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2
독식왕 : 클리어러 222화
10.
나는 동료 NPC들과 함께 A급 던전에 있는 통로를 통해 이계로 건너갔다.
세세한 전황은 로치온을 비롯한 오더 군주들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두 집단 사이에 전쟁은 이계 기준으로 근 수백 년 중에 가장 큰 전쟁이었다.
왕위 쟁탈전이 끝난 뒤에는 대개 오랫동안 평화가 이어지기 마련이고, 근래는 이면 세상으로 건너가기 위한 물밑 작업들을 하느라 대부분의 군주가 전쟁을 자제하고 있었으니까.
자그마치 7명의 카오스 군주와 12명의 오더 군주들이 서로 맞붙었다.
단순히 군주의 수만 보면 오더 군주들이 앞서는 형국이지만 서열에서 밀리고 있고, 영지를 차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사의 숫자도 부족했다.
더구나 콘치온은 이면 세상에 진입하기 위해 가용한 병력을 모두 집결시켰다.
이쪽 세상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각오로 모은 병력이기 때문에 그 숫자가 수만에 이르렀고, 개개인의 실력도 뛰어난 정예들이었다.
내가 맡은 역할은 전쟁이 최대한 길어지지 않도록 막는 것.
전쟁이 길어지면 승리를 하더라도 잃는 것이 많아진다.
복구에도 엄청나게 많은 시간이 소요되어, 오히려 승리를 했다는 사실 자체가 무색해질 수도 있었다.
전체 병력의 숫자는 오더 진영이 부족하다.
오더 군주들은 자신들의 영지를 지키기 위한 병력을 남겨두고 왔기 때문에 출진할 수 있는 병사의 여력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이다.
이 또한 싸움이 길어지면 안 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나는 적당한 간격을 두고 들어오는 전언을 듣고 콘치온 측 군주들의 위치를 파악했다.
전투의 기본적인 형세는 오더 군주들이 콘치온 측 병력을 둥글게 에워싸고 안으로 파고드는 모양새였다.
반면 나는 던전과 이어진 통로를 통해 콘치온 측 진영의 심층부로 진입할 수 있었다.
‘가장 빨리 처치할 수 있는 군주는…….’
통로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은 57위 군주 마시나이다. 그 다음은 58위 군주인 필트로.
나는 틴테에게 명령했다.
“너는 필트로를 맡아.”
틴테는 암살이 주특기이고, 군주 한 명을 혼자서도 처치할 수 있는 전투력을 가진 NPC이다.
단, 어지러운 전황 중에 계속 은밀 기동을 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에 그녀가 은밀히 목을 벨 수 있는 군주의 숫자는 한 명이 한계이다.
다음으로는 트레앙과 칼리타에게 명령했다.
“둘은 길을 뚫도록 해.”
통로 끝을 통해 이계로 튀어나온 나는 엄청난 기세로 부딪치고 있는 전장의 풍경에 아찔함을 느꼈다.
아직까지 두 진영은 팽팽한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비록 오더 진영의 병력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기습을 통해 적을 우왕좌왕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비교적 선전을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싸움이 불리해질 것만은 기정사실.
그렇게 되기 전에 내가 싸움의 흐름을 확실히 결정지어야 한다.
명령을 받은 트레앙과 칼리타는 용맹하게 길을 뚫고 돌진했다.
가장 안쪽에 위치하고 있던 콘치온 측 병사들은 자기들이 직접 전투를 할리가 없어 긴장을 놓고 있다가 갑자기 돌진하는 나와 NPC들 때문에 깜짝 놀랐다.
나는 뚫린 길을 통해 일직선으로 내달렸다.
멀리 군주 마시나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말에 올라타 다소 방관자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던 그녀는 누군가 달려드는 기세를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나는 점퍼 스킬을 사용해 땅을 박차고 공중을 날았다.
절대자의 창이 한 번 번뜩였을 때는 이미 마시나의 목이 분리되어 바닥을 굴렀다.
[57위 군주 마시나를 쓰러뜨렸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하나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58위 군주 필트로를 쓰러뜨렸습니다!]
