에이드로서는
그것이 불경스럽다고 느껴졌다. 에이드의 그런 생각을 짐작한 시네라가 생긋 웃어
보이며―입을 가린 채이긴 하지만― 말했다.
"너무 그러실 필요 없어요. 에이드 님.
제가 오히려 불편해지네요."
에이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는 뜻을 표했으나, 여전히 송구스럽습니다… 라
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시네라는 그것이 마땅치 않다는 듯한 눈길로 에이드를 잠시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살짝 미소짓고 나서든 말을 계속했다.
"아…, 제가 온 이유를 말하지 않았네요."
에이드는 침묵한 채 시네라의 말을 기다렸다.
"에이드 님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조금 힘을 내 주셨으면 해요."
"예…."
에이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시네라는 그러는 에이드를 바라보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에이드
의 눈….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저, 왕녀를 향한 예의, 응당 갖추어
야만 하는… 경의를 표하는 자세? 단지 그것뿐일까.
'그렇게 거리를 두지 말아요….'
시네라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가볍게 웃어 보였다. 에이드는 여전히 자신을 바
라보고 있었고, 그 눈길 속에 담긴 감정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시네라는 약
간의 허전함을 느꼈다.
"물론…. 그것만을 말하려 온 것은 아니에요."
에이드는 할 말이 있으시면 어서 말하십시오… 라는 듯한 눈빛으로 시네라를 바라
보았다. 커다란 거리를 두는 듯한 그의 표정에 시네라는 애써 웃어 보였다.
"회의가 있다는군요…. 왕성 제 3회의실에서, 오늘 밤 10시부터 말이에요.
에이드 님도 꼭 참석해 달라는 말을 듣고 전하러 왔어요."
"그렇습니까…."
에이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을 말하는데 어찌… 왕녀님께서 몸소 왕림하셨습니까…?"
시네라는 뜨끔하며 에이드를 바라보았다.
'정말… 모르시는 건가요?…'
에이드의 말이 맞았고, 사실 그것은 당연한 의문이었다.
지금 에이드가 위치해 있는 곳은 사이아스 왕성 제 0정원.―간단히 정원이라고 표
현하고 있으나, 단순한 정원은 아니다― 왕성 내에 있는 여러 정원 가운데서도 특
히 구별되어, 특별히 고귀한 신분, 인정받지 않고서는 들어올 수 없었다. 시네라
왕녀가 시녀들과 함께 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사실 이 정원의 용도는 단지 정원으로서만은 아니었다. 고위층만이 사용하고, 또
사용할 수 있기에, 비밀 회의실로도 사용되는 이곳은 예전 다네―스튜리온이라는
마법사가 건 보호마법에 의해 엄격히 보호받고 있었다. 확실히,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그러나…
'에이드 님…….'
그것이 에이드에게 회의에 나와야 한다고 말해줄 사람이 시네라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지는 못한다. 다시 말해, 전령이라면 굳이 제 1왕녀가 아니더라도 누구
든지―이를테면, 기사― 상관없었고, 왕녀가 올 필요성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그
말의 내용이 심각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라면 또 모를까, 단지 회의에 나오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왕녀가 직접 나간다… 라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에이드는 그것을 묻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기사에게 어떤 말을 전하기 위해―그것이 어떤 말이든간에― 굳이 왕녀
가 나왔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하는 것을, 에이드는 정말로 모르고 있는
것일까.
시네라는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끼며 애써 미소지었다. 어려서부터 거짓 웃음을 짓
는 것에는 익숙한 왕족이었기에 그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아니… 아바마마께 제가 부탁드렸어요…. 제가 직접 에이드 님께 전하겠다고."
"어째서…"
에이드는 의외라는 얼굴이었다.
"엘피가……… 궁금해했거든요…. 에이드 님의 안부가 어떠한지.
엘피는 지금 나올 수가 없어서 제가 대신 오기로 했어요…."
엘피 왕녀. 막내이자, 시네라보다 4살 어린 동생. 에이드와는 친한 관계였다.―물
론, 기사와 왕녀가 친하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쉽게 알 수 있으리라― 에이드
와 엘피 왕녀의 나이 차이는 6살. 그들에게 문제는 없으리라.
"아, 엘피 왕녀님께서는 안녕하십니까?"
에이드의 얼굴이 밝아졌고, 시네라는 에이드 모르게 길게 숨을 내쉬었다.
"예…. 건강해요."
에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오늘 밤 10시…, 왕성 제 3회의실…. 잘 알겠습니다.
