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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왕 클리어러-233화 (233/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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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식왕 : 클리어러 233화

    디아테타가 접객홀로 내려갔을 때 그곳에는 흔치 않은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군주 서열 10위권 안팎인 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

    자신이 이들을 대면하는 것은 오랜만의 일이었다.

    한때는 자신의 가문에 조공을 하며 신하나 다름없는 지위에 있는 자들이었지만 왕위쟁탈전이 벌어진 뒤에 그 관계가 끊어져 버렸다.

    계기는 헤레디투스와의 전쟁에서 참패하면서였다.

    자신은 누가 뭐래도 이계왕의 1순위 후보였고, 간접 세력까지 합하면 이계 전체 전력의 3분의 2를 넘는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에 비하면 초라하다 싶을 정도의 배경을 가진 헤레디투스가 약진을 하면서 쉬울 줄 알았던 전쟁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은 결국 군사력이다.

    자신이 힘을 잃고 재기할 가능성이 보이지 않자 동맹을 맺었던 군주들도 하나씩 떠나갔다.

    왕과 서열 2위는 숫자로는 한 단계밖에 차이 나지 않지만, 권력으로 비교하면 All or Nothing이나 다름없다.

    군주는 자신의 영지에서만 세력을 발휘하는 데 반해 왕은 전체 세상을 통할한다.

    누구든 전쟁을 할 생각이 아니라면 왕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며, 왕이 명령을 내리면 자신의 군주 자리까지 내놓아야 했다.

    ‘그런데…….’

    디아디테가 등장하자 넓은 홀이 침묵에 휩싸였다.

    이곳에 모인 군주들도 자신들이 염치없는 부탁을 하러 온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오랜 동맹 관계를 스스로 끊었던 자들이니까. 그것도 새로운 왕의 눈치를 보아 디아테타를 버리다시피 했다.

    디아테타가 상석에 앉아 자신의 보라색 입술을 핥았다.

    서로 눈치를 보던 다섯 군주 중 하나가 결심을 하고 입을 열었다.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여왕님. 더 일찍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방금 말을 꺼낸 자는 서열 4위 칼쿠도였다.

    그가 나서서 입을 연 것도 이곳에 모인 자 중 가장 서열이 높기 때문이다.

    “어머, 여왕이라니 과분한 호칭이군요. 한편으로는 그리운 호칭이기도 하고요.”

    디아테타가 조소를 흘렸다.

    칼쿠도는 감히 그녀를 마주 보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저희가 여왕님을 뵙지 못한 것은 헤레티투스 때문이었습니다. 겨우 전쟁이 멈추고 영지를 추스르게 되었는데, 또다시 아비규환을 치를 자신이 없었으니까요.”

    과거 동맹을 끊었던 군주들도 할 말은 있었다.

    디아테타와 암묵적으로 관계를 단절했다고 해서 곧바로 헤레티투스와 결탁한 것은 아니니까.

    물론 그렇게 하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헤레디투스에 의해 거절당했다.

    그는 자신에게 한 번이라도 창끝을 겨눈 자들과는 동맹을 맺지 않았으니까.

    “귀찮은 부분은 건너뛰기로 하죠. 어차피 당신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본인 목숨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그 개 같은 목숨을 부지하려고 과거에는 우리 쪽에 붙었고 그 뒤에는 헤레디투스의 눈치를 보았던 것 아닙니까? 나는 벌레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행동하든 관심이 없어요. 내 목표는 단 하나. 헤레디투스에게 빼앗긴 내 왕위를 되찾는 것뿐입니다.”

    개 같다는 표현에 이어 벌레라는 소리까지 들은 군주들이 침음을 삼켰다.

    나름대로 쟁쟁한 이름을 가진 그들이고, 개개인의 프라이드가 대단히 높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는 감히 한 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분하기는 해도 디아테타의 말이 맞다.

    자신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녀를 찾아왔고, 필요에 따라 오랜 동맹을 끊기도 하는 등 이기적인 행동을 했었다.

    디아테타는 재미있다는 듯 다섯 명의 군주들을 하나씩 흘겨보았다.

    “좋아요. 내가 힘을 빌려주기로 하죠. 그렇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그녀의 말을 들은 군주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하지만 곧 위화감을 느낀 칼쿠도가 물었다.

