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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왕 클리어러-243화 (243/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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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식왕 : 클리어러 243화

    10

    로치온은 절망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내심 디아테타가 죽고 헤레디투스만 남겨놓았을 때 이제 대부분의 일이 이루어졌다고 믿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아무리 헤레디투스가 왕이라고는 하지만 그의 영지와 오더 진영이 차지한 영지는 크게 차이가 난다. 카오스 군주 밑에 있었던 병졸들도 최후의 희망까지 사라진 뒤에는 규율이 잡히기 시작했으니 병력 면에서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

    더구나 오더 진영에는 우수한 인재들도 차고 넘치도록 많았다. 아무리 보수적으로 생각을 하더라도 적어도 51퍼센트의 승산은 있다고 믿었다.

    ‘이렇게 강력할 줄이야…….’

    그도 오래전에 헤레디투스의 병졸들과 직접 칼을 맞댄 적이 있었다. 그때 자신은 아직 어렸었고 주요 병력으로 인정을 받지 못했기에 후방에서 싸움을 거들었다.

    물론 그때도 헤레디투스의 병사들은 강했다. 인간도 몬스터도 아닌 기괴한 존재들이 후퇴를 모르고 전력으로 덤벼드는 것에 기겁을 했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어.’

    그동안 헤레디투스를 쓰러뜨리는 것만 생각했던 자신이 왜 그의 병졸들과 싸우는 이미지를 그려보지 않았겠는가?

    단순한 기억이 왜곡이 아니었다. 최소한 두세 배는 더 강해진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병력의 숫자도 그 이상으로 불어났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물론 불가사의한 힘의 도움을 받은 정도로 치자면 오더 진영이 훨씬 더하지만, 그것은 논외로 해야 한다. 같은 일이 오더와 카오스 진영 양쪽에서 동시에 일어날 수는 없다.

    ‘그래도 직접 보았으니 인정을 안 할 수가 없지.’

    처음에 팽팽하던 전세는 시간이 갈수록 명백히 이쪽에 불리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후퇴하는 만큼 더 많은 헤레디투스의 병력이 밀고 나온다.

    마치 멈추지 않고 뿜어나오는 폭포수처럼 병력의 생성은 멈출 줄을 몰랐다.

    ‘적어도 조성오가 합류할 때까지는…….’

    지금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조성오밖에 없다. 그가 온다면 이 지긋지긋한 싸움을 뒤집을 수 있는 결정적 변수가 되리라. 이제껏 그는 한 번도 기대를 저버린 적이 없다. 오히려 상상 이상의 일을 해내어 아군마저 어안이 벙벙하게 만들었었지.

    로치온은 힘든 싸움을 하는 중에도 조성오를 떠올리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느꼈다.

    ‘염치없지만 조성오, 부탁한다! 조금이라도 빨리 와다오!’

    그때였다. 자신의 옆에서 함께 싸우고 있던 파라얀이 소리쳤다.

    “로치온! 저기를 봐!”

    로치온은 자기 몸을 붙잡고 늘어지는 괴물의 심장에 검을 쑤셔 넣고는 파라얀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것은 북쪽의 허공이었다. 그곳의 빛깔이 명백하게 다른 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마치 하늘 전체가 불에 타는 것처럼 붉은색이 되었다.

    전류가 튀는 것처럼 파지직거리는 진동 뒤로 공간이 이지러졌다. 그리고 거대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 위에 두 개의 뿔이 돋아난 온몸이 타는 듯이 붉은 근육질의 신형.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아우라가 절로 몸을 움츠리게 만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방향의 하늘은 새파란 색으로 물들었다.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른 방법으로 허공을 찢고 나온 것은 백의를 입은 고고한 인상의 여인이었다. 나이와 인종을 가늠할 수 없는 그녀에게도 절로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는 아우라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연이어서 하늘이 각자 다른 색으로 물들어갔다.

    “저것은 설마…….”

    “정령왕들이야.”

    파라얀은 흔들리는 동공으로 간단하게 정답을 이야기했다. 그녀 스스로도 정령왕의 존재를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적어도 인물에 대한 묘사는 많은 책들을 통해 접했다.