틴테가 군주의 암살에 성공한 것이다.
‘다음은…….’
나는 다소 먼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54위 군주인 비보차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마시나보다 빠르게 심층부로부터 시작된 적의 기습을 눈치챘다.
서둘러 부하들을 불러들여 방어를 단단히 했다.
나는 절대자의 무기를 인벤토리에 넣고 마법사의 옷으로 의상을 바꾸었다.
검은 소환술을 발동해 가브리엘과 박재환, 그리고 여덟 명의 저주받은 기사들을 소환했다.
소환수들은 기꺼운 함성을 지르며 적 병사들을 향해 달려갔다.
암젤이 사용한 소환술은 호랑이와 사자 떼로 공중을 까맣게 뒤덮게 하고, 아린이 연주하는 혼란의 곡은 적의 귀를 찢을 듯이 괴롭혔다.
11.
“허억! 허억!”
포션을 충분히 마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체력이 부족했다.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NPC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말 그대로 소수정예였기 때문에 적 진영을 안쪽부터 돌파한다는 것이 상당히 힘이 들었다.
‘그래도!’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 전쟁만은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졌다가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잃는 싸움이기 때문에.
아직도 쓰러뜨려야 할 카오스 군주는 넘치도록 많다.
다만 이번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최소한 그들과 정면에서 맞부딪칠 수 있는 교두보는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자그마치 일곱 개의 영지를 추가로 손에 넣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15미터 거리에서 병사를 부리고 있는 53위 군주 포예트를 노려보았다.
그를 향해 양손을 뻗은 채로 정령왕의 전령 클래스를 발동했다.
하루에 딱 한 차례 정령왕의 힘을 빌릴 수 있는 능력!
바람의 정령왕 디스케수스가 발한 태풍이 눈앞의 적들을 순식간에 쓸어버렸다.
후두두두둑-
그 사이를 뚫고 틴테가 번개처럼 돌진했다. 그녀는 태풍으로 몸이 떠밀린 군주 포예트의 심장을 단번에 꿰뚫었다.
“끄아아악!”
[53위 군주 포예트를 쓰러뜨렸습니다!]
지금까지 총 여섯 명의 군주를 쓰러뜨렸다. 이제 남은 것은 콘치온 한 명뿐.
나와 멤버들이 군주들을 차례차례 격파한 탓에 오더 군주 측 진영의 사기는 크게 올라 있었다.
승부의 추는 이미 우리 쪽으로 기울었지만 그래도 마지막 남은 적장의 목을 베지 않으면 이번 전쟁을 끝맺을 수 없다.
같은 생각을 콘치온도 한 모양이다.
그는 이 싸움이 어렵게 흘러가는 이유, 결정적으로 자신을 제외한 모든 군주가 죽게 된 원흉이 바로 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나와 콘치온이 서로를 마주보고 대치하게 되었다.
다만 우리 옆에는 충직한 부하가 한 명씩 있었다. 내 옆에는 암젤, 그리고 콘치온의 옆에는 도블레.
도블레는 군주 자리도 거절하고 콘치온의 옆에서 싸우기로 결심한 적장의 심복이었다.
내가 돌진하기 전에 콘치온과 도블레가 먼저 내 쪽으로 달려왔다.
나는 그들이 가까워지자 양팔을 활짝 벌렸다.
‘공간 생성!’
주위의 배경이 싹 지워지고, 새로 생겨난 공간에 네 사람이 갇혔다.
‘끝났군.’
내가 콘치온을 아공간에 가두었으니 결과적으로 전장에 카오스 군주가 한 사람도 남지 않게 된 것.
콘치온이 혼이 빠진 것처럼 중얼거렸다.
“너는 대체 뭐하는 놈이냐.”
“……두 세상을 독식하게 될 왕이다.”
내 대답에 콘치온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 옆의 도블레도 벙 찐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 역시 한 번 해보고 싶어서 한 말이기는 하지만, 뱉어놓고 나니 꽤나 겸연쩍어졌다.
그러한 분위기에 암젤만이 나를 응원해주었다.
“주인님! 방금 그 말 멋졌다옹!”
