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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왕 클리어러-235화 (235/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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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식왕 : 클리어러 235화

    일루시안.

    서열 3위 군주인 그와 연락을 하기 위해서 디아테타는 비밀의 문을 열었다.

    일루시안은 특이한 존재이다. 마법과 정령술을 극대로 연성한 그는 자신의 실체를 없애고 미지의 장소에 숨어 살고 있다. 그의 나이가 몇인지, 언제부터 군주 자리에 올라 있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언젠가부터 디아테타 가문의 조력자 역할을 해왔다. 실체가 없는 스스로는 전투력을 발휘할 수 없기에 누군가에 붙어 존재감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는데, 지금까지는 그것이 디아테타 가문이었던 것.

    디아테타 가문은 일루시안을 통해 막대한 마력과 정령의 힘을 조달받았다. 그리고 디아테타 가문이 왕위자리에 있을 때 일루시안 또한 그에 상응하는 지위와 명예를 약속받았다.

    하지만 현재에 이르러 둘의 관계는 매우 껄끄러웠다.

    이유는 지난 왕위쟁탈전의 최대 하이라이트였던 디아테타와 헤레디투스의 전투에서 일루시안이 자취를 감추었었기 때문.

    다른 군주들은 전쟁에서 패배한 뒤에 관계를 끊었지만, 그는 시작도 하기 전에 연락을 두절했다.

    그와 유일하게 통할 수 있는 수단인 마법 거울도 상대가 응해야만 효력을 발휘한다. 그런 이유로 디아테타는 일루시안을 최대의 배신자로 낙인찍었고 오늘에 이르렀다.

    문 안에 들어선 디아테타는 컴컴한 공간에 우두커니 서 있는 마법 거울을 응시했다.

    수천 년에 걸쳐 신성한 힘을 발휘해온 거울은 약속된 주문이 아닌 한 파괴할 수 없다. 그리고 한 번 파괴하면 절대로 다시 복원할 수 없었다.

    그 말은 거울을 파괴하면 영영 일루시안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만다는 뜻. 일루시안의 입장에서도 같은 도구를 다시 만들 수가 없으므로 이쪽 세상과 단절되고 만다.

    디아테타는 이 사실을 이용해 일루시안을 협박할 생각이었다. 자신을 돕지 않으면 거울을 파괴하겠다고. 그리고 그의 군주 자리를 박탈한 뒤 존재 자체를 역사 속으로 묻어버리겠다고.

    그것은 자기 가문의 거대한 기둥 하나를 제거하는 것과 같았다. 위험부담이 큰일이었기 때문에 조상 중 누구도 같은 일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것도 다 과거의 일이지.’

    가장 중요한 전투에서 도움이 되지 못한 동맹을 유지할 이유는 없다. 설사 막강한 조력자를 잃게 된다 할지라도 처음부터 없었다고 생각하면 그만.

    디아테타는 자기 손가락 끝에 마나를 발현해 거울에 특정한 문양을 그렸다. 군주 간의 협약으로 서로가 연락하고자 할 때만 그리는 특이한 표식.

    위잉, 소리를 내며 거울이 빛에 휩싸였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 이상의 반응은 일어나지 않았다.

    “……훗!”

    디아테타는 막연하게나마 가지고 있던 기대가 무너지는 것을 느끼며 조소를 흘렸다.

    그리고 반대편 손을 들어 방금 그렸던 문양을 거꾸로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거울을 봉인하는 주문이었다. 그녀는 마법 거울을 봉인한 뒤 완전히 파괴할 생각이었다.

    문양이 완성되기 직전. 거울 안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멈, 추어…… 라.”

    디아테타는 흠칫 놀라 손가락을 멈추었다.

    그녀는 곧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분노가 담긴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네 기분은 충분히 이해한다, 아이여.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은 하지 않길 충고한다.”

    아마도 디아테타를 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인물은 온 세상에 일루시안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살았기 때문에 일루시안의 아버지에게도 같은 호칭을 사용했다.

    디아테타는 지금 그것마저 몹시 거슬렸다.

