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1
독식왕 : 클리어러 221화
나는 노아의 결연한 표정을 보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동안은 계속 미뤄왔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럴 수 없게 되었다. 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을 때가 된 것.
“노아. 제가 지금부터 하는 얘기 놀라지 말고 들으세요.”
노아는 진지했던 표정을 누그러뜨리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무슨 얘기를 들어도 놀라지 않을 겁니다.”
이야기는 상당히 길어졌다. 대리인들에게 말하던 게 습관이 되어 있어 정리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다만 앞으로도 생사고락을 함께할 그에게는 가급적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모든 이야기를 하고 싶어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기울였다.
내 말을 다 들은 노아는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한 손으로 턱을 쓸면서, 혼자 생각에 빠져 방안을 거닐었다.
나는 그가 생각을 마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이내 어느 정도 혼란을 떨쳐낸 노아가 내보인 반응은 담백했다.
“그랬군요.”
“네?”
“사실 그동안 성오 씨 옆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지켜보며 제 나름대로 정리를 한 게 있습니다. 빠진 퍼즐을 채워 넣는 일에는 일가견이 있는 편이지만, 도저히 끼울 수 없던 조각들도 있었죠. 오늘 성오 씨의 얘길 들으니 이제 다 이해가 됩니다.”
“후우…….”
노아가 내 이야기를 순순히 받아들이자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물론 그가 앞으로도 나와 함께할지는 아직 장담할 수 없다.
어떤 결론을 내리든지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해준 것만으로도 몇 번이고 고마움을 표하고 남음이 있으니까.
하지만 노아는 나를 떠나는 것 따위는 전혀 선택지에 두지 않은 사람처럼 다시 의자에 앉아 말했다.
“지금 상황이 보통 급박한 게 아니로군요. 최영호 씨도 함께 불러 의논을 해보죠.”
나는 웃음을 띠고 그의 말을 정정해주었다.
“티코이입니다.”
“네?”
“최영호는 가명이고 본명이 티코이에요.”
“아, 네…….”
7
두 명의 브레인이 만나 함께 계획을 세운다. 나는 그들 곁에 앉아있는 것만으로 열기에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한 시간에 가까운 의논 끝에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윤곽이 정해졌다.
노아가 내게 말했다.
“OG는 앞으로 대대적인 길드원 모집에 들어갈 것입니다. 물론 길드장님이 이끄는 팀이 메인이고, 나머지는 사냥보다 다른 일에 더 집중하게 됩니다. 그들이 맡을 일은 바로 아이템 재료를 수집하는 것이죠.”
수입을 늘리려면 상품의 수량을 늘려야 한다.
현재 결정석 매매 대행업은 순조롭게 사업이 확장되고 있었다.
헌터 개인에게 받는 수수료는 많지 않지만 그게 세계 단위가 되면 엄청난 이윤이 창출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사업 파트너인 칼리파는 우리 쪽에 수입 대부분을 밀어주고 있었다.
자기네는 이번 일로 이미지를 고양한 것으로 충분히 만족한다나?
보통 이렇게 큰 단위의 돈이 걸린 일이라면 목숨을 걸고 덤비기 마련인데, 아랍에미리트의 도도한 혈통은 역시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OG가 진행 중인 사업 중에 결정석 매매 대행업을 제외한 주 사업이라고 할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아이템 판매 사업이었다.
이미 내가 만들어 유통시킨 몇몇 제품이 게이머들 사이에서 확고한 트렌트로 자리 잡았다.
다만 지금까지는 내가 아이템을 찍어내는 일에 소홀했기에 시장에 풀린 수량 자체가 많지 않다.
물론 여기에는 재료 자체를 대량으로 구하기 힘든 점도 한몫 했다.
아무리 내가 던전을 몇 개나 소유한 마스터라고는 하지만 거기에서 나온 재료만으로 전 세계 게이머들의 수요를 감당할 수 없으니까.
때문에 그 대안으로 게이머들을 다수 고용해 그들에게 재료 수집을 맡기기로 한 것이다.
OG의 명성이라면 지금이라도 당장 들어오겠다는 헌터들이 줄을 섰다.
