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8
독식왕 : 클리어러 228화
4.
‘22명인가…….’
나는 숨을 헐떡이며 벽에 기대앉았다.
[십분 간 휴식이 주어집니다.]
원래도 짧은 휴식시간이 차차 단계를 지날수록 찰나처럼 느껴졌다.
‘생각보다 더 힘드네…….’
힘든 정도가 아니라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도 없다.
일반 몬스터라면 수십, 수백 마리를 사냥해도 힘들 게 없지만 군주를 연이어서 상대하는 것은 그와 차원이 달랐다.
‘어떡하지?’
예상했던 대로 군주전은 층을 올라갈수록 더욱 힘들어졌다.
마지막 남은 한 명의 군주는 지금까지 상대한 군주들보다도 한층 강력할 터.
‘제길…….’
시간이 일 초 일 초 지나는 것이 너무 초조하게 느껴진다.
포션이 떨어진 것은 물론이고 쓸 수 있는 큰 기술들은 모두 사용했다.
열다섯 명이 넘어가면서부터는 하나하나 정령왕의 기운을 끌어다 썼기 때문에 더욱 체력 소모가 심했다.
‘할 수 있을까?’
단 한 가지 믿을 구석이라면 내 손아귀에서 웅웅거리고 있는 백옥보뿐이다.
역시나 녀석은 군주들의 피를 빨아들이며 급성장을 이루었다.
이놈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기분이 직접 전해지는 것만 같다.
나와는 정반대의 기분. 어서 빨리 한 놈이라도 더 베고 싶다는.
“쳇!”
몬스터는 특성이라도 꿰고 있지만 이계 군주는 그런 것도 없다.
시간이 있었더라면 수보타에게 군주들의 특성을 들었을 텐데, 너무 안이했던 것은 아닐까 후회되었다.
휴식 시간을 알리는 메시지가 떠오르고 오 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허공 한가운데에서 빛이 터졌다.
‘뭐야? 아직 십 분이 안 지났잖아?’
당황해서 몸을 일으키자니 밝은 빛이 점점 잦아들며 누군가의 모습이 나타났다.
긴 금발을 나풀거리는 아름다운 여자.
대개 험악한 인상을 가지고 있는 카오스 군주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 신비로운 분위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멍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잔잔한 빛 무리를 뿌리고 있는 여인은 허공에 떠오른 채 입을 열었다.
“조성오, 드디어 당신을 직접 만나는군요.”
“네? 저를 아나요?”
여인이 자아내는 고고한 분위기 탓에 저절로 존댓말이 나왔다.
“저의 이름은 베그리프. 당신으로 하여금 이 게임을 시작하게 한 장본인입니다.”
“뭐?”
본인 소개를 듣자마자 곧바로 반말이 튀어나갔다.
실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나는 항상 복잡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설명도 없이 십년이나 게임 안에 가두고, 현실로 돌아와서도 더욱 힘든 게임을 이어가게 했다.
그 과정에서 즐거움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강제적으로 게임을 한 것에 있어서는 강한 반발감이 있었다.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그녀가 말했다.
“역시……. 저를 미워하시는군요…….”
몹시 슬픈 표정이기는 하지만 자금 내 눈엔 그런 것이 들어오지 않았다.
“왜 나지? 열 살밖에 안 되는 애를 어쩌자고 게임 안에 가둔 거야!”
“……당신밖에 없었습니다. 이 일을 해낼 사람은.”
“그럴 리가 있어? 나보다 머리 좋고 힘 센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아닙니다. 이 일은 당신이 아니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그것을 실제 증명을 해보였지 않습니까?”
베그리프의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확실히 지금까지 많은 난관을 겪으면서도 그럭저럭 게임을 이어왔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머리가 좋고 운동 능력이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게임을 하는 데 있어서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대단하네. 게임 시스템을 도입할 생각을 하다니…….”
“아무리 저라도 개인에게 한꺼번에 능력을 부여하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인간들이 하는 게임의 틀을 빌리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했죠. 그리고 그것을 누구보다 좋아하고 잘하는 당신을 선택한 것이고요.”
얘기를 하는 동안 베그리프의 몸은 간헐적으로 깜박거렸다. 마치 곧 수명이 다할 전구처럼.
그것을 보자 내가 품고 있던 가정이 떠올랐다.
“혹시 지금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저는 지금 헤레디투스에게 감금되어 있습니다. 결계를 펴고 있기는 하지만 이대로 가면 힘이 바닥나는 것도 시간 문제죠. 그래서 당신에게 부담이 되는 퀘스트를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역시…… 그랬군.”
나는 그 버거운 퀘스트 때문에 상당히 곤경에 처한 상태였다.
평소라면 어떨지 몰라도 지금은 심신이 지친 상태이기 때문에 저절로 반발심이 올라왔다.
“그래도 적당히 해야지! 내가 죽으면 희망이고 뭐고 다 사라지는 거 아니야?”
“맞습니다, 조성오. 하지만 헤레디투스와 카오스 군주들을 막아내지 못하면 양쪽의 세상 모두 혼돈에 집어삼켜질 것입니다.”
베그리프가 손을 뻗었다. 검지로부터 시작된 가느다란 빛줄기가 내 머리까지 이어졌다.
피하려고 했지만 마치 가위에 눌린 것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번쩍!
시야가 암전되더니 영상이 머릿속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폐허가 된 세상. 울부짖는 사람들. 신처럼 군림하는 악마, 아니, 카오스 군주들.
긴 영상은 아니었지만 그 끔찍함을 통감하기에는 충분했다.
적어도 지구상의 모든 던전에서 몬스터들이 튀어나와 인간들을 살육하는 장면만으로도 어떤 공포 영화보다 잔혹했다.