    “당신은 가장 중요한 순간에 나를 배신했어. 거울을 깨 버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변명을 해 보시지.”

    일루시안은 침묵했다. 말을 고르는 것인지, 아니면 아무 변명거리도 없는 것인지.

    그러다 뜻밖의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하하하!”

    그 뒤에는 변명이라고 하기에 너무도 떳떳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 거울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고 믿는구나. 그 가소롭도록 순진한 생각도 내가 너희들에게 심어놓은 것일 뿐. 의심할 줄 모르는 인간은 어찌나 하찮은지…….”

    디아테타는 깜짝 놀라 거울에 대고 있던 손가락을 떼어냈다.

    “뭐라고?”

    “과거의 어느 순간까지 그것은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너희 가문을 신뢰하기에는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겪었어.”

    디아테타의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생각지도 못한 얘길 들었기 때문에 가문이 모욕을 당해도 화를 낼 수 없었다.

    “나는 이미 오래전에 다른 수단을 만들어두었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지긋지긋한 네 가문과 떨어질 날만 기다리며!”

    “흥! 나와 관계를 끊으면 누구와 손을 잡을 건데? 네 조력을 제대로 발현할 수 있는 사람은 나 말고는 없다. 다른 군주들은 너의 마력을 담을 그릇이 못 돼!”

    “그래. 그래서 나는 싫어도 너희 가문과 관계를 유지했던 거지. 하지만 더는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일루시안의 말을 들은 디아테타는 벼락같은 충격을 받았다.

    대화의 흐름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설마…… 헤레디투스와 결탁한 것이냐?”

    “후후후…….”

    일루시안은 대답 대신 웃음만 흘렸다. 그것을 긍정의 대답이라고 해석한 디아테타가 흥분했다.

    “빌어먹을 늙은이! 우리가 너한테 해준 게 얼만데 이따위로 은혜를 갚아? 이 망할 늙은이!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닥치지 못할까!”

    거울을 쩌렁 울리며 터져 나온 노성에 디아테타가 욕을 멈추었다. 실로 서열 2위 군주인 그녀의 품격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

    일루시안이 하찮다는 듯 혀를 찼다.

    “은혜라니? 누가 누구한테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속세를 떠난 내가 호칭뿐인 군주 자리에 연연할 줄 알았느냐? 너희는 그저 내 능력을 시험할 그릇이었을 뿐이다. 만약 내게 육체가 있었다면 너 따위는 벌써 내 발밑을 기었을 터! 어디서 고얀 혓바닥을 함부로 놀리느냐, 이년!”

    이제까지는 일루시안의 태도가 지금처럼 막 나갔던 적이 없다. 디아테타는 후계자로 지정된 뒤로 아버지가 일루시안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아왔으며, 비록 아이를 대하는 것 같은 말투를 사용하긴 했어도 도를 넘는 말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디아테타는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일루시안이 정말로 헤레디투스와 결탁했다면 자신은 영영 왕의 자리를 차지할 기회가 없을 것이다.

    ‘잠깐…….’

    거기까지 생각한 디아테타는 지금의 대화에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만약 정말로 일루시안이 헤레디투스 쪽에 붙었다면 이 대화는 아무 쓸모가 없다. 거울 말고도 이쪽 세상과 통할 수단이 있으면 일루시안은 굳이 자신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작 내게 욕이나 하자고 부름에 응한 것은 아닐 테고…….’

    일루시안이 자신의 가문을 썩 좋게 평가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겠지만, 그 말을 전하기 위해 대화에 응할 만큼 그는 얕은 인물이 아니었다.

    “……너는 아직 헤레디투스 쪽에 붙지 않았군.”

    “하하하! 글쎄, 어떨까?”

    “나는 너에게 거울 말고 세상과 통할 수단이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다. 내가 믿길 바란다면 증거를 보여라.”

    “……쯧쯧. 멍청한 년.”

    “뭐?”