도블레의 인상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그는 다소 퉁퉁한 몸에 두꺼운 갑옷을 입은 기사였다.
두 손에는 각각 손도끼와 몽둥이가 쥐어져있다.
‘수보타가 뚝심 있는 자라고 하더니 사실이었군.’
발산하는 마나가 다른 군주들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야아앗!”
그가 땅을 울리며 돌진할 때, 날랜 호랑이 한 마리가 그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퍼엉!
도블레가 몸을 회전시켜 자기를 공격한 호랑이의 머리를 쪼개자, 다시 다섯 마리의 호랑이가 그의 머리 위를 덮쳤다.
“네 상대는 나다옹!”
레벨이 200이 넘어가면서 암젤의 능력도 한 단계 진일보했다.
그녀가 항상 내 가장 가까운 곳을 지킨 이유는 단순히 나를 향한 그녀의 집착이 강해서만은 아니다.
실력 또한 어느 NPC보다 뛰어나다.
암젤과 도블레가 엉겨 싸우기 시작하자 콘치온과 내 시선은 자연히 서로를 향하게 되었다.
콘치온의 두 눈은 분노로 이글거렸다. 자신의 오랜 열망, 그리고 애써 찾아온 기회가 어이없이 망가졌다.
다시 기회를 찾기는커녕 돌아갈 곳조차 완전히 사라져버린 그였다.
검은 색의 마나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내뻗은 그의 손아귀에서 발사된 파동이 나를 향해 날아왔다.
나는 절대자의 무기를 꺼냈다. 콘치온의 공격이 몸에 닿기 전에 창을 휘둘러 그것을 파쇄해 버렸다.
파앙!-
필살기나 다름없는 공격이 일격에 분쇄되자 콘치온의 얼굴에 흠칫 하는 놀라움이 떠올랐다.
“겨우 48위 군주 주제에!”
‘내가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 알려주지.’
나는 절대자의 창을 활로 바꾸었다.
거기 마나 화살이 장전되는 것을 보고 콘치온이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나는 시위를 당긴 상태로 S급 스킬 이름을 외쳤다.
“하트 브레이커!”
쐐애액-
시위를 떠난 화살이 바람소리를 내며 콘치온에게 날아갔다. 그것은 한 치 어긋남도 없이 그의 심장에 박혔다.
“으아악!”
[48위 군주 콘치온을 쓰러뜨렸습니다!]
[레벨 227이 되었습니다!]
그것과 거의 동시에 암젤도 도블레를 쓰러뜨렸다.
싸움이 끝나자 가상 공간의 결계가 무너졌다.
예상대로 우두머리를 잃은 콘치온의 병력은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미처 달아나지 못한 자들은 무릎을 꿇고 항복을 선언했다.
“후우…….”
힘들 줄은 알았지만 대단히 많은 기력을 소모한 전쟁이었다.
그래도 작전이 잘 맞아떨어져서 기어이 승리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상황이 어느 정도 수습되자 로치온이 웃음 띤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그 역시 나처럼 온몸에 피칠갑을 하고 대단히 지쳐보였다.
“오랜만에 전쟁다운 전쟁을 했군.”
“아무튼 이겼으니 된 거지.”
“나는 아버지를 따라 싸울 때에도 숱한 패배를 경험했다. 두려움을 모르던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카오스 군주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 항상 의심을 했었지.”
그는 진지하게 나를 마주보았다.
“하지만 네가 있는 지금은 이길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든다. 일말의 의심조차 생기지 않아.”
한쪽 무릎을 꿇고 엄숙하게 선언했다.
“왕이여, 나 로치온은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로도 당신을 영원히 따르겠습니다.”
RPG 게임 중에 중요한 이벤트를 마주했을 때처럼 짜르르한 감동이 심장을 찔렀다.
물론 로치온의 엄숙한 선언을 게임 이벤트와 비교한다는 것은 실례가 되는 일일 테지만.
나는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일어나, 로치온. 그 말은 내가 진짜 왕이 될 때까지 아껴두도록 해.”
내 말에 로치온이 고개를 들고 미소를 지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