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2
독식왕 : 클리어러 242화
7
자고보르는 일루시안을 죽인 뒤에 자기 안에서 뭔가 심정적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느꼈다.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강렬한 손맛이라거나 짜릿한 쾌감이라고도 할 수 있을 터.
그는 이런 기분을 느껴본 것이 실로 굉장히 오랜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정령 간의 대결, 더 나아가 정령계 이외의 세상과 전쟁을 치를 시기에는 항상 느꼈던 기분이기도 하다.
그것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이질적인 감정을 느끼게 했다.
‘내가 뭘 하고 있는 것이지?’
평화는 중요하다. 중요한 차원을 넘어서서 필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에 그 많은 전쟁을 치른 것도 결국 평화를 얻기 위한 것이었으니까.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뭔가를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평화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너무 소극적으로 지내온 것은 아닐까?
과거 너무 많은 전쟁을 치른 탓에 그 반동으로 지금은 극적으로 조용한 삶에 집착하고 있다. 다른 세상과 정령계를 완벽히 분리하고 그 대가로 영원한 평화를 손에 넣는 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 분리가 생각보다 완벽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번 일루시안의 사건을 통해 드러났다.
원래 정령은 폐쇄적인 삶을 선호하지 않는다. 지금도 많은 정령들이 이곳 세상에만 만족하지 않고 다른 세상에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그것은 정령왕들도 마찬가지여서 알게 모르게 답답함이 쌓여있었다. 하지만 답답하다는 이유만으로 평화를 깨고 다른 세상과 이어지는 방법을 택하는 것은 위험하다.
오직 그 이유만이라면 위험하겠지만 만약 다른 명분이 더 있다면…….
자고보르는 이 문제에 대해 신중하게 고민을 했다.
실은 최근 들어 잠재의식 속에서 잡힐 듯 말 듯 한 생각이 계속 떠돌기도 했다. 그 모호한 기분에 답답함을 느끼던 차 일루시안을 죽이면서 깨달았다.
‘이대로 있어서는 안 돼.’
평화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정적인 생활에 집착한다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평화를 지키는 길은 수비적인 자세로만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자유를 원한다면 더욱 적극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최근 조성오에게 힘을 빌려주면서 느꼈던 해방감. 그것의 정체는 그동안 쌓인 정적인 생활에 대한 불만감의 표출이었다.
조성오는 자기 세상, 그리고 이면 세상의 평화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동료들이 있다지만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불가사의할 정도의 성장과 집념으로 이루어내려고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일의 성공시키기 위한 8부 능선을 넘었다.
“부끄러운 일이야…….”
일개 인간의 힘으로 여기까지 이루어내는 동안 정령왕인 자신은 딱 잘라 선을 긋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다른 세상에 균열이 일어나면 이곳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그는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만약 조성오가 전쟁에서 승리하여 두 세상의 왕이 된다면. 그리고 그 왕이 자기들 정령왕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한다면, 지금까지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자유와 평화를 약속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비롯한 정령왕들은 그것을 이루기 위해 도움을 줘야 할 의무가 있었다. 지금처럼 멀찍이서 적은 힘만 보태주는 형태가 아니라 보다 적극적인 도움을.
불의 정령왕 자고보르는 전령들을 모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너희들은 각자 정령왕들을 찾아가 나의 메시지를 전해라!”
전령들은 진지하게 왕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왕이 말을 끝내자, 각자 방향을 잡고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8
“우와, 지긋지긋하다옹.”
암젤은 몬스터의 피로 더럽혀진 털을 정리하면서 투덜거렸다.
나 역시 그녀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다. 벌써 며칠째 바깥에 나가지 못하고 던전만 공략하고 있다.
몬스터 사냥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하드코어한 난도의 던전을, 그것도 몸을 씻지도, 편하게 잠을 자지도 못하는 상태로 공략하는 것은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공략은 6층까지 이루어졌고, 당연하다는 듯 위로 올라갈수록 등장하는 몬스터의 수준이 높아지고 공략 시간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레벨 업이 거의 한 층에 한 번씩 이루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층수에 따른 던전의 난도 상승이 더 빠른 느낌이라 조금도 싸우는 것이 쉬워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도 버겁다는 느낌이 전혀 없다.’
어렵고 지겨울 뿐이지, 공략을 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것은 베그리프의 마지막 선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후의 싸움에 앞서 마지막으로 레벨 업을 시켜주려는.
7층으로 올라가기 전에 상황을 점검하기 전에 로치온에게 전언을 보냈다.
“로치온, 그곳 상황은 어떻게 돼가고 있어?”
하지만 전언을 보내고도 한참이나 응답이 없었다. 다소 엄격한 성격의 로치온이라면 자는 중에도 내 목소리에 응답할 텐데.
“로치온? 로치온!”
몇 번 더 불러봐도 대답이 없어서 이번엔 유진이에게 전언을 보냈다.
“유진아. 거기 있니?”
-아! 성오야!
“로치온은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던데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말도 마! 헤레디투스 병사들이 성문을 열고 먼저 공격을 해왔어.
“뭐? 진짜?”
-로치온은 최전방에서 병력을 지휘하느라 정신이 없을 거야. 우리는 후방을 맡아서 그나마 여유가 있는 거고.
“드디어 시작됐구나……. 놈들의 수준은 어느 정도야?”