그들에게 길드 몫으로 분배해야 할 결정석 판매액까지 전부 주면서 재료 수집을 맡긴다면, 마다할 게이머는 거의 없을 것이다.
여기 더해 그들에게는 재료 수집량에 따른 인센티브도 지급할 생각이었다.
‘아무리 단순 작업이라도 믿을 만한 헌터들을 고용해야지.’
내가 그들을 하나하나 면접을 해야 한다면 큰일이겠지만 고맙게도 현재 티코이에게는 엄청난 양의 국내 게이머 데이터가 있었다.
다름 아닌 대리인을 찾기 위해 모아 놓은 데이터.
그것을 뒤져보는 것만으로도 상당수의 믿을만한 게이머를 고용할 수 있을 터였다.
말하자면 대리인은 되지 못하더라도 일반 길드원이라면 믿고 고용할 만한 게이머들인 셈.
게이머의 숫자가 늘고 수입이 늘면 길드는 자연스럽게 성장을 한다.
나는 브리핑을 모두 듣고 크게 만족했다.
“좋습니다. 이대로 진행하죠.”
8
OG가 그동안 하지 않던 대규모 길드원 채용을 감행한다는 이야기가 돌자 대한민국이 들썩거렸다.
길드 성장에 관한 사안을 전담하고 있는 노아와 티코이는 일단 국내 주요 도시에 지부를 두고, 해당 지역 던전에서 재료를 공수하게끔 만드는 계획안을 짰다.
OG는 자금력에 부족함이 없다. 갑자기 세운 계획이지만 밀어붙이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길드 성장에 관한 일은 두 사람에게 맡겨두더라도 나는 나대로 따로 할 일이 있었다.
다름 아닌 레벨을 쌓는 일.
페이즈 퀘스트는 아니지만 서울에는 공략할 수 있는 던전이 얼마든지 있다.
일단 내가 노리는 것은 등급이 높은 던전의 고층을 반복 공략하는 것이었다. 단기간에 레벨을 올리는 방법은 그것 말고는 없으니까.
나야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이니 노가다로 레벨을 올리는 일도 얼마든지 즐길 자신이 있다.
* * *
이러저러하는 사이 2주가 흘러갔다.
그동안 나는 레벨을 20 올릴 수 있었다.
새로운 클래스로 성기사(검술, 궁술)를 얻었고, 바람의 정령왕, 흙의 정령왕과도 연락이 닿았다.
‘마음은 급하지만 정말 재미있다!’
요즘 들어 비로소 게임에 온 정신을 쏟았던 어린 시절과 현실로 돌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가상현실 게임의 초창기 시절의 나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역시 게임은 이렇게 쪼는 맛이 있어야 돼.’
기간 안에 퀘스트를 완수하지 못하면 모든 게 어그러진다는 사실이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노아와 티코이는 순조롭게 길드 확장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두 사람은 그동안 소홀했던 길드 홍보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방송에 나가 앞으로의 길드 성장 목표에 관한 거리낌 없이 말했다.
목표는 물론 세계 제일의 길드가 되는 것이다.
현재 전 세계 길드의 정점에는 세 개의 길드가 팽팽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그 중 피스&호프만이 약간 앞서 있다고 할까?
노아의 인기야 원래 말할 것이 없지만, 매스컴을 타게 된 티코이(최영호)의 인기도 엄청나게 치솟았다.
지적이고 깔끔한 이미지로 뭇 여성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고 있는 중.
여기 파티의 여자 멤버들도 합세시킨다면 아이돌 인기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겠지만, 그녀들은 나와 던전을 공략해야 하니까.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되던 어느 날 로치온에게서 전언이 날아왔다.
- 조성오, 알아냈다.
밑도 끝도 없는 말이지만 나는 잠깐 동안 생각한 것으로 그의 말의 잘린 부분을 유추할 수 있었다.
“콘치온이 뭘 하려는 건지 알았다고?”
-그래, 그는 그쪽 세상으로 넘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그렇군. 하지만 그거야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건데?”
