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8
독식왕 : 클리어러 238화
불의 정령왕 자고보르.
그는 내가 처음으로 대화를 나눈 정령왕이다. 불의 정령왕이라고 하면 괴팍하고 성질 급한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게 마련인데, 적어도 내가 겪어본 바로는 자고보르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점잖고 진중한 면이 있는 정령왕이다.
일루시안에 관해 묻는다면 정령왕들 전체에 전언을 보내면 편하겠지만, 내가 정령왕에게 전언을 보낼 수 있는 것은 한 번에 한 명으로 정해져 있다. 그래도 이른바 정령왕이라는 대단한 지위에 있는 존재들인데 아무렇게나 쉽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닌 것이다.
그들이 내게 말을 걸 때는 무작위로 걸지만 나는 단체 전언을 날릴 수가 없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자고보르였다. 그라면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줄 것 같다는 이유도 있지만, 일단은 가장 먼저 떠오른 정령왕이었으니까.
내 말을 들은 자고보르는 한동안 침묵을 했다.
-그런 자가 이곳에 있을지 모른다니, 처음 듣는 얘기군.
나는 그 말을 듣고 실망했다. 정령왕도 모른다면 일루시안이 있는 곳은 정령계가 아니라는 걸까?
내가 일루시안이 그곳에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이유는 그가 디아테타에게 정령의 힘은 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를 확실히 제거하고자 한다면 힘을 전부 나누어주는 것이 맞을 텐데.
만약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 과거에 조용하던 정령왕들이 최근에 활동이 분주해져서 들킬 염려가 커졌다거나.
물론 정령왕들의 활동이 분주해진 까닭은 나 때문이다. 이건 단순히 자의식 과잉이라기보다는 실제로 그들이 내게 약간의 집착증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놀아줄 사람이 없어서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아니, 진짜로 놀아줄 사람이 없나?
아무튼…….
실망하고 있던 내게 자고보르가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정령계가 안정화된 이후로 나는 내 영지를 직접 꼼꼼히 살핀 적이 없다. 거기에 대해서는 나보다 내 부하들이 더 자세히 알고 있을 거야. 기다려 보거라, 조성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렇군.
자고보르가 말한 정령계가 안정화되었다는 것은 정령왕들이 더 이상 다투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과거 서로 사이가 나쁠 때는 정령계가 가루가 나도록 싸우곤 했다고 하니까.
어쨌든 그 싸움을 중재한 것이 전설 속의 인물인 오리무스이고, 지금은 그 힘을 내가 물려받았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정령왕들이 필요 이상으로 나를 좋아하는 것도 이해가 되네.’
단순히 내가 좋아서가 아니라 정령계에 평화를 가져다준 오리무스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것이고, 그가 살아있을 때 충분한 고마움을 표시하지 못해서 나를 그 대리로 여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싫어하는 것보다는 낫지’
자고보르에게 다시 전언이 온 것은 약 세 시간이 지난 뒤였다. 밥을 먹다가-수보타라는 훌륭한 집사가 사라져서 지금은 그가 만든 것만큼 멋진 요리를 맛보지 못하고 있다.-갑자기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와 깜짝 놀랐다.
-조성오, 거기 있느냐?
“네? 아 네, 여기 있습니다.”
-네가 말한 자에 대해 알아보았다. 일루션이라고 했나? 내 부하 중에 그를 알고 있는 애들이 꽤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정령계에 숨어들었다니 대단히 간이 큰 놈이 아닐 수 없다.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내가 그놈을 어떻게 해주길 바라느냐?
“그놈을 정령계에서 쫓아…….”
나는 거기까지 말하고 위화감을 느꼈다. 수보타의 말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육체를 없애고 영혼만 남김으로써 영생을 얻는 길을 택했다고 하니까. 그도 자세한 것은 모르고 있었지만 아마 그 영생의 비결이 정령계로 가는 것이었을 것이다.
왜 한국 고전에도 그런 이야기들이 있지 않은가? 신선들이 득도를 해서 산에 처박혀 영원히 산다는.
육체가 없는 이를 쫓아내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런 생각으로 말을 흐린 내게 자고보르가 말했다.
-혹시 놈을 제거해주었으면 하는 것이냐?
“네? 네! 그럴 수 있다면 최선이죠!”
-뭘 솔직하게 말하면 될 걸 가지고 어려워하고 그러느냐. 나는 너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자체로 기분이 좋다.
“하하. 감사합니다!”
약간 간지러운 멘트이기는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도움이 된다.
-나도 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자기 목숨을 보전하려고 정령계에 숨어든 것도 괘씸한데, 우리 조성오를 곤란하게 하다니. 내 이놈을 용서치 않을 터!
“아……. 감사합니다.”
-죽이고 나서 연락하마.
“음…….”
갑자기 밥이 맛있어졌다.
8
일루시안은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왜 기척이 느껴지지 않지?”
만약 모든 일이 잘 풀렸다면 지금쯤이면 디아테타의 기척이 느껴져야 한다. 대대로 힘을 나누어준 그들 가문의 인물들과 자신은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적어도 그 존재감은 미세하게나마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반대편 세상으로 넘어갔을 때도 느껴지던 그녀의 기척이 지금은 싹 사라져 버렸다.
“설마…… 죽은 거야?”
매우 당혹스러웠지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그것 하나밖에 없다. 이처럼 말끔히 기척이 지워지는 것은 죽음, 그것 말고는 없으니까.
“그렇게 강한 놈이었다니…….”
사실은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었다. 베그리프가 작정을 하고 서포트를 한 인물이니까. 아마 그는 시간이 갈수록 힘을 키웠을 것이고, 지금은 자신에게 힘을 전해 받은 디아테타도 죽일 만큼 강해졌다는 얘기일 터.
