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6
독식왕 : 클리어러 236화
5
일루시안은 디아테타에게 자신이 가진 절반의 힘. 즉 마법의 힘을 전달했다.
마법 거울은 오랜만에 제 기능을 하며 폭발적인 빛을 발했다. 그리고 모든 작업을 끝났을 때, 디아테타는 득의만만하게 일루시안이 건네준 좌표를 향해 출발했다.
일루시안은 노쇠한 몸을 추스르고 먼 곳을 응시했다.
그가 있는 곳은 정령계이다. 그는 정령술에 관한 한 누구도 도달할 수 없는 경지에 도달했고, 자신의 육체가 수명을 다했을 때 영혼을 추슬러 이곳으로 건너왔다.
비록 정령술에 통달했다고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속세의 개념에 따른 것이다. 이곳 정령계에서 자신은 숨을 죽이고 살아가는 불법 거주자에 불과했다.
그에게는 야망이 있었다. 자신의 능력을 극한까지 연성하여 불사의 육체를 얻은 뒤 본래의 세상으로 돌아가겠다고.
반대의 의미로 불법 거주자의 몸이기에 그는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수천 년의 시간을 오롯이.
디아테타 가문을 도운 것은 말 그대로 자신의 연구성과를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오만하고 때로 지긋지긋할 만큼 이기적이었지만 자신의 마나와는 궁합이 잘 맞았다.
그들을 꼭두각시로 이용한 결과 자신의 능력이 이미 세상을 지배하고도 남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세상에 돌아가지 않은 것은 아직 불사의 육체를 얻지 못한 것도 있지만, 연구 끝에 놀랍기 그지없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바로 이면의 세상이 존재하고 그곳으로 통하는 방법이 존재한다는 것.
그는 자신의 연구를 촉진할 매개체를 발명했다. 그것은 생명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볼 수 있는 별난 존재였다. 아직 씨앗에 불과한 그것을 세상에 내보냈다. 그러자 그것은 자신도 제어하지 못할 속도로 빠르게 자라나 스스로 자아를 형성했다.
씨앗을 발견한 것은 헤레디투스였다. 그는 씨앗에 베그리프라는 이름을 짓고 자신이 왕이 되는 것을 돕게 했다.
베그리프는 헤레디투스가 왕이 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이면으로 통하는 길을 발견하고 그것과 통하는 수단도 발명해냈다.
일루시안은 그 과정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마법과 정령술의 정수를 응축해 탄생한 존재는 스스로 전무후무한 역사를 만들어나갔다.
하지만 한가지 예측할 수 없었던 일. 그것은 베그리프가 오더 측의 리더인 락시움을 만난 일이었다. 베그리프는 그와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가치관을 갖게 되었으며 그것은 그녀로 하여금 헤레디투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스스로 사고하게 만들었다.
베그리프가 그 뒤로 어떤 일을 했는가는 정확히 밝혀낼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결과 세상에 놀랄 만한 일들이 일어났다. 자신이 예측할 수 있는 것은 베그리프가 이면 세상의 누군가를 움직였으며, 그가 이쪽 세상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 왔다는 것이다.
일루시안은 호기심을 느끼는 한편 불안해지기도 했다. 만약 자신이 만든 존재가 자신을 능가하여 모든 세상을 거머쥐고 만다면. 더 정확히 말해 베그리프가 움직인 이면 세상의 인물이-그는 필경 오더 성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양쪽 세상을 모두 정복하고 만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미 베그리프는 헤레디투스를 왕으로 만듦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으니까. 그녀의 능력이 시간이 갈수록 엄청난 속도로 발달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당연히 헤레디투스에게 주었던 것보다 훨씬 강한 힘을 그 이면 세상의 인물에게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증거가 정령계에도 나타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정령계는 왕들의 통치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오랜 역사 속에서 그들은 심한 대립을 하기도 했지만, 적어도 최근 수천 년간은 각자의 영지에만 머무르며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랬던 것이 최근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정령왕들이 서로 전령을 보내 대화를 나누는 일이 잦아진 것이다. 그것은 적어도 전쟁을 하기 위함은 아닌 듯했다. 그렇다면 적어도 공통의 화제가 있다는 뜻인데, 그것이 무엇일지 일루시안은 절대 짐작할 수 없었다.