-당연히 이것만 말할 거였으면 너한테 연락을 하지 않았겠지. 구체적인 계획을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가 지금까지 섣불리 행동에 나서지 못하는 이유는 그쪽 세상에 실력자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야.
나는 로치온의 말을 듣고 대강의 상황이 그려졌다.
콘치온의 영지는 A급 던전과 닿아있으니까. 던전 반대편의 코어를 장악함으로써 이곳의 사정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A급 던전에 들락거리는 것은 일류 게이머들뿐.
게다가 그 숫자가 만만치 않다는 걸 알고 나름 준비가 필요하다고 여긴 거겠지.
로치온이 말을 이었다.
-한 번 계획을 세웠다가 날짜를 미뤘는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어. 조성오, 바로 너 때문이다. 너와 파티원들의 전투력에 겁을 먹은 나머지 전력을 다시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거지. 본래 놈과 가까웠던 군주들뿐만 아니라 자기가 힘으로 포섭할 수 있는 다른 카오스 군주들까지 끌어들이고 있어.
“……생각보다 일이 커지겠는데?”
-그래. 그래서 우리 쪽도 결심을 해야 할 것 같아. 다행히 놈이 그쪽 세상으로 나가기로 결정한 날짜를 알아냈어.
“놈들이 병력을 집중했을 때 역으로 공격을 하자는 거지?
-그래. 세력을 모아 놈의 영지를 칠 테니, 너는 그쪽에서 합세를 해라.
로치온의 작전은 현재 구사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으로 보였다. 다만 이는 그만큼의 위험부담이 따르는 일일 수밖에 없다.
콘치온의 세력과 로치온의 세력이 맞부딪치면 이는 그냥 개개인의 군주가 전쟁을 벌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 될 테니까.
다른 카오스 군주들도 오더 군주 연합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게 될 것이다.
그다음부터는 이제 끝을 향해 치달을 수밖에 없다.
‘여러모로 골치 아프네.’
나는 갑자기 마지막 페이즈 퀘스트가 주어진 게 이런 정세도 감안이 된 게 아닐까 싶었다.
아직도 숨은 이유가 더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버리지 않았지만, 어차피 이 게임은 뒤로 가면서 가속이 붙을 수밖에 없는 구성이었다.
지금까지 차분히 레벨을 쌓을 수 있었던 게 다행이라고 여겨질 정도.
로치온이 특유의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날짜는 3일 뒤다. 우리는 이미 병력을 집결시켜 놈의 영지로 진격할 준비를 마쳤어. 너도 준비를 해주기 바란다.
“알았어. 그때 보자.”
9
3일 뒤,
고대하고 있던 이면 세상으로의 진출을 위해 콘치온은 병력을 집결했다.
군주만 일곱 명에, 총 병사 수는 2만에 달한다.
까마득한 전경을 바라보며 그는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드디어!’
군주로 태어났지만 처음부터 자신의 역량은 제한되어 있었다.
48위라는 서열도 결코 높다고 말할 수 없어 항상 열등감에 시달려야 했다.
그에 반해 내면에서는 누구보다 위에 서겠다는 거대한 웅심이 꿈틀거렸다.
‘기회가 왔다!’
천운이 닿아 이면의 세상으로 어떤 군주보다 먼저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기회의 땅인 그곳을 정복한다면 왕이 되는 일도 꿈이 아닐 터!
헤레디투스는 두렵기 짝이 없는 존재이지만 여차하면 두 세상이 통하는 길을 모두 막아버리면 된다.
그의 꽉 쥔 주먹이 부들거렸다.
주먹을 치켜들자 고막을 뚫을 것 같은 거대한 함성이 치솟았다.
“우와아아아!”
하늘과 땅을 진동하는 병사들의 우렁찬 함성 소리 뒤에, 콘치온은 출진을 앞선 연설을 하기 위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런데 그때,
쿵! 쿵! 쿵! 쿵!
사위를 통해 땅을 울리는 소리가 전해졌다.
시선이 닿는 가장 먼 곳으로부터 먼지가 피어오른다.
펑! 펑! 펑!
마법사들이 날린 원소 덩어리가 그가 집결시킨 병사들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