    “그……. 조건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디아테타는 당연하다는 얼굴로 다리를 꼬았다.

    “내가 왕위를 되찾는 걸 도우세요. 또 한 번 나를 배신했다가는 한 사람씩 직접 찾아가 그 벌레 같은 모가지를 따버릴 테니 그렇게 알고요.”

    꿀꺽.

    누군가가 삼킨 마른침이 홀 안을 울렸다.

    군주들은 머리를 낮추고 자기들끼리 속닥거렸다.

    청력을 조금만 돋우면 그 말들을 들을 수 있건만 디아테타는 무심하게 자기 앞의 과일주만 들어 한 모금 삼켰다.

    잠시 후,

    칼쿠도가 전체를 대표하여 말했다.

    “알겠습니다. 저희들은 앞으로, 그리고 끝까지 여왕님을 따르겠습니다. 여왕님이 필요하신 일에 저희가 가진 모든 힘을 지원하겠습니다.”

    “반가운 얘기로군요. 하지만 말로 하는 거면 무슨 소용이겠어요? 말은 아무 가치도 없다는 걸 우리는 이미 한 번 배웠잖아요?”

    디아테타가 양 손바닥을 위로 향한 채 마나를 운용했다.

    곧 그녀의 손바닥 위에 다섯 개의 보라색 불꽃이 떠올랐다.

    그것들은 둥실 떠올라 각 한 명씩의 군주를 향해 날아갔다.

    불꽃의 의미를 깨달은 군주들은 이를 악물었지만, 자신들의 처지를 생각하면 몸을 뺄 수도 없었다. 어쩌면 오더 측 놈들에게 굴욕적으로 목숨을 잃는 것보다 이쪽이 나을지 모른다. 아니, 확실히 이쪽이 낫다.

    디아테타가 날린 불꽃이 군주들의 몸에 낙인을 새겼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살이 탔지만 최소한의 긍지를 가진 군주 중 누구도 신음을 흘리지 않았다.

    디아테타는 공식적으로 다섯 명의 군주를 자신의 신하로 삼았다.

    만약 누군가가 배신을 한다면 저주의 낙인이 그자의 심장을 녹여 버릴 것이다.

    “호호호!”

    홀 안 가득 디아테타의 만족스러운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10

    나는 중국과 아랍에미리트를 거쳐 세 번째로 러시아에 갔다.

    러시아는 중국 못지않게 까다로운 나라이다.

    하지만 지리적으로 가까운 나라이기도 하고, 중국처럼 면적이 넓기 때문에 두 명의 동료를 찾을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노아가 말하길 러시아는 중국보다 더 사업적으로 얻을 것이 많다고 한다.

    중국보다는 절차의 비합리성이 적고, 경제 개방성이 크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

    내 목적은 어디까지나 동료를 찾고 이계의 영지를 확보하는 데 있다.

    사업이야 노아와 티코이라는 영혼의 투톱이 스스로 영혼을 갈아 넣어 분발하고 있기 때문에 나 같은 미숙자가 끼어들 필요가 없다.

    지금까지 네 번의 공략이 순조로웠기 때문에 퀘스트 공략에 탄력이 붙은 느낌이다.

    그도 그럴 수밖에, 나와 레벨이 연동되는 동료가 네 명이나 더 생겼으니까. 게다가 그들은 전부 자기만의 특기를 갖고 있었다.

    게임공략이 전문인 나답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동료들만 받아들였었기 때문.

    A급 던전을 공략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기 때문에 동료들이 앞장서고 나는 뒷짐을 진 채 뒤를 따라갔다.

    러시아에서의 귀찮은 일(대통령과의 만찬. 쓰디쓴 보드카를 마셔야 했다.)을 끝내고 다섯 번째로 방문한 던전에서 동료를 만났다.

    그 후 순조롭게 던전 마스터까지 공략을 했는데, 로치온으로부터 예상치 못한 전언이 날아들었다.

    -조성오! 우리는 패배했다! 이곳으로 오지 마라!

    격렬하게 싸우는 중인 듯 그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패배했다니?”

    지금까지의 공략이 순조로웠던 만큼 더 어안이 벙벙했다.

    -놈들이 힘을 합쳤어! 병력을 모아 전선을 형성했다!

