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1
독식왕 : 클리어러 241화
4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던전 한 층의 면적이 생각만큼 크지 않다는 것이었다. 층수도 그렇지만 딱 내가 처음에 공략했던 악마의 산 던전만큼의 크기이다. 이 정도 규모라면 지금 내 수준에는 하루 이틀 만에 전체를 공략할 수 있을 텐데, 당연히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리 넓지 않은 던전 한 층을 공략하는 데 한나절의 시간이 걸렸으니까.
그리고 이 층을 지나오며 나는 미국 게이머들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은 잔해를 직접 목격했다.
중간중간 시체가 녹아버리고 남은 옷가지가 발견된 것이다. 혈액을 포함한 인체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사라지기 때문에 남은 것은 장비와 무기뿐이었다.
그것의 수준만 봐도 최정예 게이머들이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서 들어왔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곳에서 전멸했다.
기가 막히게도 갖은 고생 끝에 도달한 1층 끄트머리에서 우리는 데미 마스터를 마주쳤다. 놈은 A급 던전의 던전 마스터보다 조금 더 강한 수준이었다.
우리 전에 이 던전에 들어왔던 미국 게이머들의 마지막 옷가지가 남아있는 것도 이 지점이었다. 이제 끝났다 하고 생각했는데 막강한 데미 마스터가 등장하니 숨이 턱 하고 막혔겠지.
산전수전 다 겪은 게이머라고 해도 이 정도 상황이 되면 포기하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데미 마스터에게 살해당한 최후의 다섯 명은 세이프 존을 불과 몇 미터 앞에 두고 죽었다는 사실이 원통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을 것이다. 이곳 세이프 존에는 귀환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쩌면 그 정도 사실은 입구에 귀환서가 없었다는 점을 생각해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경험이 많은 게이머라고 해도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사실은 간과할 수 있다.
애초에 OG 이외에 누가 들어왔든 전멸할 수밖에 없게 되어있었다. 이곳은.
“너무하네.”
나와 OG 멤버들은 녹초가 되어 주저앉았다. 그나마 세이프 존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 고마울 지경이다.
‘당연하다는 듯이 상점도 없네.’
힘든 공략이기는 했지만-안 오르던 레벨도 하나 올랐다.-아이템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내 인벤토리는 물론이거니와 멤버들의 인벤토리까지 아이템으로 꽉꽉 채워 가지고 왔다.
나는 기본적으로 게임을 할 때 최종공략을 앞두고는 가지고 있는 모든 아이템과 장비를 몰빵하는 습관이 있었다. 게임의 최대 난관은 최종 스테이지와 보스를 공략하는 것이며, 여기서 발목이 잡혀 엔딩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특히나 높은 난도가 미덕처럼 여겨지던 과거의 게임들은 더욱 그런 경향이 있다.
나는 이제껏 플레이해온 게임을 끝내기 아쉬워서 감성에 젖는 타입이 아니다. 오히려 게임의 중후반에 이르면 이미 다음에 할 게임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는 타입이다.
그래서 가능한 한 최종 스테이지는 한 번에 공략해 버리자는 게 내 기본 방침인 것이다.
그런 사고방식이 이번에 유효하게 작용했다.
나조차도 이곳에 귀환서-귀환서가 없으니 귀환석도 당연히 작동하지 않을 터-와 상점이 없다는 것을 예측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인벤토리를 소모성 아이템으로 꽉꽉 채워온 것이 주효했던 셈이다.
‘이래서 사람은 경험이 중요해.’
하하.
그나저나 이 던전은 장난이 아니다. 다 공략할 때까지 밖에 나갈 수도 없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엄마랑 누나를 만나서 밥이나 한 끼 먹을 걸 그랬다.
아마도 바깥사람들은 우리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전원 사망했으리라고 예상할 것이다.
어쩌면 세계 최상의 길드 멤버들조차 공략하지 못하는 던전이 등장했다는 사실 때문에 세상이 패닉에 휩싸일지도 모른다.
“쳇.”
바깥 사정이야 내가 알 바 아니지.
공략에나 집중하자. 나는 물론이거니와 NPC 중 누구 하나도 죽어서는 안 된다.
5
“완성되었습니다!”