적어도 다른 세상과 전혀 다른 시간의 궤를 보이는 정령계에서는 왕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공통 화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화제는 다른 세상에서 넘어온 것일 터.
추측에 불과하지만 다른 세상에 존재하며 정령왕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의 인물이라면 베그리프밖에 없다. 그리고 헤레디투스를 피해 결계 속에 있는 그녀라면 직접 정령왕들과 내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힘을 준 이면 세상의 인물이 정령왕들과 통한 것일 터.
일루시안은 최근 전령의 메시지 하나를 낚아채 그 심증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정령왕들은 심지어 그를 두고 서로 질투를 하고 있었다. 그에게 조금이라도 자신을 더 어필하고자 경쟁하고 있었던 것.
‘설마 이런 일이 생기다니…….’
그래서 책략을 세웠다. 당면한 목표는 베그리프가 움직인 이면 세상의 인물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래야 안정적으로 자신의 목표를 계속 추구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헤레디투스와 디아테타를 움직여 각자의 욕구를 충족하게 한다. 헤레디투스는 이면 세상을 정복하고, 디아테타는 이면 세상의 인물을 제거하는 것으로 세력을 키우는 것. 둘의 균형이 얼추 맞추어진다면-물론 그렇다고 해도 헤레디투스가 앞설 것이 뻔하지만-둘의 전쟁으로 쌍방 간의 전투력을 상쇄시킨다.
그런 뒤 자신이 뷸사의 육체를 얻어 세상에 돌아가면 모든 세상을 아우르는 영원불멸의 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크크크…….”
나지막한 웃음소리를 흘린 그는 디아테타에게 큰소리를 쳤던 일을 떠올리고 약간은 혼잣말을 했다.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것은 결국 나였군.”
6
내가 티코이의 연락을 받은 것은 영국에서 막 아홉 번째 동료 찾기 퀘스트를 완료하고 한국에 도착했을 때였다.
“뭐? 던전에서 사고가 났다고?”
나는 티코이의 다급한 보고가 무슨 의미인지 얼른 알아듣지 못했다. 던전에서 사고가 났다니.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 더구나 티코이가 지칭한 던전은 내 주거지 근처에 있는 C급 던전이었다.
던전에서 무슨 일이 생겼다면 시스템적이 먼저 나에게 신호를…….
[C-001 던전에 침입자가 발생했습니다!]
[던전 마스터의 지위가 위협받고 있습니다!]
[즉각 조치가 필요합니다!]
‘아, 나왔구나…….’
왜 시스템이 티코이보다 반응이 느린 거지? 나는 그 이유를 생각하다가 현재 이 시스템을 만든 장본인이 처한 상황을 떠올렸다.
‘설마 베그리프가 제힘을 발휘하지 못해서 딜레이가 생기는 건가?’
게임의 전체 시스템에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껏 없었던 버그 하나가 발견되었다. 여기서 잠시 감상에 빠진 나는 티코이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주인님! 주인님, 듣고 계십니까?
“응. 던전에 침입자가 발생했다고? 그게 대체 누군데?”
-저로서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이 정도라면 군주급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
과연 침입자가 누구일지 오래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던전을 타고 넘어와 던전 마스터의 지위까지 위협할 정도라면 이계의 군주가 틀림없었다. 그게 누구인지 궁금하기는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확인할 방법은 없다.
-현재 던전 안에 있던 다섯 명의 게이머가 사망했습니다. 카일과 캐미가 연락을 받고 긴급 투입되기는 했지만, 사태를 막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입니다!
“알았어, 최대한 빨리 갈게.”
원래 하려던 대로 자동차를 타고 가면 두 시간이 소요된다. 나는 자동차 대신 내 두 다리를 택하기로 했다. 점퍼 세트를 입고 하늘을 날 듯이 이동하면 자동차를 타고 가는 것보다 훨씬 빨리 도착할 수 있을 터.
