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식왕 클리어러-244화 (244/245)

# 244

독식왕 : 클리어러 244화

11

앰블레마는 계속해서 영혼들을 깨우는 작업에 몰두했다. 헤레디투스의 성 지하에는 엄청난 양의 영혼들이 잠을 자고 있다.

그것들은 실시간으로 계속 생성되고 있었으며 지난 왕위쟁탈전 이후로 전투력과 숫자 면에서 가공할 성장을 했다.

이것들은 물론 베그리프가 만든 것이다. 가상현실게임을 만든 것과 같은 능력. 역사 속의 인물을 형상화해 영혼을 불어넣는다.

물론 헤레디투스의 병사들은 반쪽짜리 영혼이 불어 넣어진 것으로 전투 이외의 사고는 할 수 없다. 그들은 오로지 적이라고 인식된 상대에게 칼을 휘두를 뿐이었다.

앰블레마는 이마의 땀을 훔치고 피식 웃음을 지었다.

“이 정도면 됐겠지?”

사실 전쟁에 필요한 숫자보다 훨씬 많은 영혼을 깨웠지만 철저하게 적을 이기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단 이쪽 세상이 확실하게 정리되어야 이면의 세상 정복에 집중할 수 있을 테니까.

그는 성 밖의 전경이 훤히 내다보이는 창 앞으로 다가갔다.

적들이 철저하게 농락당하는 장면을 상상하며 밖을 내다본 그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게 뭐야?”

농락당하는 것은 적들이 아니라 이쪽의 병력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장면을 연출하는데 가장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은 정체불명의 존재들이었다.

신비한 빛을 발하는 존재들이 팔을 휘젓고 숨결을 내뱉을 때마다 수십 구의 영혼이 불에 타버리거나 완전히 얼어붙어 버리거나 했다.

‘저것은…….’

앰블레마는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자기 머릿속 지식을 헤집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하나밖에 나오지 않았다.

“정령왕?”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모든 정령왕이 전부 전장에 나와 있었다.

“왜 저들이 여기에…….”

그리고 왜 오더 진영에 붙은 거지?

그녀가 추측할 수 있는 범위에 있는 것은 정령왕의 출현과 일루시안의 죽음이 연결되어 있을 거란 사실뿐이었다. 그리고 그 정도로는 사태를 바꿀 만한 아무런 단서도 되지 않는다.

“영혼을 더 깨워야 돼!”

그렇게 생각하고 몸을 돌렸지만 냉정히 판단컨대 아무리 많은 영혼을 깨워봤자 정령왕들의 상대는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단지 시간만 지연할 수 있을 뿐이다.

‘어떻게 해야…….’

우왕좌왕하던 그녀는 일단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헤레디투스를 찾아갔다. 하지만 그는 이미 침전에 있지 않았다. 기척을 쫓아 찾아간 곳은 이면의 세상으로 향하는 문 앞이었다. 그의 뒤에는 가장 강력한 영혼 20명이 줄지어 서 있었다.

헤레디투스가 돌아보았다.

“문을 열어라.”

“네? 하오나 지금 상황이…….”

대꾸를 하려던 앰블레마는 자신을 바라보는 헤레디투스의 눈빛에 움찔해서 입을 다물었다.

“지, 지금 열겠습니다!”

헤레디투스는 쉬는 동안 마나를 전부 충전한 듯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이면의 세상으로 건너가는 것밖에 없는 것 같아서 무슨 말을 해도 귀에 닿지 않을 것이 뻔했다.

애초에 오더 진영을 박살내는 것은 자신에게 맡겨진 책무.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가는 불똥이 튈지도 모른다.

걱정을 한가득 안고 있으면서도 앰블레마는 문을 열기 위한 주문을 읊었다.

그녀가 땀을 뻘뻘 흘리며 주문을 마쳤을 때, 문이 끼이익 묵중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응?”