    그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다른 누구도 아닌 정령왕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이 세상에-그리고 다른 세상을 통틀어서도-이 정도 위압감을 자아내는 존재는 없다.

    “정령왕들이 왜…….”

    로치온이 중얼거리자마자 뿔 달린 붉은 몸통의 남자가 근엄하게 소리쳤다.

    “오더의 군졸들아. 우리 정령왕들이 너희를 도와주러 왔다!”

    11

    S급 던전의 마지막 층에서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엄청난 숫자의 몬스터가 밀려 나왔다. 단순히 숫자만 많은 것이 아니다. 각 개체가 최소한 B급 던전의 던전 마스터 수준으로 강력하다.

    덕분에 지긋지긋함의 강도가 이전 층보다 훨씬 높았다. 다른 층에서는 하나씩밖에 오르지 않았던 레벨이 전투를 벌이는 동안 2나 올랐을 정도이다.

    그리고 영원할 것 같은 싸움이 끝난 뒤에는 특유의 분위기가 공간을 뒤덮었다.

    “헥헥, 이제 나오려나보다옹.”

    암젤의 말대로 이제 드디어 던전 마스터가 등장할 차례였다. 엄청 힘들고 잠도 제대로 못 잤지만, 이제 마지막 싸움이라고 생각하자 몸속에서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다.

    “어떤 놈인지 낯짝이나 보자.”

    과연 S급 던전의 마스터는 얼마나 무시무시한 놈일런지!

    자욱한 안개 뒤에 뚱뚱한 체구를 가진 몬스터 하나가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놈이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히는 것이, 보통 능력을 가진 몬스터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뿐만이 아니었다.

    ‘왠지 익숙한데?’

    단순히 몬스터의 그림자에서 추측할 수 있는 모습만이 아니라 그가 흘리고 있는 마나에서도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이걸 뭐라고 하더라? 데 자부?’

    마치 과거에 같은 경험을 여러 번 반복한 것 같은 느낌.

    “후후후후……. 어리석은 중생들이여. 내게 반기를 드는 자들에게는 오로지 죽음만이 있을 뿐인 것을…….”

    어라? 한국어를 한다?

    이렇게 언어가 통하는 것은 가상현실게임에서와 같은 현상이었다. 그때는 종족을 불문하고 모두 말이 통했었으니까. 일종의 유저 편의성이라고 할까?

    목소리를 들으니 기억이 더 뚜렷해졌다.

    “너는 설마…….”

    내 손안의 백옥보도 나 이놈 안다면서 우우웅 진동을 해댔다.

    그렇겠지. 놈은 너에게도 가장 맛있는 식사감이었을 테니.

    던전 마스터가 안개를 뚫고 나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것으로 내 예상과 현실이 완벽히 맞아떨어지게 되었다.

    “주인님. 저놈 바르트룸 아니냐옹?”

    “응. 맞아. 그놈이야.”

    바르트룸은 가상현실게임에서 최종보스였다. 나는 놈을 여러 번 반복해서 쓰러뜨린 바 있다. 놈이 두렵게 느껴진 것은 처음 몇 회의 공략 때뿐이다.

    회차를 거듭할수록 내 레벨은 상승하는 것에 비해 놈의 수준은 그대로였기 때문에 점점 쓰러뜨리는 게 쉬워졌다.

    “하하! 절묘하네.”

    뭔가 김이 팍 새는 느낌이다. 물론 바르트룸이 약한 것은 아니지만 전력을 가늠할 수 없는 미지의 몬스터와 싸우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아니, 지금까지 힘들었던 던전 공략에 비하면 어처구니가 없을 만큼 쉬운 보스이다. 왜냐면 나는 놈의 공략법을 훤히 알고 있으니까.

    레벨도 가상현실게임 때보다 높겠다, 동료들도 전부 내 옆에 있는 풀전력 상태인데, 두려울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뭘 중얼거리고 있는 게냐? 하찮은 것들이 하찮은 말을 하면서 시시덕거리는구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무기를 내려놓고 엎드려 빈다면 적어도 편하게 죽게 해주마.”

    “닥쳐, 바보야.”

    “……뭐?”