나는 동료들에게 말했다.
“나 먼저 집으로 갈게. 너희들은 예정대로 자동차를 타고 와.”
암젤에게만은 다른 명령을 내렸다.
“너는 내 어깨에 올라타고.”
노아 역시 따로 보고를 받았다. 그의 입장에서는 카일과 캐미의 안위가 걱정될 수밖에 없을 것이므로 내게 말했다.
“길드장님, 부탁드립니다.”
나는 그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고 의상을 바꾸었다.
“점퍼 세트.”
알아보는 사람이 없도록 선글라스를 쓰고 있기는 했지만, 일행에 워낙 미남미녀들이 많아서 자연스럽게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내가 입고 있는 옷이 갑자기 바뀌자 공항에 있던 사람들이 술렁였다.
원래 게이머는 던전이 아닌 곳에서 함부로 능력을 사용할 수 없게 되어있다. 하지만 지금은 비상사태이므로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다.
구경꾼들이 핸드폰을 꺼내어 촬영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나는 번개처럼 공항을 빠져나왔다.
7
20분, 아니 15분쯤 걸렸을까?
출발할 때 시간을 확인하지 않았으니 정확히 얼마나 걸렸는지 모르겠다.
다만 내 기대보다도 훨씬 빨리 도착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던전 마스터로서 던전의 좌표를 몸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길을 잃을 일도 없었다.
건물의 옥상에서 옥상으로, 마치 지도를 접어버린 것처럼 순식간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렇게 빠르게 이동한 것이 헛되지 않아, 내가 던전 입구에 뛰어든 직후 안쪽에서 폭발음이 들려왔다.
쿠과과광!-
이미 던전관리소 직원을 비롯한 민간인들은 대피를 한 상황이다. 안타깝게도 던전 안에 있었던 게이머들 중 절반 이상이 사망했지만, 나머지 인원들은 카일과 캐미 덕분에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폭발에 튕겨 나온 두 사람, 카일과 캐미 중 먼저 캐미와 눈이 마주쳤다.
“미스터 조! 길드장님?”
오랜만에 보는 것이라 그녀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드리웠지만, 지금은 인사를 나눌 때가 아니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몰라요. 엄청 강한 여자! 우리는 can’t fight with her! 길드장님 빨리 와서 정말 다행이에요.”
캐미도 안 본 사이 한국어가 많이 늘었다.
적어도 그녀의 말에서 던전을 건너온 것이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카일과 캐미가 힘을 합쳐도 대적하지 못할 만큼 강한 상대라는 것도 알았다.
‘성가시게 됐는데?’
아직 세간에는 이계의 존재라든가, 던전의 생성 이유라든가 하는 것들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피스&호프가 붕괴하는 등 엄청난 사건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들도 일반인들의 뇌리에는 이미 다 지나간 일.
만약 던전 안에서 수준을 뛰어넘는 생명체가 튀어나와 난동을 부린 일이 밝혀진다면……. 대충 무마하기 어려울 것이 뻔하다.
다행히 아직 현장은 조용했다. 필시 사태 해결을 의뢰받은 게이머들이 오고 있겠지만 그들 중 누구도 아직 이곳에 도착하지는 않았다. 사태를 누구보다 빨리 감지한 티코이가 카일과 캐미에게 연락해서 그들이 가장 먼저 이곳에 오게 된 것이다.
‘다행이네…….’
내가 안심을 하는 틈에 암젤이 내 다리를 누르며 외쳤다.
“주인님, 저기 보라옹!”
암젤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더니 먼지를 뚫고 인영 하나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골반을 흔드는 폼이 몸매가 좋고 키가 큰 여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찌릿찌릿 전해지는 마나를 통해 지금껏 싸운 누구보다도 강한 상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상대도 같은 느낌은 받은 걸까?
모습을 완전히 드러낸 여자가 독사 같은 웃음을 지었다.
“네놈이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