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9
독식왕 : 클리어러 239화
Chapter 57 Road to 독식왕(3)
1
-죽였다.
“네?”
나는 자고보르에게 온 짧은 전언을 듣고 이게 무슨 소리인가 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나는 저녁밥을 먹고 있었다.
그러니까 자고보르는 ‘죽여줄까?’ 하고 물은 지 여섯 시간 만에 내게 ‘죽였다.’ 하고 전언을 보내온 것이다.
“아…….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는 무슨. 그놈 참 약해도 너무 약하더구나. 그런 놈이 세상을 쥐고 흔들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니 참. 그래도 네가 한 말이니 의심은 하지 않겠다만.
나는 약해도 너무 약하다는 정령왕의 말에 수긍이 갔다.
정령계에서 일루시안은 형체를 갖추고 있으므로 자기 힘을 자기 형체를 통해 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자신의 힘 절반을 디아테타에게 보내주었고, 그것이 회복되기 전에 정령왕을 마주친 것이니까.
아무리 일루시안이 뛰어난 정령술사라고 해도 정령왕의 앞에서 그 능력은 피라미와 같았을 것이다. 정령들이 제정신이라면 정령왕 대신 일루시안에게 힘을 빌려주었을 리 없으니까.
그래서 뒤에 숨어 음모를 꾸미던 일루시안은 이토록 허무하고 생을 마감했다는 얘기.
자고보르는 오랜만에 자기가 직접 힘을 써서 누군가를 죽인 것이라 약간 흥분한 듯했다. 평소답지 않은 그의 수다를 잠자코 들으면서 밥을 먹었다.
식사가 끝나는 타이밍에 맞추어서 자고보르가 ‘그럼 다음에 얘기하자꾸나.’라고 하고 전언을 끝냈다.
나는 이 기쁜 사실을 이계에 있는 로치온에게 알려주었다.
-그것이 정말이냐? 서열 2위 디아테타에 이어 서열 3위인 일루시안까지 죽었다고?
“응. 틀림없는 사실이야.”
-오오! 그렇군! 정말 잘 되었다. 정말 잘 되었어, 조성오!
로치온의 말마따나 정말 잘 되었다. 일이 잘 풀리려면 이렇게도 풀리는구나 싶을 정도로.
이제 우리는 남은 일을 재빨리 마무리짓기로 했다.
나도 이제 찾아야 할 동료가 세 명밖에 남지 않았다. 일부러 인접한 아프리카 국가 세 곳만 남겨두었기 때문에 한 번의 해외 순방으로 퀘스트를 마무리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S급 던전이라니…….’
퀘스트에는 분명 그런 항목이 있었는데 아직 세상에는 그런 게 나타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다.
‘뭐, 때가 되면 알겠지.’
일단은 동료들부터 전부 찾고 볼 일이다.
2
일루시안이 죽은 지 일주일 만에 나는 동료들을 전부 찾아 동료 찾기 퀘스트를 마무리했고, 이계 쪽에서도 오더 진영이 카오스 잔당들을 몰아붙여 헤레디투스의 영지를 제외한 모든 영지를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묘하게 썰렁하네.
분명 기분이 좋아야 할 텐데 뭔가 싸한 기분이 드는 게 찜찜한 일을 남겨놓은 기분이 들었다.
사실 그게 정상이기는 했다. 아직까지 베일에 감추어져 있던 최종보스와의 싸움이 남은 거니까.
내가 지금껏 한 게임이 RPG와 비슷하다고 가정했을 때, 모든 RPG의 최종보스는 이제껏 열심히 플레이해서 레벨을 올린 것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강한 상대여야 했다.
‘이번엔 그 법칙이 맞아떨어지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제말 최종보스가 막강하다는 법칙은 현실에서는 적용되지 않았으면 한다.
헤레디투스.
그에 대해서는 수보타도 정보가 많지 않았다. 군주급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눈에 띄는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급부상해서 급기야 절대적 제왕 후보였던 디아테타마저 제쳐버렸다.
수보타는 그가 ‘귀신을 다룬다’고 했다. 그의 군대는 다른 군주의 병력과는 다르게 망자로 이루어져 있고, 그 전투력은 역사상 최고라는 것이었다.