    정지화면처럼 벙 쩌 있는 던전 마스터를 향해 NPC들이 한 마디씩 했다.

    “나는 지금 몹시 피곤하다옹. 고로 너는 편하게 죽지 못할 거다옹.”

    “못생긴 놈이 뭐라는 거야?”

    “네가 이 던전의 주인이라고? 배보다 배꼽이 크다는 게 이런 거구나.”

    “정말 주제를 모르는 건 저쪽에서나 이쪽에서나 똑같네.”

    “콱, 모가지를 비틀어버릴까 보다.”

    NPC들이 돌아가며 한마디씩 하는 동안 바르트룸의 표정에는 이게 아닌데 하는 느낌이 강해졌다. 어쩐지 등을 돌려 이곳을 떠나고 싶어한다는 느낌도 받았다.

    그래도 명색이 S급 던전 마스터인데 싸우지도 않고 가버린다면 말이 안 되지.

    정신을 차린 바르트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노~~~~옴!!!”

    ***

    “사, 살려주십시오.”

    역시나 바르트룸의 전력은 특별할 것이 없었다. 가상현실게임에서나 이곳에서나 그게 그거다. 고로 S급 던전을 공략하는 동안 악에 바친 나와 NPC들이 철저하게 그를 유린했다.

    성격도 변한 것이 없어서 큰소리를 떵떵 치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금세 비굴한 모습을 보이며 무릎을 꿇었다.

    “미안하지만 너는 우리 관계에서는 봐주고 말고 할 것이 없어.”

    바르트룸은 가상현실게임에서 최종보스였다. 그를 죽여야 엔딩을 볼 수 있다는 뜻. 다른 피라미들이야 안 죽여도 스토리가 진행되지만 최종보스는 그럴 수가 없다. 그것이 끝판왕의 딜레마이자 비애라고 할까?

    물론 현실 게임에서 바르트룸은 끝판왕이 아니지만 운명은 바뀌지 않는다. 나는 반드시 이 S급 던전을 공략하고 퀘스트를 완수해야 하니까.

    푹-

    백옥보가 바르트룸의 심장을 꿰뚫었다. 마나가 꿀렁꿀렁 쏟아져 나와 검신으로 흡수된다.

    나는 별로 정이 안 가기는 하지만 바르트룸의 전투력만큼은 높이 산다. 고로 놈을 소환수로 만들었다.

    ‘가상현실게임 끝판왕이었던 놈을 소환수로 만들다니, 재밌네.’

    만약 같은 것을 가상현실게임에서 할 수 있었다면 바르트룸 대 바르트룸의 싸움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면 밸런스와 스토리가 심각하게 붕괴되기 때문에 있을 수 없는 설정이지만.

    [S급 던전을 공략했습니다!]

    귓가에 낯익은 음악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게는 이 음악이 아주 익숙하다. 왜냐하면 바로 가상현실게임의 엔딩곡이었으니까.

    모든 페이즈가 완료되어 시스템 상 마련된 퀘스트는 다 공략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오는 엔딩곡인 모양이지만 당연히 내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이 게임의 최종보스는 따로 있으니까.

    바르트룸이 죽자 안개가 싹 걷히고 시야가 밝아졌다.

    그러자 바르트룸이 걸어왔던 장소에 무엇이 있는지 확실하게 보였다.

    거대한 문.

    막대한 양의 마나가 뿜어져 나오고, 그에 못지않은 마기가 넘실거린다. 왜 이 장소에 이런 것이 나타났는지 아무런 설명이 없었지만 그래도 알 수 있었다.

    이것이 최종보스에게 향하는 문이라는 것을.

    “근데 어떻게 여는 거지?”

    그렇게 중얼거린 찰나 끼이익 소리가 나며 문이 약간 열렸다.

    “음…….”

    나는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며칠에 걸친 S급 던전 공략으로 모두 지쳐있었다.

    “좀 쉬었다가 갈까?”

    다행히 아이템도 다 소모하지 않고 5분의 1 정도가 남았다. 이 정도면 최종보스와 싸우는데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이제까지 걸어온 긴 싸움의 종지부가 될 최종배틀에 앞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암젤이 말없이 다가와 내 옆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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