앰블레마는 완성된 문 앞에 서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의 입은 벌어지다 못해 귀 끝에 걸릴 지경이었다.
그녀는 숙원이었던 마법의 문을 완성한 것 이외에도 최근 기절할 만큼 기분 좋은 일을 겪었다.
어떤 사정이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일루시안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졌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쉽게 일어날 수 없는 일로, 이렇게 완벽하게 연결성이 해소된 경우는 한 가지 답밖에 내릴 수가 없다.
‘놈이 죽었어.’
일루시안과 자신의 관계는 여타의 스승, 제자 간의 관계와 다르다.
자신은 마법과 정령술을 동시에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그의 명성을 익히 들었고, 언제나 지향점을 그와 같은 경지에 오르는 것으로 잡았었다.
그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는 마치 신의 계시를 받은 기분이었다.
스스로 오랫동안 풀지 못했던 공식-그리고 아마 혼자 힘으로는 평생 풀지 못했을 공식-의 답들을 일루시안은 너무 쉽게 제시해 주었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 머지않아 그가 고집불통에 뼛속까지 이기적이고 남에게 이익이 되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일루시안은 천천히 자신의 마나를 주입해 저주를 심어놓았고, 목숨을 저당 잡힌 상태에서 그가 원하는 대로 꼭두각시처럼 움직여야 했다.
물론 그의 말대로 움직인 덕분에 이전이라면 꿈도 꾸지 못했을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왕의 직속 마법사로 승급하여 절대적인 권력을 누렸고, 수천 명의 마법사들을 수족처럼 움직이는 쾌감도 얻었다.
금단의 영역이라고 일컬어지는 많은 마법과 정령술을 터득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도 자유가 없으면 소용이 없다.
더구나 일루시안은 자신에게 영생의 약을 만들라고 명령을 했다. 그것이 완성되면 일루시안은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며, 자신은 아마 명분뿐인 제자로-실질은 노예 상태로 평생을 보내야 했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죽은 다음에도 영혼만 되살려 노예로 부렸을지 모른다. 그라면 그 정도 일은 손쉬웠을 테니까.
생각만 해도 끔찍한 악마의 구속에서 갑자기 해방되었다!
저주의 낙인이 지워진 지금은 일루시안이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해도 다시 같은 주문이 통하지 않는다.
‘아니, 그럴 수조차 없겠지.’
그는 아마 죽었을 테니까.
그게 지금 앰블레마가 기쁨을 느끼는 가장 큰 요인이었다. 문의 완성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기쁨이다.
“음…….”
앰블레마의 보고를 받고 완성된 문을 보러온 헤레디투스는 짧은 침음을 흘렸다. 그는 최근 하루라도 빨리 문을 완성하기 위해 마나를 너무 소모한 탓에-그리고 스스로는 모르고 있었지만, 영생의 약을 만드는 데 쓰이는 추가적인 마나도 뽑아내야 했다.-매우 지친 상태였다.
퀭한 눈과 홀쭉해진 뺨을 한 왕은 그런 얼굴로도 미소를 지었다.
“고생했다, 앰블레마.”
“황송합니다. 왕이시여!”
“나는 며칠 휴식을 취한 뒤 곧바로 이면의 세상으로 건너가겠다. 너는 내가 잠을 잘 동안 전쟁을 할 준비를 해라.”
“아……. 전쟁 말입니까?”
“그래. ‘그것’을 풀어라.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헤레디투스의 ‘그것’을 풀라는 말에 앰블레마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등을 돌려 사라지는 왕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그렇겠지.’
문이 완성되었다고 모든 게 끝난 것이 아니다. 이제 본격적인 전쟁의 시작이다. 이면의 세상을 정복하는 것뿐 아니라 코앞까지 닥친 오더 진영을 박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이런 상황에도 최후까지 여유를 갖게 할 수 있었던 이유인 ‘그것’을 풀어놓아야 했다.
“안쓰럽군.”
헤레디투스는 왕위쟁탈전에서 베그리프의 도움을 받아 승리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베그리프가 만든 병사들의 도움을 받아 왕위를 쟁취했다.
베그리프의 병력은 그동안 고이 잠을 자고 있었다. 그것들은 이후에도 계속 증식되었으며, 몇 배나 더 강해졌다.