카오스 군주의 병사로 전락하여 그들과 함께 인간 세상을 통할하는 게이머들의 모습을 보는 것으로 영상은 끝이 났다.
“조성오. 이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막을 수 있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습니다. 당신에게 부담을 줄 수밖에 없는 제 입장을 이해해주세요.”
“하아…….”
영상을 보고나자 더 이상 반발을 할 수 없었다.
왜 나냐고 칭얼댈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게임을 그만둘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보다 현실적인 문제를 입에 담았다.
“나는 지금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도 없어. 스물세 번째 군주놈이랑 싸울 힘이 없다고.”
베그리프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움직였다.
[생명력이 백퍼센트 회복되었습니다.]
[마나가 백퍼센트 회복되었습니다.]
“조성오, 제가 당신을 보는 것은 이게 마지막이 되겠네요. 말씀드렸다시피 퀘스트는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저는 제 나름대로 최후의 힘을 쥐어짜 헤레디투스의 계획을 저지할 생각입니다. 당신이 지금까지 보여준 노력, 희생, 그리고 성실함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베그리프의 환영이 움직이더니 내게 다가왔다.
어어 하는 사이에 그녀가 나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그것은 육체가 육체를 끌어안는 부드러움이 아니었다.
마치 따뜻한 빛이 몸을 감싸는 것 같은 형이상학적인 포근함이다.
“저는 실체가 없습니다.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일시적으로 만들어낸 형상일 뿐이지요.”
“그럼 여자가 아니라는 거야?”
“네, 제게 성별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저 당신이 좋아할 만한 모습을 구현한 것뿐입니다.”
좀 더 긴 대화를 나누고 싶지만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나를 감싼 베그리프에게서 절박함이 전해진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죽지 마라. 나중에 나를 고생시킨 책임을 꼭 물을 테니까.”
“후후…… 저도 그랬으면 좋겠네요. 당신을 꼭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를 감쌌던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젠장!”
그야말로 복잡한 기분이 아닐 수 없다.
베그리프의 정체가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를 미워할 수도 좋아할 수도 없다.
번쩍!
이계 군주가 등장할 때 특유의 현상이 일어나더니 덩치 크고 포악한 생김새를 가진 카오스 군주가 등장했다.
‘네가 마지막이렷다?’
베그리프가 생명력과 마나를 회복시켜 주었기 때문에 더 이상 두려움은 없었다.
나는 손 안에서 허기짐을 토로하고 있는 백옥보를 치켜들었다.
“두리번거리지 말고 빨리 덤벼, 이 멍청한 놈아!”
5
앰블레마는 형태를 갖추어가는 문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수천 명의 마법사가 동원된 어마어마한 작업.
이 문을 설계한 것은 자신이지만 실제로 만들 수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이계왕의 마나와 그의 권세로 부릴 수 있는 엄청난 인력이 아니었으면 결코 불가능했을 일.
처음 설계는 베그리프의 능력을 감안하여 작성되었다.
만약 그가 배신을 하지 않았더라면 훨씬 쉽게, 그리고 훨씬 빠르게 문을 완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쉬워…….’
앰블레마는 여전히 베그리프의 존재에 미련을 갖고 있었다.
수천 년 동안 마법사들이 남긴 정수.
그 안에서 태어난 생명 아닌 생명, 정령 아닌 정령을 이용할 수 있다면 훨씬 많은 기적 같은 일을 행할 수 있었을 텐데.
아마 앞으로의 역사에 다시는 같은 존재가 탄생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가 문에서 시선을 거두었을 때였다.
퍼어엉!-
갑자기 굉음이 들리며 어마어마한 열기가 폭발했다.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마법사들이 혼비백산하여 영창을 하는 것을 멈추었다.
허공의 한복판. 거대한 화룡이 날개를 퍼덕이며 나타났다.
화르르르륵-
불길에 사로잡힌 마법사들이 즉각 비명을 지르며 타올랐다.
수십 명이 목숨을 잃고 나머지는 꽁무니를 빼고 달아났다.
‘뭐지?’
앰블레마는 위화감을 느꼈다. 갑자기 나타난 화룡.
자신이 알기로 용은 이런 식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더구나 지금 날개를 퍼덕이는 존재에서는 실체로부터 느껴지는 위압감이 없었다.
대신 매우 친숙한 느낌. 농축된 마법의 감각이 전해져 올 뿐이었다.
‘설마…….’
앰블레마는 즉각 영상을 띄워 베그리프가 결계 뒤에 숨어 똬리를 틀고 있는 장소를 내비쳤다.
하지만 영상에서 더는 결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을 생성하고 있던 ‘정수’도 더 이상 눈에 띄지 않는다.
용을 응시하는 그녀의 눈이 커졌다.
‘베그리프…….!’
이제 남아 있는 힘도 얼마 없을 텐데 이곳에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 그걸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베그리프가 이곳에 나타난 것은 바로 이면의 세상으로 향하는 문을 부수기 위한 것일 터.
아니나 다를까?
마법사들을 위협해서 쫓아 보낸 용이 몸을 회전시켜 문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입을 쩍 벌리고 불길 대신 마법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안 돼!”
일 년에 걸쳐 만들어진 문이 실타래가 풀려나가듯 바깥에서부터 천천히 풀어헤쳐지기 시작했다.
앰블레마가 경악을 하며 발을 구르던 그때, 무거운 발소리를 내며 누군가가 뛰어왔다.
부하의 보고를 들은 헤레디투스가 친히 이곳으로 발길을 향한 것.
그는 분노에 가득 찬 음성으로 물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앰블레마가 몸을 움츠리며 대답했다.
“왕이시여. 베그리프입니다.”
“베그리프!”
화룡을 응시하는 헤레디투스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