    “너는 나한테 증거를 보여라 말아라 할 처지가 아니다. 네 말대로 내가 아직 헤레디투스와 동맹이 되지 않았다고 치자. 그렇다면 너는 나한테 무릎을 꿇어서라도 제발 그러지 말라고 빌어야 할 처지 아니냐?”

    “으윽!”

    디아테타는 분한 나머지 입술을 짓씹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일루시안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다. 지금 아쉬운 것은 전적으로 자신이니까. 왕이 될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무조건 일루시안을 붙잡아야만 한다.

    하지만 실제로 무릎을 꿇고 부탁을 하기에는 고고한 자존심이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크크크…….”

    귀엽다는 듯 웃음을 흘린 일루시안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너에게 정말로 무릎을 꿇으라고 할 생각은 없으니까. 내가 그딴 걸 보아봤자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디아테타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짐짓 강한 척을 했다.

    “그러면 대체 날더러 어쩌라는 거야?”

    “네가 앞으로도 계속 내 조력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증명해 보여라.”

    “뭐?”

    “너는 지금 세상이 돌아가는 모양이 뭔가 수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그게 무슨 말이지?”

    “어떻게 기를 못 펴고 쭈그러져 있던 오더 놈들이 갑자기 이만큼 세를 불렸는지 궁금하지 않느냔 말이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곧 죽어 없어질 놈들인데. 놈들이 이만큼 세력을 키운 것이 내게는 기회이다. 내가 왕좌에 앉을 절호의 기회!”

    “쯧쯧. 곧 죽어도 자기 생각밖에 안 하는구나. 하긴 그런 성격도 관점에 따라 장점이 되기도 하겠지. 하지만 너에게 기회가 돌아가려면 어찌 됐든 오더 놈들이 일망타진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나는 그 일을 쉽게 해치울 방법을 알려주려는 것이다.”

    “그게 자격을 시험하는 방법이라고?”

    “그래. 잘 생각해봐라. 너에게는 손해 볼 것이 하나도 없는 제안이다.”

    디아테타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분명 대화의 흐름은 자신이 처음에 기대했던 것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일루시안을 찾아온 이유도 애초에 오더 놈들을 제압하기 위해서였다.

    일루시안이 어떻게 이쪽 세상일을 자신보다 잘 아는지 궁금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에게 오더 놈들을 제압할 수단을 얻는 것이다. 그로 인해 일루시안의 신뢰까지 얻을 수 있다면 말 그대로 손해 볼 것이 전혀 없는 일 아니겠는가?

    “……더 자세히 말해봐.”

    “후후후…….”

    일루시안은 자신이 조사한 내용들을 디아테타에게 말했다. 오더 군주들의 뒤에는 막강한 조력자가 있으며, 그는 바로 이면 세상의 인물이라고.

    그들이 최근 갑자기 전력이 강해진 것도 이면의 세상에서 강자들이 대거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그 통로를 자신이 알고 있으며, 그곳으로 가면 이면 세상의 조력자와 직접 대면할 수 있다. 그 고리만 끊어내면 이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은 아주 쉬울 거라는 것이었다.

    “그럴 수가…….”

    디아테타는 방금 들은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조사만 하면 나름의 정보는 얻을 수 있었겠지만, 거기까지는 관심이 없었다고 할까?

    어디까지나 그녀는 오더 놈들을 하찮게 여기고 있었으니까. 아무리 발악을 해도 자신에게 대적할 수 없을 거라고 여겼다.

    “이 얘기를 들었으니 네년은 당장 가서 그놈만 죽이면 끝이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는 결코 쉽게 상대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지금의 네 힘으로는 역부족이야.”

    “뭐라고?”

    디아테타가 또다시 자존심을 내세우려 하기에 일루시안이 먼저 말했다.

    “아이여. 네가 지금보다 강해지고 싶다면 나의 조력을 받아야 한다. 너의 조상들도 계속 그런 방식으로 왕이 되었다. 나는 지금 너에게 힘을 빌려주겠다. 비록 절반의 힘만 주겠지만, 네 자격을 입증했을 때는 나머지 절반의 힘도 모두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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