물론 수보타가 있던 영지는 메인 전투가 벌어지는 곳과 많이 떨어져 있었고, 그가 섬기던 군주도 왕위쟁탈전과는 무관한 인물이었으므로 직접 눈으로 본 것은 아니었다.
그냥 전해 들은 소문이 그러했다는 것.
‘망자의 부대라…….’
나는 어쩐지 그것이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전설 속의 인물들을 떠올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NPC들과도 비슷하다.
실존 인물이든 가상의 존재이든 생명력을 얻어 현실에 존재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또 하나의 접점을 찾자면 베그리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헤레디투스에게 힘을 빌려준 그녀, 그리고 나의 성장을 도와준 그녀가 동일인물이라는 사실.
“아…….”
어쩐지 싸한 기분이 한층 강해졌다.
***
S급 던전의 존재는 내가 동료찾기 퀘스트를 완료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났다.
어느 날 갑자기, 뜬금없이 새로운 던전이 출현했다.
그것도 미국 백악관 뒤에 여봐란듯이.
당연히 미국에서는 비상이 걸렸다.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적어도 외견상 그것은 내가 전에 살던 아파트 부근에 있던 검은 산 던전의 업그레이드 버전 같았다-다른 곳도 아니고 하필이면 백악관 뒤에 던전이 생긴 거니까.
TV에서는 연일 미국 공무원들이 백악관 출입을 꺼리고 있고, 의회는 무기한 연기되었으며 미국 대통령이 당분간 안전지역에 거주하기로 했다는 등의 뉴스가 이어졌다.
작은 던전 하나가 등장한 것치고는 거창한 행보였지만 장소가 장소니만큼 커다란 위협이 된 것이리라.
나는 내 나름대로 상당한 의문에 휩싸였다. 동료찾기 퀘스트가 마무리된 시점에 나타났다는 점만 해도-그리고 보란 듯이 백악관 뒤에 솟았다는 점을 생각해도-새로 생긴 던전이 S급이 틀림없어 보이지만 그것이 가장 상식에 가까운 기본법칙을 무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로 던전은 등급이 올라갈수록 층수와 면적이 증가한다.
나는 퀘스트 목록에서 S급 던전이라는 명칭을 보았을 때, 그것이 당연히 어마어마하게 클 줄 알았다.
공략에 적어도 몇 달은 소요될 만큼.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좀 실망스럽네.”
하지만 이제 최종공략까지 몇 걸음 남지 않은 상황에서 쓸데없는 아쉬움은 갖지 않는 게 좋겠지.
미국에 S급 던전이 생겼으니 내가 해야 할 행동은 하나다. 바로 그것을 공략하러 가는 것.
하지만 여기에는 뜻하지 않은 문제가 생겼다. 기본적으로 일정수준 이상의 던전은 타국의 게이머가 공략할 수 없게 되어있고, 새로 나타난 던전인 동시에 지리적 위치가 민감해서 함부로 공략 요구를 할 수 없는 형편이 된 것이다.
이 마당에 형편을 따져서 무엇하랴 하는 마음에 공략 요청을 하려는 찰나, 우려했던 상황이 발생했다.
미국에서 먼저 공략팀을 꾸려 던전 공략에 나서기로 한 것.
그 위치가 민감한 것에 비해 행동에 나선 것이 좀 더딘 측면이 있다.
거기에 대해서는 미국에 오랫동안 살았던 노아가 대답해 주었다.
“정치적인 요소가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 행정부는 해당 던전이 안전하게 관리되길 바랍니다. 백악관은 상징적인 건축물이니까요. 웬만하면 다른 곳으로 옮기는 선태지는 택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로 생긴 던전을 완벽하게 관리하는 방법밖에 없죠. 아마 다른 던전과는 달리 특정 집단이 그 던전을 전담하게 될 것 같고, 그런 요구를 안 길드들 간에 경쟁이 붙게 된 것입니다.”
“그 던전을 전담하는 길드는 특별대우를 받겠군요.”
“네. 수입도 수입이지만 미국 백악관을 지킨다는 상징적인 지위를 부여받게 되는 것이니까요.”
“흠……. 이럴 때가 아닌데.”