    간단한 말이었지만 상황이 어떠한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혹시 헤레티투스가 나선 거야?”

    -아니, 디아테타가 선봉에 섰다. 그녀는 헤레티투스와 끝까지 자웅을 겨루었던 군주야. 그 여자가 다시 세력을 모았다면 결코 만만히 볼 수 없어. 아니, 십중팔구 우리가 밀린다.

    “그 정도야?”

    충격이었다. 설마 했던 반전이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다니.

    로치온이 나더러 이계에 오지 말라고 한 이유는 명확했다. 이미 패배한 싸움이니까.

    혹시라도 이쪽 전력에 누수가 있으면 안 된다. 어디까지나 공략의 핵심은 나와 NPC들이기 때문에.

    지금 수행하는 퀘스트의 목적은 동료를 찾는 것이다.

    그래서 소기의 성과를 이룬 것은 틀림없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던전 이면의 영지를 차지하는 것은 보너스의 개념이라 해도 결코 작은 보너스가 아니니까.

    나중에 로치온에게 들은 말에 따르면 이번 패배로 상당한 병력을 잃었다고 한다. 다행히 군주 중 사망한 자는 나오지 않았지만, 이쪽의 전략을 봉쇄당하고, 병력까지 잃었다는 것은 크나큰 손실이었다.

    더구나 카오스 측 군주들이 동맹을 맺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오합지졸로 모은 병사들 사이에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그들 개개인이 카오스 성향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이 전쟁이 승리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흠…….”

    러시아에서의 두 번째 던전공략을 앞두고 나는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해야 하지?’

    지난번 연속 대결 퀘스트를 수행한 뒤로 대결의 탑에 가는 길도 막혀버렸다.

    군주들만 따로 불러내 죽일 수 없게 됐다는 뜻.

    ‘……정면돌파밖에 방법이 없나?’

    지금까지의 공략을 돌아보면 상대적으로 작은 전투력과 병력에도 불구하고 꼼수를 이용해 그것을 극복해왔다.

    그럴 수 있었던 데에는 당연히 베그리프의 설계가 큰 몫을 했고.

    그녀가 움직일 수 없게 된 지금 오히려 적이 더욱 강성해졌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어쩌면 여기까지 꼼수가 통한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 * *

    NPC를 비롯한 OG의 동료들.

    그들을 이계로 보낸다. 가장 좋은 것은 내가 직접 가는 것이지만 나는 이곳에서 퀘스트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

    OG의 동료들은 각자가 나와 같은 레벨이기 때문에 오더측의 전력을 엄청나게 상승시킬 것이다.

    내 결심을 전해 들은 동료들은 저마다 같은 목소리를 냈다.

    “주인님의 명령이라면 당연히 따라야죠!”

    “주인님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기꺼이 바치겠습니다.”

    “오빠도 곧 따라올 거지?”

    암젤만이 마뜩치 않은 표정으로 바닥을 보다가 가장 늦게 대답했다.

    “주인님, 무사해라옹. 무슨 일이 생기면 당장 여기로 돌아올 거다옹. 나는 이계 쪽 인간들이 다 죽어도 상관 없다옹. 나한테는 주인님이 가장 소중하다옹.”

    이기적인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가슴이 훈훈해지는 말이기도 했다.

    나는 그녀를 포함한 동료들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우리는 곧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나는 너희들을 절대로 떠나지 않아.”

    이상한 일이다. 내 안에서 동료들을 향한 마음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게임에 갇혔을 때 NPC들은 그저 공략을 쉽게 할 파티원에 불과했다.

    한편으로는 인격을 가진 존재라기보다는 게임을 위한 도구로만 생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돌아보니 나는 그들과 인생의 절반을 함께 보냈다.

    생사를 수없이 넘나들었다는 점에서 친구 이상의 가족 같은 존재들이었다.

    나는 진심을 담아 강조했다.

    “죽지 마. 아니, 다치지도 마. 나는 너희들을 한 명도 잃고 싶지 않아.”

    뭔가 조금 과하게 부끄러운 분위기가 되었지만, 지금만큼은 몸을 빼고 싶지 않았다.

    “주인님~~!”

    “사랑해요, 주인님!”

    “흐어어엉~~”

    나는 내게 달려드는 동료들을 마주 안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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