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스트로이어-9화 (10/158)
  • 1. 운명을 거역하는 것이기에 …… (9)

    그것은 오래 전의 일이었다.

    그 기나긴 세월 동안 내 의지는 꺾여진 채 정신계에 갖혀 있어야만 했다. 그래,

    하긴 어차피 그분에게 있어서 내 의지 같은 것이 중요하진 않았겠지만.

    이제 와서 풀어주다니, 대체 무슨 의미일까.

    글쎄…, 어쨌든 이번 계획도 그다지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

    사라딘께서 미리 내 의지에 신탁을 내려주었으나… 어떨까.

    모든 것을 파괴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어쨌든… 사라딘의 말씀대로 다시 내가 물질계에 구현되고 있다. 이미 그 시간

    은 거의 종착에 도달했고…. 일단은 결정을 내려야 할 때다.

    후…….

    하긴 이제와서 새삼스레 내릴 결정이라는 것이 존재하진 않지만.

    어차피… 나는.

    대리자일 뿐이니까.

    결계 안의 사람들은 극렬한 마나의 흐름을 견뎌내지 못하고 박살나 버렸다. ―구

    현된 것도 아닌, 단지 응집되는 마나의 에너지 그 자체만으로 물질에 직접 간섭한

    다는 것… 그런 것은 사실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실로 엄청난 양의 마나가 모여들

    지 않고서는 말이다.

    "대체… 무얼 되돌리려는… 부활시키려는 거지…?"

    니리아는 창백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본능적으로 느

    껴졌다. 무언가… 무언가, 죽음이랄까, 어두움이랄까, 무언가 그런 기운이 다가오

    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지직. 지지직.

    '공간'이 삐그덕거렸고, 모여든 마나는 한곳으로 집결되어 검은 구체를 생성시켰

    다.

    "대체… 뭐냔…"

    고오오오오오오오오오!!!

    저음? 고음? 그 어느 쪽도 아닌―혹은 양쪽 다인― 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퍼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검은 구체는 서서히 그 모습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사람…?"

    구체는 인간의 형상을 띄기 시작했다.

    지직. 지지직.

    형상의 구체화는 상당히 빠른 시간 내에 이루어졌다. 형체는 이제 거의 완연한 인

    간의 형상을 드러내고 있었고, 검은 색의 그것은 왠지 음습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즈즉.

    검은 눈동자. 검은 머리칼.

    즈즈즈즉.

    고급스러운 옷. 그리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망토.

    파직.

    일견 선해 보이는 준수한 얼굴.

    우웅. 우우웅.

    지금, 되돌아온다.

    "누굽니까, 당신은?…"

    얼결에 존대말이 나왔다. 적인 것은 분명하나… 저 흑발의 청년에게서는 왠지모를

    위엄…이랄까, 존재감…이랄까, 그런 분위기가 느껴졌다.

    흑발의 청년은 천천히 몸을 돌려 아디즈를 바라보았다. 이미 마법진은 그 효력이

    다했기에 빛이 사라져 어두워져 있었고, 단지 푸른 빛의 스파크가 가끔 파직 소리

    와 함께 튈 뿐이었다. 그는 픽 비웃음의 표정을 짓고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마법

    진에서 걸어나왔다.

    "……."

    에이드, 아디즈, 니리아, 넷샤는 왠지모를 위압감과 함께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그

    를 바라보며 움찔 뒤로 물러섰고, 그는 그것을 보고 냉소를 지었다.

    천천히 청년의 입이 열렸다.

    "알고 싶은가."

    "……?"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은가."

    청년은 다시 한 번 말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 말에 대답하진 못했다. 청년은 그

    런 그들의 모습에 조소하더니 이어 말했다.

    "훗…. 뭐 좋겠지."

    청녀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에이드의 앞으로 다가왔다.

    "……."

    에이드는 침묵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보다 조금 큰 편이다. 에이드의 키가 1

    76센티예즈이니까… 180센티예즈 이상인 듯 싶다. 위압감…. 압도적인 위압감이다.

    "나는. 나의 이름은… 세라린. 마왕, 세라린이다."

    그의 말투는 꽤나 평온했고, 때문에 그 말의 의미를 그들이 이해하는 데에는 약간

    의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뭐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고… 잠깐의

    정적 후 에이드는 경악에 휩싸여 외쳤다.