“어차피 지금은 공략 요청을 해도 미국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들은 세계 최고 길드의 명예를 OG에 넘긴 것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거든요. 다른 곳도 아니고 OG에 백악관을 지킨다는 명분을 허락할 리 없습니다.”
“그럼 어떡해야 하죠?”
“제 생각엔 그곳이 S급 던전이 확실하다면 곧 길드장님이 나설 수밖에 없는 흐름이 될 것 같습니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되겠죠.”
천재가 그렇다고 말하니 그대로 따를 수밖에.
아무리 상황이 급하다고 하더라도 마음대로 미국 백악관에 뒤에 있는 던전을 공략할 수는 없다. 정치에 관심이 없는 나라도 그것이 대단히 민감한 후폭풍을 일으키리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일단 보상부터 확인할까?’
동료찾기 퀘스트를 달성하고 얻은 보상을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베그리프의 상황이 안 좋아진 다음에 종종 그랬듯 이번에도 보상 획득에 딜레이가 생겼다. 처음에는 보상 자체가 사라진 게 아닐까 싶어 당황했는데, 오늘 아침 불쑥 메시지가 떠올랐다.
[[동료] 퀘스트 보상이 인벤토리에 저장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동료 퀘스트의 보상은 달성한 즉시 주어졌다. 왜냐하면 다른 것들과 달리 상자나 달걀 안에 넣을 수가 없는 거니까.
인벤토리를 확인하니 한글로 ‘히든 클래스’라고 적혀있는 조그마한 공간이 있었다. 지금 시스템에 나타나고 있는 이상현상을 감안하면 일일이 문제를 삼을 수는 없으리라.
떼 먹히는 줄 알았던 보상이 늦게라도 주어진 것이 어딘가?
‘어떤 히든 클래스가 나오려나?’
마지막 페이즈 퀘스트들의 보상이 전부 굉장했던 만큼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무기와 장비를 얻을 때는 어떤 게 나올지 예상할 수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예상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물론 가상현실게임 안에서 얻은 히든 클래스 중에 현실로 돌아오고 난 뒤 얻지 못한 히든 클래스가 아직 남아있지만, 그 중 어느 것도 지금 내가 보유한 클래스를 능가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예측이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새로운 클래스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기대감을 품은 채 ‘히든 클래스’라고 적힌 칸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이렇게 하는 게 맞겠지?’
인벤토리 안의 보상 칸에 손가락이 닿자 불쑥 메시지가 나타났다.
[축하합니다! 히든 클래스 ‘전설의 영웅’을 얻었습니다!]
“전설의 영웅?”
뭔가 낯 뜨거운 명칭이다. 예상했던 대로 처음 보는 클래스이기도 했다. 당장은 뭐가 뭔지 알 수 없었으므로 나는 클래스 정보를 확인했다.
[전설의 영웅]
숙련도 : MAX
특징 : 당신은 이제껏 누구도 달성하지 못한 업적을 성취했습니다. 영웅은 전설이 되어 그 이름이 영원히 회자될 것입니다. 당신을 상대하는 적은 위압감에 움츠러들 것이고, 당신의 동료들은 당신을 더욱 존경하게 됩니다. 절체절명의 순간, 당신의 운은 당신의 생명을 구할 수도 있습니다.
“이게 뭐야?”
정보를 확인한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뭔가 말만 거창하고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뭐가 나아지는 건데?’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한번 찬찬히 정보를 훑어볼 때. 암젤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하품을 한 차례 늘어지게 한 그녀가 나를 보고는 새삼스럽게 눈을 빛냈다.
“어? 오늘따라 주인님이 한층 멋있어 보인다옹. 오늘이 고대하던 그날인 것이 틀림없다옹. 주인님, 나는 준비되었으니 언제든 덮쳐도 오케이다옹.”
“이상하게 애매한 멘트는 하지 말아줄래?”
나는 암젤의 말을 듣고 확신했다. 뭔가 변하기는 한 모양이라고. 어쩌면 구체적인 클래스 하나가 추가되는 것보다 이런 상징적인 클래스가 주어진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따로 클래스를 적용해야 효과가 발동하는 것이 아니라 패시브로 자동 적용되는 클래스인 것 같으니 더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생각을 하며 무심히 TV를 켰을 때, 뉴스 특보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공교롭게도 S급 던전에 대한 뉴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