앰블레마는 뭔가가 자신의 예상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이면의 세상으로 가는 문을 만드는 것은 처음이지만 자신이 기대했던 것과 마법의 흐름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문을 열고 나서야 깨닫다니…….’

그녀는 한 달 전에 베그리프가 용의 모습으로 문을 공격하던 장면을 떠올렸다. 아마 뭔가가 바뀐 것은 그때였을 것이다.

베그리프는 헤레디투스에게 날개가 찢기는 중에도 문을 공격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히 문을 부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었던 것이다.

앰블레마는 헤레디투스를 흘긋 보았다. 열린 문 안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에는 경이감이 깃들었다.

“수고했다. 앰블레마.”

이 상황에 뭔가가 잘못됐다는 말을 하면 필시 목이 달아날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지.’

앰블레마는 눈을 질끔 감았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목숨이다. 살아만 있으면 언제든 후일을 도모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스승이었던 일루시안에게 배운 것이기도 하다.

“왕이시여, 이제 길이 열렸나이다.”

고개를 숙인 앰블레마의 앞을 헤레디투스가 지나갔다. 개체 하나하나가 디아테타만큼이나 강력한 영혼 20명도 뒤따랐다.

그들의 모습이 전부 문 안으로 사라지자 앰블레마는 절망 섞인 마음으로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가장 먼저 떠오르는 방법은 도망을 치는 것이었다. 뭐가 어떻게 되든 간에 일단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니까.

그런데…….

그녀는 구조가 바뀐-정확히 어떻게 바뀐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문을 바라보며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렸다. 물론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는 존재이기는 하다.

“베그리프…….”

지난번 헤레디투스가 용으로 변한 베그리프를 죽였을 때 그녀의 남은 영혼을 자신이 갈무리했었다. 생명이 완전히 꺼지지 않았으면 다시 살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안고.

그리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일루시안의 제자인 자신밖에 없었다.

“서둘러야 돼.”

그녀는 목적지를 지하실로 잡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지하에는 병력으로 사용할 봉인된 영혼들 말고도 수백 명의 마법사의 영혼이 갈무리되어 있었다.

이것들은 지난번 베그리프가 문을 부술 때 희생되었던 자들의 영혼으로, 앰블레마는 그 영혼들을 이용해 베그리프를 부활시킬 요량이었다.

“제발 뜻대로 되어야 할 텐데.”

그녀는 마법사들의 영혼이 담긴 수정구들이 모아진 방 안에서 한 가닥 숨이 남은 베그리프의 잔흔을 꺼냈다.

집중력을 끌어올려 부활의 주문을 읊었다.

12

마지막 싸움이니만큼 나는 최대한 긴 휴식을 취했다. 이제 곧 끝이라고 생각하니까 어쩔 수 없이 그동안 겪은 일들이 하나하나 떠오르며 머릿속을 스쳐갔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은 게임 그 자체였다.

나 스스로를 게임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자평을 하는 처지이니 그것에 전혀 불만이 없지만, 문제는 그 게임이 이제 곧 끝난다는 사실이었다.

두 세상의 평화가 달린 일에 게임이 끝나 섭섭한 감정을 대입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모든 조건을 떼어놓고 생각했을 때 내 솔직한 감상은 그러했다.

‘끝나면 뭐하나?’

물론 이 게임이 끝나도 게임을 계속할 수 있다. 공략하지 않은 콘솔 게임과 아케이드 게임이 한 가득이며, 그동안 기술도 비약적인 발전을 하여 가상현실게임의 수준도 많이 높아졌다.

‘그래도 아쉬워.’

엄청나게 실감나고 재미있는 게임을 알아버렸는데 그런 것들로 대체가 될 리 없다.

‘나 진짜 뭐가 어떻게 된 놈인 듯.’

세계의 평화와 나 자신의 목숨이 걸린 싸움을 앞두고도 게임 생각을 하고 있다니.

뭐 나란 인간의 정체성과 게임이라는 두 글자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는 없지만.

진정한 덕업일치라고 할까?