‘지옥이 펼쳐질 거야.’
앰블레마는 눈을 빛내며 마법의 문을 바라보았다.
‘그 뒤에는 평화가 오겠지. 영원한 평화가…….’
영생의 약은 이제 곧 완성을 앞두고 있다. 일루시안이 죽은 지금 그것을 취할 사람은 자신 말고는 없다.
“크크크.”
6
S급 던전은 3층까지 공략을 하는 데 이틀이 걸렸다. 한 발만 삐끗하면 끝장이 날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한 층을 공략할 때마다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
나중을 위해서라며 아이템을 아낄 여지도 없다. 어디까지나 이번이 마지막 싸움! 물론 이계왕을 물리쳐야 하는 숙명이 있기는 하지만 출구가 없는 던전에서 뒷일을 생각했다가는 당장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
좋은 점이라면 나는 물론이거니와 NPC들도 모두 날카로운 전투모드에 들어갔다는 점이다. 우리가 가상현실게임에서 10년 동안 했던 일은 대부분 몬스터와의 싸움이었다.
당연히 이 방면에 통달할 수밖에 없고, 서로 눈빛만으로 호흡을 맞출 수 있을 만큼 팀워크가 뛰어나다.
최근에 합류한 동료들이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좋든 싫든 이 출구 없는 빡센 공략은 도움이 되고 있었다.
나는 이곳에 귀환서와 상점이 없다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으므로 당연히 충분한 음식을 가지고 오지 못했다. 만약 신중한 성격의 수보타가 있었더라면 으식을 넉넉히 가져왔을지도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여기 있는 동료 중에는 그런 타입의 NPC가 없었다.
한가지 다행이라면 동료 중 미식가인 체르닐라라는 NPC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의 캐릭터는 죽기 전에 세상의 진미를 모조리 맛보겠다는 집념에 기인한다.
그녀는 세상의-물론 가상현실게임 기준으로-모든 요리법을 알고 있으며, 맛없는 음식을 먹게 될 경우에 대비해 각종 조미료를 항상 구비하고 있다.
그녀의 도움으로 우리는 몬스터의 사체를 이용해 요리를 했다. 물론 죽은 몬스터는 시간이 지나면 녹아서 없어지지만, 사체의 일부를 아이템의 개념으로 습득하면 요리를 해도 사라지지 않았다.
수보타도 몬스터 요리에 일가견이 있지만, 체르닐라가 가진 지식이 더 방대하다. 다만 그녀는 요리 스킬은 그리 뛰어나지 않기 때문에 만약 두 사람이 만난다면 좋은 콤비를 이룰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이라면 어떤 요리대회라도 아주 손쉽게 우승할 것이다. 두 명이 요식업을 한다면 전 세계 사람들이 미슐랭급 맛을 가진 패스트푸드를 맛볼 수 있겠지.
내게는 그 그림이 마치 요리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는 것처럼 그려졌다.
3층 세이프 존에서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로치온에게서 전언이 왔다.
-조성오, 나다.
“응. 듣고 있어.”
-목소리가 지친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는 거냐?
“아, 아직 너한테 말 안 했구나. S급 던전에는 출구가 없어. 그래서 꼼짝없이 여기 갇혀서 계속 몬스터 사냥만 해야 하는 처지야.”
-뭐? 그럼 위험한 것 아니야? 우리가 도와줄 일이 없을까?
“도와주면 고맙겠지만 그럴 수 없어. 하지만 괜찮아.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면 익숙하니까. 그보다 할 말이 있어서 연락한 거 맞지?”
-음, 우리는 지금 최후의 싸움을 위해 병력을 한 데 모으고 있어. 카오스 군주들이 모조리 제거된 지금, 그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다.
“아, 그렇군. 이쯤 되면 헤레디투스도 가만있지는 않겠지. 그쪽에서 움직이기 전에 먼저 준비를 해두겠다는 거지?”
-맞아. 네가 S급 던전을 공략할 때까지 기다려보겠지만 준비는 해두려고 한다.
“응. 그렇게 알고 있을게.”
로치온과 대화를 끝낸 나는 바닥에 누워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지금은 그리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던전을 공략해야지.
“슬슬 올라가자.”
내 말에 NPC 동료들도 전투를 위한 채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