    "마왕… 마왕이라고!!"

    세라린은 지루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문제라도 있나?"

    "제 1급 마족의 최고위…. 마족의 마족의 통솔자…."

    니리아는 핼쓱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니리아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세라린은

    잠시 미간을 오므렸으나 곧 다시 원래의 무표정한 얼굴로 되돌아갔다.

    "크윽…. 마왕이라니…."

    아디즈는 검에 다시 한 번 홀리 버스트를 걸며 그렇게 중얼거렸고, 니리아는 무언

    가 뇌까리며 마법을 준비했다.

    "허어… 대적할 생각인가."

    세라린이 비웃듯 말했다.

    "어차피 공존할 수 없는 존재…. 다하난의 종으로서, 마의 존재를 두고 보낼 수는

    없는 법. 어려울지 모르나… 없애야만 합니다."

    마치 세라린의 말에 답하기라도 하듯 그렇게 중얼거린 에이드는 검에 홀리 버스트

    를 걸었다. 세라린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없애겠다는 건가…. 이 나를?"

    "힘을 빌려 주시옵소서, 다하난이시여!!"

    에이드가 세라린에게로 돌진해갔다.

    '마왕. 제 1급 마족 중에서도 고르고 고른 존재다. 하지만 마족일 뿐. 나의 힘과

    다하난께서 내게 부여하신 힘을 합쳐서…!!'

    "소멸하라, 마왕!"

    브로드 소드는 곧장 세라린의 목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나, 세라린은 위기감 같은

    건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이 냉소지으며 에이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덜컥.

    마치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 에이드의 몸이 세라린을 베려던 자세 그대로 멈춰

    버렸다. 세라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향해 말했다.

    "무리다.

    버러지 신의 개…. 그 정도 능력으로는 말이지."

    "다하난을 지금 버러지라고 하는 건가?!"

    울컥한 에이드가 외쳤다. 당장이라도 베어버리겠다는 기세의 에이드였지만, 몸이

    굳어 버린 덕분에 에이드는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때문에…, 에이드가 할 수 있었

    던 일은 그저 세라린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것 정도였다. 하지만, 겨우 인간 따위

    가 노려본다고 두려워한다면 마왕이란 이름을 가질 자격이 없다.

    세라린은 훗 하고 미소지었다.

    "역시로군."

    "뭐가… ……욱?!!"

    뭐가 역시냐고 물으려 한 에이드였으나, 그는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비명을 내뱉

    어야 했다.

    카캉, 퍼억!

    세라린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에이드가 튕겨져 나간 것이었다. 마치 한껏 당겨졌

    던 화살이 쏘아져 나가듯이. 튕겨나간 에이드는 다이렉트로 동굴 바위벽에 부딪혔

    고, 그가 입었던 하프 플레이트 메일은 충격으로 인해 그대로 우그러졌다. 물론,

    갑옷이 우그러질 정도의 충격으로 바위벽과 격돌한 에이드가 무사할 리가 없다.

    쿠당탕.

    약간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에이드는 그대로 힘없이 엎어졌고, 아디즈, 니리아, 넷

    샤는 그저 멍한 얼굴로 자신들 옆에 쓰러진 에이드를 바라보았다.

    "크… 크헉…."

    부들거리며 일어나는, 아니, 일어나려고 하는 에이드. 그의 입에서 피가 한 줄기

    흘러나왔다. 내장을 엄청나게 상했다는 증거였다. 그런 상태에서도 아직 싸우려 한

    다는 것은…, 대단한 정신력을 가지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세라린은 냉소지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아직 덤빌 생각인가."

    "크윽…. 당연하지 않나…!!"

    고통이 꽤 극심한지, 에이드는 쓰러진 채로 신음하며 말했다. 세라린은 눈을 가늘

    게 떴다.

    "그래? 그럼 덤벼 봐라."

    세라린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아디즈, 니리아, 넷샤를 바라보았고, 다음 순간 니

    리아의 주문이 세라린을 향해 발동되었다.

    "파워 워드 킬 Power word kill!!"

    절대명령― 죽음. 시전자가 상정한 정신력·체력보다 그의 정신력·체력이 떨어지

    는 경우 단번에 즉사시켜버리는 9서클의 마법.(상정―이라 함은, 마법의 레벨에 따

    라 위력이 틀리기 때문이다) 동굴 안이라 미티어도 쓸 수 없는 지금의 상황에서 가

    능한 최고의 마법이었다.