‘정령의 힘을 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자신은 이 정령계에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불법거주하고 있다. 물론 어디에나 있는 정령들 중에는 자신의 존재를 눈치챈 이들도 있지만, 그들은 보아도 못 본 척하는 불완전한 존재들이다.
게다가 자신은 이곳에서 정령들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정령왕들의 심기를 거스르면 안 되니까.’
만약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목숨을 보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한 번도 직접적으로 본 적이 없는 정령왕들이지만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만 들어도 정말 무시무시하다.
디아테타가 죽었다고 결론을 내린 일루시안은 자신과 세상을 연결하고 있는 매개체 중 하나인 앰블레마에게 전언을 보냈다.
“앰블레마, 들리느냐?”
-……네, 스승님. 여기 있습니다.
“작업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느냐.”
-문은 이제 거의 다 완성이 되었습니다. 헤레디투스는 한 번 문이 망가진 것 때문에 여기에 자기 마나를 쏟아붓는 데 훨씬 적극적이 됐습니다.
“그렇겠지……. 그런데 베그리프는 왜 문을 망가뜨렸던 걸까?”
-전부 망가뜨리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보수를 해서 대안을 만들 수 있었으니까요.
“아무튼, 너는 너의 과업을 반드시 완수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말한 것도 최대한 빨리 만들어야 하고.”
-네…… 노력하겠습니다.
“노력만 가지고는 안 돼! 잊지 마라. 내가 없이는 넌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네! 스승님!
앰블레마의 대답을 듣고 일루시안은 대화를 끝냈다.
그가 디아테타 가문의 대안으로서, 그리고 세상과 연결되는 또 하나의 통로로 선택한 것은 바로 앰블레마였다.
준수한 마법사였던 앰블레마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마법과 정령술 두 가지 모두에 능통했다. 훌륭한 자질을 가지고 충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역사에 남을만한 인물이 되기 어렵다.
어느 날 일루시안은 정령계에 닿은 앰블레마의 목소리를 들었으며, 그에게 자신의 마법과 정령술을 전수하는 대신 자신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부하로 삼았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데에는 마법의 힘을 전수하면서 자신을 거역하지 못하게 하는 주문을 몰래 흘려 넣었기 때문이다.
앰블레마는 나중에 그 사실을 알았지만 일루시안과 관계를 맺은 걸 후회하기에는 이미 많은 과정을 거쳐 온 후였다.
일루시안은 앰블레마를 헤레디투스와 연결하는 매개체로 삼았다. 직접 그와 소통하지 않은 것은 헤레디투스가 정통 마법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도, 힘을 나누어 줄 수도 없다.
그래서 앰블레마를 대신 투입해 그를 돕도록 하고 더불어 베그리프의 근황을 들었다.
베그리프는 헤레디투스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것이 영원한 죽음은 아니었다. 그녀가 남긴 잔해를 앰블레마가 수습했으며 훗날 그것을 이용해 부활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때는 말 잘 듣는 아이로 만들어야겠지.’
또 하나 일루시안의 명령으로 앰블레마가 하고 있는 일은 영생의 약을 만드는 것이었다.
아주 오래전 처음 만들었던 것은 쥐새끼를 닮은 놈이 먹어버렸다.
아무리 실수였다지만 놈이 만행 때문에 자신이 정령계까지 와서 이렇게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영생의 약은 결코 쉽게 만들 수가 없다. 그 재료만 해도 수천 년에 한 번만 구할 수 있는 것들이 여러 개 들어간다. 강하고 신성한 마나가 필요한 것은 물론이다.
앰블레마는 반대편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만들기 위해 헤레디투스의 마나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것의 또 다른 용도는 영생의 약을 만드는 주문에 쓰였다. 하지만 그 사실은 일루시안과 앰블레마밖에 모르고 있다.
‘헤레디투스가 반대편 세상을 정복한다면…….’
그때 세상으로 돌아가 영생을 약을 마신다. 그리고 베그리프를 부활시킨 뒤 왕이 부재한 세상을 집어삼킨다. 반대편 세상에 있는 헤레디투스를 제거하고 어부지리하는 것은 그 다음의 일!
“크크크…….”
아직 실현되지 않은 꿈을 그리던 일루시안은 갑자기 섬뜩한 느낌이 등허리를 관통하는 것을 느꼈다.
창가로 걸어간 그는 붉게 물들고 있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천 년이 넘게 살았지만 이토록 붉은 하늘은 처음 본다.
“열기……?”
단순히 색깔만 붉어지는 것이 아니라 온 피부를 찌르는 열기가 느껴졌다. 물리적인 온도의 문제만이 아니라 정령술사인 자신이기에 더 민감하게 느끼는 것이기도 하다.
경이에 찬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는 압도적인 풍광을 그리며 가까워지는 그림자를 보았다.
허공에 뜬 채로 천천히 날아오는 그 그림자는 붉은 피부와 근육질의 몸을 가지고 있었으며 몸집은 작은 산채만큼이나 컸다.
타닥타닥 불꽃이 튀는 수염을 흩날리며 위엄 있는 존재가 이곳으로 다가왔다.
“네 이놈!”
우르릉!
정령왕이 노기를 뿜어내자마자 천지가 진동을 했다.
일루시안은 이토록 막대한 공포감을 느끼는 것이 생전 처음이었다.
“저, 정령왕…….”
말할 것도 없이 그는 불의 정령왕 자고보르일 터.
일평생 정령술을 연구한 자로서 감격스러운 순간이기는 하지만 그를 눈에 담는 것이 마냥 감격스럽지만은 않았다.
이유는 그가 필경 자신을 죽이러 오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