-나는 멀리서 놈들이 새까맣게 밀려오는 것만 봤어. 이런 비유를 하기는 좀 그렇지만 마치 스펙터클한 판타지 영화를 보는 것 같았어. 멀리서도 찌릿찌릿 몸이 떨릴 정도야. 아마 수천의 병력이 전부 던전 마스터급일 거야.
“아…….”
나와 NPC들만이 아니라 이계의 아군들도 던전 마스터급 몬스터들과 싸움을 시작했다. 아마 그쪽이 훨씬 어지럽고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을 것이다.
“헤레디투스는 어때? 직접 나왔어?”
-아니, 아직 코빼기도 보이고 있지 않아. 아마 자기 병사들만으로도 우리를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그것참. 심각하네…….”
내가 걱정으로 말을 못 잇고 있는 사이, 로치온으로부터 드디어 전언이 들려왔다.
-조성오! 미안하다. 정신이 없어서 이제야 전언을 보낸다!
그의 숨은 매우 거칠었으며 얼핏 들어도 평정을 가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었다며? 상황은 어때?”
-저쪽은 말도 안 되게 강하지만, 우리 전력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시간이 더 지나면 어떻게 될지 몰라. 전쟁이란 언제나 공격하는 쪽보다 방어하는 쪽이 유리하니까. 놈들은 땅에서 솟는 것처럼 죽여도 죽여도 끊임없이 몰려나온다.
“끊임없이 몰려나온다고?”
-그래. 하지만 이쪽은 우리가 어떻게든 할 테니 걱정하지 마라. 너는 네가 할 일에 집중해! 그것이 우리가 승리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응. 최대한 빨리 던전 공략을 끝내고 우리도 그쪽으로 합류할게.”
나는 전언을 끝내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동료들을 둘러보았다. 자잘한 상처를 입고 그것을 치유하고 있는 NPC들이 있지만 대체로 멀쩡하다. 아직 소모성 아이템들도 3분의 2 이상이 남아있었다.
힘들고 지겹기는 하지만 불평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리고 짐작대로라면 고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 매 층마다 데미 마스터가 등장하고 있지만, 곧 진짜 던전 마스터와 싸울 수 있게 될 터.
나는 스트레칭을 몇 차례 한 뒤 동료들에게 말했다.
“자, 이제 올라가자!”
9
던전 공략은 이후로도 3일 동안 계속되었다. 위로 올라갈수록 난도는 착실히 높아졌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정적인 위기를 맞지 않고 각층을 돌파할 수 있었다.
그리고 10충.
이곳은 들어설 때부터 분위기가 다른 곳과 달랐다. 나는 특유의 감각으로 코어의 위치가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적어도 코어는 있다는 거네.’
귀환서와 상점은 없지만 코어는 있다.
다른 던전과 다른 점이 있으면서도 실질은 같다. 아마 귀환서-귀환석도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와 상점이 없는 것은 난도가 높다는 것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아무튼.
“여기가 마지막인 것 같지?”
나보다 감이 좋은 묘족에게 물어보자 그녀가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옹. 여기가 꼭대기다옹.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다옹. 빨리 샤워하고 싶다옹.”
“나도 그래.”
10층까지 오는 동안 세이프 존에서 로치온에게 전언을 보내 상황을 물었다. 어지간히 여유가 없는지, 그의 대답은 항상 늦었다. 그럴 때는 유진이에게 전언을 보내 로치온이 어떤 상태인지 묻기도 했다.
전쟁은 처음에 5 대 5로 팽팽한 양상이었지만 로치온의 예상대로 시간이 가며 오더 진영에 불리하게 흘러갔다.
헤레디투스의 성에서 그 괴물들-로치온은 그들이 영혼이 없는 꼭두각시 같다고 했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것이 분명한데, 너무 고차원적인 술식이라 어떤 마법사도 흉내낼 수 없는 경지라고 한다-은 쉴 새 없이 밀려 나왔다.
분명 성안에 제조시설 따위가 있어서 괴물들을 끊임없이 생산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9층에서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는 거의 7 대 3까지 전황이 기울었다. 다행이라면 아직 헤레디투스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정도일까? 그가 등장한다면 아마 전세는 한 번에 결정될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말 그대로 절체절명, 절박의 한계에 이른 상황!
다행이라면 이쪽도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10층을 마저 공략한다면 이계로 건너가 오더 진영에 합류할 수 있을 것이다.
긴 싸움 끝에 또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게 절망적이기는 하지만 그런 것을 불평할 때가 아니지.
원래 게임의 최종 단계는 다소 절망적인 난도일 필요가 있다. 그래야 여운이 오래간다고 할까? 물론 이 상황에 여운 운운할 정도로 내가 정신 나간 놈은 아니지만.
‘헤레디투스는 대체 왜 틀어박혀 있는 것일까?’
자기가 나서면 싸움을 쉽게 끝낼 수 있을 텐데 가만히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필경 어떤 이유가 있을 터.
그리고 그것은 이쪽 세상과 연관이 있을 거라고 여겨졌다. 아마도 이계의 전쟁과 이곳으로 건너오는 것이 병존할 수 없는 어떤 이유 같은 게 있겠지.
‘놈과 싸우는 것은 어차피 나!’
이 게임을 만든 베그리프는 반드시 그렇게 되도록 설계했을 것이다.
내 불타는 의욕을 감지했는지 손안의 백옥보가 웅웅 소리를 내며 진동했다.
‘일단은 이곳부터!’
나는 선봉에 서서 S급 던전 최상층 안으로 진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