슬슬 쉬는 것도 지루해진다 싶을 때쯤 몸을 일으켰다.

내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NPC들도 저마다 일어나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나는 동료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치고 마음을 나누었다. 어쩌면-아니기를 바라지만- 그들과 함께 전투다운 전투를 치르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훗.”

진짜 재밌겠네.

내가 걸어가자 문은 점점 더 활짝 열렸다. 나와 동료들은 전부 집어삼키고는 등 뒤에서 쿵 소리를 내며 닫혔다.

문 안의 세상은 황량한 벌판이었다.

새까만 하늘에 점점이 떠 있는 별. 이것과 비슷한 공간을 대자면 자연스럽게 ‘공간생성’ 스킬로 생성할 수 있는 아공간을 떠올릴 수 있다.

한 마디로 이 공간은 내가 사는 세상과 이계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가상의 공간인 셈이다. 그것은 곧 베그리프의 영향력이 미치는 장소라는 뜻도 된다.

‘그나저나 베그리프는 어떻게 됐을까?’

그녀의 비장한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면 이미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는 게 맞을 듯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고운 정이든 미운 정이든 그녀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으로 이어진 관계니까.

암젤을 비롯한 NPC들과의 관계와 비슷하면서도 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애초에 그녀가 없었다면 NPC들과도 만날 수 없었겠지.

공간의 맞은 편에는 같은 모양의 문이 있었다. 내가 들어온 문과 정확히 같은 크기와 모양을 가지고 있어서 마치 하나의 문을 둘로 쪼개놓은 것 같다.

그 쪼개짐으로 발생한 간극에 이 아공간을 집어넣은 것이다. 물론 나와 헤레디투스의 최후의 결전을 위해서.

혼자 생각한 것이지만 충분히 가능한 추측이었다.

조금 열어져 있던 반대편 문은 곧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문을 통해 이쪽으로 들어왔듯 반대쪽에서도 누군가가 들어오려 하는 것이다.

가장 앞장서서 나타난 것은 근엄한 표정에 황금색 갑옷을 입은 남자였다.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았지만 그가 누구라는 것은 굳이 정보창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헤레디투스.

드디어 왕이 등장한 것이다.

그 뒤로 께름칙한 연기를 풀풀 날리며 졸개 이십여 마리가 나타났다.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아우라가 보통이 아닌 만큼 이 싸움이 굉장히 힘들어지리라는 것을 예견했다.

나와 NPC들을 본 헤레디투스가 흠칫 걸음을 멈추었다. 주위를 둘러보는 품새로 보아 나와는 달리 그는 문 안이 이런 장소로 이어질 줄 전혀 몰랐던 것 같았다.

과묵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뭔가를 생각하던 그는 약간의 체념이 담긴 웃음을 흘렸다.

“베그리프가 한 일이로군.”

그가 하는 말은 정확하게 번역이 되어 내 귀에 들렸다.

이계인이나 일부 몬스터와 말이 통하는 것은 종종 있었던 일이기 때문에 굳이 호기심을 가지는 않기로 했다.

대신 그가 익숙한 이름을 말하기에 그녀의 안부를 물었다.

“베그리프는 어떻게 됐지?”

흥미롭다는 얼굴로 나를 보던 헤레디투스가 대답했다.

“죽었다.”

예상했던 바이지만 직접 들으니 제법 충격이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던 것보다 화가 났다.

“네가 죽인 것 맞지?”

“그게 너에게 중요한 일이냐? 그래, 내가 죽였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지.”

헤레디투스의 얼굴에 회한이 담겼다.

“내가 죽였지만 실질은 네가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 네가 없었다면 베그리프가 그렇게 될 일이 없었을 테니까.”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것인지.

아무튼 우리 둘 모두 베그리프와 관련이 있고 이 싸움을 숙명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만은 알겠다.

이 싸움의 의미는 간단하게 정의할 수 있다.

ALL OR NOTHING!

누가 먼저랄 것도 헤레디투스와 나는 각자의 무기를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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