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7
독식왕 : 클리어러 237화
나는 여자가 뿜어내는 가공할 아우라를 보며 직감할 수 있었다.
‘디아테타구나…….’
비록 수보타는 현재 이계에 있지만, 나는 그를 보내기 전에 남아있는 카오스 군주들에 대한 정보를 대강 들어두었다.
남은 카오스 군주들의 숫자가 얼마 되지 않고 더군다나 변수로 작용할 수 있는 영향력 있는 군주의 숫자는 더더욱 적었기에 그것들을 기억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헤레디투스를 제외하면 끝판왕의 등장이네.’
수보타는 그야말로 모르는 게 없어서 그녀 가문의 내력과 세력권, 그리고 그녀가 가진 능력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일루시안과의 동맹 관계도 일러주었다.
흥미로운 이야기는 대충 들어도 기억에 남는 법이다.
나는 이계 서열 3위 군주가 실체와 영지가 없는 존재라는 것에 놀랐다. 그는 그야말로 디아테타와 한 몸이라고 해도 틀릴 게 없는 존재로서, 오랜 시간 동안 디아테타 가문의 조력자가 되어왔다.
일루시안은 마법과 정령술에 정통한 인물로 그가 디아테타에게 빌려준 힘도 거기에 기인한다.
수보타는 지난번 왕위쟁탈전을 계기로 디아테타를 둘러싼 동맹 관계가 모두 와해되었다고 했지만 이제보니 일루시안과의 관계는 아직 굳건한 모양이었다. 어쩌면 최근 옛 동맹들과의 관계를 회복하면서 일루시안과도 재결합한 것인지 모른다.
‘버전 2.0인가…….’
수보타는 디아테타에게 두 가지 모습이 존재한다고 했다. 본신의 능력만 발휘할 때와 일루시안에게 힘을 나누어 받았을 때.
당연히 후자가 비교가 안 될 만큼 강하다. 아마 헤레디투스의 약진이 없었더라면 그녀가 조상들의 대를 이어 이계의 왕이 되는 게 당연했을 거라는 게 수보타의 의견이었다.
‘틀린 말이 아니야.’
나는 뒤늦게 나타난-역시 시스템에 버퍼링이 걸리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정보창을 통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는 현재 일루시안에게 힘을 주입받은 상태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안 그래도 강력한 그녀의 능력이 두 배 이상의 버프를 받았다.
‘어떻게 내가 여기 있는 것을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그녀가 목표로 하는 것이 나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나를 보고 ‘네놈이로군’이라는 멘트를 했고, 지금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으니까.
“잘됐네.”
지금 이계에서 오더 진영이 애를 먹고 있는 이유는 다 이 디아테타 때문이다. 그녀가 나를 찾아온 이유는 오더 측을 뒤에서 지원하는 것이 나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터.
“이해가 일치하는군.”
말하자면 이 싸움은 장수 간의 일기토로 표현할 수 있다. 단판의 승부로 전장의 승패가 결정되는.
눈싸움은 그리 길지 않았다. 나와는 달리 디아테타는 나에 대해 궁금한 것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냥 죽이면 그만이라는 태도로 몸을 날려 공격해 왔다.
화악-
그녀의 육체보다 그녀의 마나가 훨씬 크고 직접적으로 닥쳐온다. 일렁이는 마나는 곧 여러 개의 검으로 바뀌어 곧바로 찔러 들어왔다.
나는 본격적으로 싸우기 위해 의상부터 바꾸었다. 백옥보를 꺼내어 마법검들을 모조리 쳐냈다.
챙! 챙! 챙! 챙!-
약간의 저항이 있기는 했지만 많은 희생양들의 피로 급성장을 한 백옥보는 마법검 따위는 단번에 부숴 버렸다.
오만한 표정으로 덮쳐오던 디아테타의 미간에 주름이 잡히는 찰나, 나는 백옥보를 일직선으로 내뻗어 그녀를 향해 찔러갔다.
“흥!”
디아테타는 검끝을 콧소리와 함께 쉽게 피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페이크.
나는 반대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스킬을 발동시켰다.
‘공간생성!’
나와 디아테타, 그리고 내 뒤에 붙어있던 암젤까지 세 개의 그림자는 아공간에 빨려들었다.