잘 알았습니다, 시네라 왕녀님."
에이드는 아까보다 한층 밝아진 얼굴로 정원을 빠져나갔고, 그에 반해 정원에 남
겨진 시네라의 얼굴은 어둡기만 했다.
"………."
시네라는 한참이나 가만히 선 채 에이드가 빠져나간 출구를 바라보았다.
"알고는 있어요. 알고 있어요. 하지만, 하지만…
그 마음… 조금라도 제게 허락해 주실 수는 없으신가요…."
…….
어두운 시네라의 마음과는 대조적으로… 내리쬐는 초여름의 햇살은 따스하기만 했
다.
"아하핫! 정말 오래간만인데, 에이드!!"
비르테른 성기사단 단장 로빈은 호탕하게 웃으며 에이드를 반겼다. 에이드는 멋쩍
게 웃으며 마주 인사했다.
"아아… 오래간만입니다. 로빈 님.
일찍 나오셨군요."
로빈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이런이런… 뭘 그렇게 격식을 차리는 거야? 이거야 원…. 내가 에이드보다 더 나
이가 많은 것도 아니고… 내가 불편해진다고.
자꾸 그러면 나도 존대말을 쓰겠어. '에이드 님'이라고 부를까?"
로빈의 말에 에이드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전혀 변하지 않았어… 이 분은.'
"아니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와 로빈 님은 신분이 다르지 않습니까."
"또 그러는군."
로빈은 짐짓 미간을 찌푸려 보였다.
"내가 누누히 말했지 않나.
우리 비르테른 성기사단과 에이드의 슈니체르 성기사단 사이에는 신분의 고하가
없다고."
"그렇다 해도 다하난께서 정하신 순서는 바뀌지 않습니다."
"이거야 원…."
로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에이드는 너무 그런 것에 구애받는 경향이 있어."
사실 말하자면 에이드가 너무 구애받는다기보다는 로빈이 너무 자유분방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로빈은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로빈은 한차례 길게 숨을
내쉬더니 곧 이어 말했다.
"그럼, 최소한 그 '로빈 님'이라는 호칭만이라도 좀 어떻게 해줘. 듣는 내가 거북
하다고, '에이드 님'."
에이드는 가볍게 미소지었다.
"로빈 님의 뜻은 알겠습니다만… 그럴 순 없습니다, 로빈 님."
"……."
로빈은 잠시 얼굴을 굳혔다가 풀었다.
"나… 이거야 참. 어쩔 수 없군. 하여간 에이드 고지식한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좋아, 좋아, 좋다고. 마음대로 해."
"감사합니다."
로빈은 고개를 흔들었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이번에 대단한 걸 만났다면서. 이번 회의도 그것 때문이
라 들었는데."
"들으셨습니까…?"
"아아. 아디즈에게 들었지.
그거 말야……. 세라린… 이라며?"
순간, 에이드의 얼굴이 굳어졌다.
"……예."
"…이런. 역시 그것 때문이었던가 보군. 그동안…"
"이젠 괜찮습니다."
머쓱하게 웃는 로빈을 향해 에이드는 가볍게 웃었다. 로빈은 그런 에이드를 잠시
동안 바라보더니, 씨익 웃었다.
"그런가? 하긴 표정을 보니 그런 것 같아.
참, 나 때문에 지금 앉지도 못하고 있군. 미안하게 됐어. 자, 자리에 앉으라고."
로빈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의 옆에 앉으라고 신호를 했다. 에이드는 탁자 속에
있는 의자를 꺼내어 앉으며 말했다.
"아니오, 전 괜찮았습니다."
"괜찮긴 뭐가. 아아… 어쨌든 아직 회의를 시작하려면 30분은 남았으니. 그동안
못했던 이야기나 하자구."
"예…. 그러도록 하지요."
에이드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빈은 잠시 그런 로빈을 바라보다가, 피
식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역시 힘들긴 힘들었던 모양이군. 얼굴이 조금 핼쓱해졌어."
"아니… 전 괜찮습니다."
에이드는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고, 로빈은 수긍했다는 듯 씨익 웃어 보였다.
"그래? 하긴, 괜찮아야만 할테지.
이번의 회의는 그것을 위한 회의니까 말이야."
- To be continu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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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시간 되세요.
Neissy였습니다.
번 호 : 6375 / 21148 등록일 : 2000년 04월 14일 00:12
등록자 : NEISSY 조 회 : 359 건
제 목 : [연재] ◈ 데스트로이아 ◈ # 13
데스트로이아 DestroiA
Fa-las de sy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