    "겨우 그건가."

    하지만 그런 것이 마왕에게 통할 리는 없었다. 주문에 저항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은 채 저 마왕은 냉소지으며 니리아의 마법을 간단히 부수었고, 니리아는 그 모

    양에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그런…."

    세라린은 니리아의 반응이 마음에 든 듯 미소지었다. 세라린은 그들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이미 알고 있을 거다. 너희들은 내 상대가 되지 못해."

    "자만하지 마라, 마왕!"

    순간 아디즈가 브로드 소드를 휘두르며 세라린에게 달려들었다.

    뻐걱.

    "자만이라."

    어느새 달려든 아디즈를 되튕겨낸 세라린은 피식 웃으며 나동그라진 아디즈의 머

    리를 밟았다. 아디즈는 얼굴이 시뻘개진 채 세라린의 부츠에서 빠져나오려 했으나,

    세라린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강자의 여유를 두고 자만이라 하진 않지."

    "크…크윽!!"

    "특히나 그 능력에 현격한 차이를 보일 때는."

    넷샤는 그대로 선 채 세라린을 바라보았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가 지금 자신

    들을 가지고 놀고 있다는 것은. 만약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라도 자신들을 몰살시킬

    수 있으리라.

    그 때였다.

    "무슨 일입니까, 단장님… …?!!"

    무슨 일인가 하고 동굴에 들어온 성기사단원이었다. 그는 아디즈의 머리를 밟고선

    세라린을 보고, 또한 동굴 한편에 나동그라진 에이드를 보고 몹시 놀란 듯 더듬거

    렸다.

    "누…누… 누굽니까, 저…자는?!!"

    '이런.'

    넷샤는 속으로 혀를 찼다. 사람이 많은 것이 든든할 수도 있지만, 지금 같은 상황

    에서는 전혀 아니었다. 그저 죽는 사람의 수만 늘어날 뿐이다. 괜히….

    그러나, 세라린은 그들을 죽일 생각은 없는 듯했다. 세라린은 천천히 아디즈의 머

    리에서 발을 떼더니, 그대로 아디즈의 머리를 걷어찼다.

    "크욱!!"

    아디즈는 그대로 걷어차여 넷샤가 있는 곳으로 굴렀다.

    "아직, 덤빌 생각인가."

    세라린은 나직하게 말했다.

    "……."

    넷샤와 니리아는―에이드와 아디즈는 대답을 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단지 세

    라린을 바라본 채 침묵할 뿐이었다. 이윽고 세라린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가."

    그리고 곧이어, 세라린의 모습이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

    영문을 알 리 없는 니리아, 넷샤는 그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고, 세라린은 희

    미하게 냉소지었다.

    "생각같아서는 네놈들을 모두 죽이고도 싶지만. 어쨌든 일단 그것으로 되었고.

    내겐 할 일이 있다. ―빌어먹을 신탁 덕분에."

    세라린은 중얼거리듯 그렇게 말하더니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신탁?"

    넷샤는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물론 그에 답해 줄 존재는 이미 가버리고 난 후

    였지만서도.

    성기사단은 다음 날 아침이 밝는 대로 다시 수도 사이아스 시로 돌아갔다. 그 날

    있었던 마왕의 부활은, 혹 일어날지 모를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일반인에게

    는 비밀로 붙여졌다. 하긴, 어쩌면 당연한 결론이겠지만.

    "…마왕…인가."

    다하난은 무엇 때문에 이들에게 신탁을 내렸는지.

    그리고 세라린이 말한 신탁이란 또 무엇인지.

    그들은 아직 이에 대한 대답을 얻을 수 없었다.

    - To be continued... -

    ===========================================================================

    아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앞으로 한동안은 매일연재를

    할 생각입니다. 기대해 주시길.(뭘?)

    Neissy였습니다.

    번 호 : 6300 / 21135 등록일 : 2000년 04월 11일 00:27

    등록자 : NEISSY 조 회 : 380 건

    제 목 : [연재] ◈ 데스트로이아 ◈ # 10

    데스트로이아 DestroiA

    Fa-las de syent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