***
‘여간내기가 아니네.’
얼마 전에 대결에 탑에서 연속된 대결을 치른 바 있지만, 그들 모두를 합친다고 해도 디아테타 하나만큼 강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그사이 나도 성장을 했다는 것. 대결의 탑 퀘스트를 완수하고 넘버링 아티팩트를 얻었으며, 전투력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백옥보도 진화에 가까운 성장을 했다.
디아테타는 싸움이 길어질수록 점점 초조한 기색을 보였다. 문답무용으로 나만 죽이면 끝난다는 듯 대들던 그녀였으나 그게 녹록치 않자 보기 거북할 정도로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연신 강한 마법을 터뜨렸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야.’
디아테타가 초조해하는 이유는 비단 그녀의 급한 성격에만 기인하는 것이 아닌 듯했다. 그녀가 뿜어내는 마력이 시간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마나야 사용할수록 줄어드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마치 마나의 총량 자체가 줄어드는 것처럼 보였다.
‘당연히 그렇겠지.’
남에게 빌린 마나는 시간이 갈수록 줄어드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또 하나 깨달은 것은 그녀의 상태가 일루시안의 모든 힘을 주입받은 최종버전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 증거로 그녀는 정령술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령술을 사용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게 이 싸움에 통할 만큼 강하지가 않기 때문일 터.
그녀의 초조함으로 미루어 만약 강한 정령술을 사용할 수 있었다면 진즉에 쓰고도 남았을 것이다.
‘절반의 힘만 빌린 거겠지.’
거기에 어떤 복잡한 사연이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일루시안은 디아테타에게 정령의 힘은 빌려주지 않았다.
만약 디아테타가 완전체였다고 해도 내가 이기지 못할 일은 없었겠지만, 이 싸움이 훨씬 힘들어졌을 것은 자명하다.
정령술 하니까 떠오르는 사실 하나가 있었다.
나는 최근 들어 정령왕들에게 부담스러울 정도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전에는 내가 전언을 보내야 대화가 가능했던 그들이 지금은 불쑥 불쑥 먼저 말을 걸어오곤 했다. 특히 전투 중에.
아니나 다를까?
싸움이 절정에 달한 지금 정령왕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성오, 내 힘이 필요하지 않느냐?
-아니, 이번엔 내 힘을 써다오. 네가 내 능력을 사용해 싸움에서 이긴다면 나는 정말 뿌듯할 것 같구나.
-무슨 소리! 조성오는 내게 힘을 빌리는 걸 가장 좋아한다. 그렇지 조성오? 얼른 내 능력을 사용해서 저 여자를 날려 버려라!
이런 상황이면 누구 하나의 힘을 사용하기 곤란해진다.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 어떤 하나의 힘을 사용한 경우 다른 정령왕들이 삐치기도 했다.
“당신들의 힘을 빌릴 필요도 없습니다! 이 여자는 저 혼자의 힘으로도 충분히 죽일 수 있어요!”
-오오! 장한지고! 역시 내 조성오구나!
-내 조성오라니! 조성오는 내 조성오다!
-이것들이 내 조성오를 가지고 왜 함부로 입에 놀리는 것이냐?
정령왕들은 엄청 할 일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 아니면 내게 말을 거는 것이 그들에게는 다른 일들을 제쳐놓을 만큼 중요한 일이거나.
나는 이왕이면 전자이기를 바랐다.
‘끝낼 때가 됐군.’
디아테타의 안색이 파랗다 못해 하얗게 질렸다. 그녀의 주위를 띠처럼 감싸고 있던 일루시안의 마나도 얼마 남지 않았다.
‘마무리는 녀석들에게 맡겨야지.’
나는 뒤로 물러나며 디아테타의 정신을 어지럽히는 형태로 돕고 있던 암젤을 불렀다.
“암젤, 이리 와!”
“응? 알았다옹!”
나와 암젤이 빠진 공백에 소환수들을 채워 넣었다.
‘가브리엘! 박재환!’
살기등등한 모습을 드러낸 두 명의 소환수.
어쩌다 보니 적이었을 때 가장 까다롭고 싫은 존재들이었던 그들이 최애 소환수가 되어버렸다.
함께 싸우는 일이 많다 보니 둘의 호흡도 찰떡이 되었다. 처음 소환수가 되었을 때는 반항을 했던 가브리엘이었으나 지금은 마치 내게 잘 보이려는 것처럼 혼신의 힘을 다해 싸우곤 했다.
‘살아생전에 이렇게 성실했으면 얼마나 좋아?’
만약 가브리엘이 제정신이었다면 긍정적인 업적을 많이 쌓은 훌륭한 게이머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실례일 정도로 그는 많은 사람을 죽인 살인자이다.
“끄아아아악!”
소환수들을 상대로도 고군분투를 해야 할 만큼 약해진 디아테타는 듣기 거북한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게 왜 혼자 왔냐?’
그녀의 지위라면 대군을 끌고 올 수도 있었을 텐데.
하지만 그러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오더 진영과 전선을 맞닿은 상태로, 그것도 오더 영지의 요지로 분류된 이곳에 여러 명이 함께 진입하기가 어려웠을 테니까.
자신의 능력이라면 혼자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도 있었을 터.
“너의 죄는 오만함이다.”
가브리엘이 눈에서 빔을 쏘아 디아테타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것과 거의 동시에 박재환이 달려들어 디아테타의 목을 깔끔하게 베었다.
데구르르…….
수 세대를 호령했을 이계의 강자가 단말마의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아직도 분노로 일그러진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의 머리통을 가브리엘이 걷어차 버렸다.
이 싸움으로 나는 레벨 1이 올랐다. 끝판왕은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적을 쓰러뜨렸음에도 레벨이 1밖에 오르지 않은 것은 내 레벨이 거의 한계치에 도달했기 때문. 최근 레벨 업이 더뎌지고 있었기 때문에 1이라도 오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양질의 스킬스톤과 스탯스톤도 함께 챙겼다.
“악바리 같은 여자였다옹.”
“그러게 말이야. 싸우면서도 자존심이 엄청 세다는 게 느껴졌으니까.”
간단한 후평을 남기고 나와 암젤은 아공간에서 빠져나왔다.
나와 보니 현장은 꽤 정리된 상태였다. 갑자기 일어난 사태에 당연히 던전 출입은 통제되었고, 출동했던 게이머들도 이미 돌아가고 보이지 않았다.
이런 깔끔한 뒷정리는 물론 노아와 티코이의 입김이 작용한 것일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강한 게이머가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들어갔는데-실질적으로 던전에 들어간 것은 아니지만 모습이 사라졌으니 당연히 그렇게 여겨졌을 것이다-추가 지원은 필요할 리가 없으니까.
내가 주거지와 길드원이 위험에 처한 것을 알고 공항에서 재빨리 온 것으로 해두면 이 이상 문제 될 것은 없어 보인다.
‘자, 이제 이 희망찬 소식을 우리 편에게 알려줘야겠네.’
전언으로 오늘 있었던 일을 간략히 전달하자 로치온은 엄청나게 놀랐다.
-그게 진짜야? 디아테타가 죽었다고?
“나도 그 여자가 어떻게 여기로 왔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지.”
-아……. 조성오. 너는 정말 강해졌구나.
내가 자신에게 농락당한 과거가 있다는 걸 아는 로치온은 정말 감개가 무량한 듯했다.
“이제 헤레디투스만 신경 쓰면 되는구나.”
-그래. 큰 혹이 제거되었으니 이제는 남은 영지를 차지하고 총공세를 펼치는 일만 남았다.
“이렇게까지 됐는데 헤레디투스는 정말 뭘 하는 건지 모르겠네.”
-나도 그게 불안하긴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지. 우리에게 기회인 것만은 분명하다.
“응. 계속 수고해 줘, 로치온.”
디아테타가 죽음으로써 기존의 계획-던전과 이계 양쪽에서 협공을 통해 카오스 군주들의 영지를 쉽게 정복한다는-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사실 내게는 헤레디투스 말고 신경 쓰이는 존재가 하나 더 있다. 바로 디아테타에게 힘을 빌려준 일루시안.
그놈은 과연 어디서 무얼 하는 것일까?
흐름으로 미루어 어딘가에 숨어서 음모를 꾸미는 타입 같은데.
“아!”
놈에 대해 생각하자 한 가지 단서가 떠올랐다. 나는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정령왕 중 하나에게 전언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