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
독식왕 : 클리어러 220화
3
‘콘치온이라는 놈, 대체 무슨 꿍꿍이지?’
군주인 페제나는 어이없을 만큼 쉽게 쓰러뜨렸지만, 예상치 못한 의혹이 남았다.
수보타의 말대로라면 콘치온이 꽤 강단 있는 실력자였던 도블레를 빼돌리고, 그보다 훨씬 실력이 떨어지는 페제나를 62위 군주 자리에 대신 올려놓은 것 같다고 하니까.
그것은 내가 들어도 꽤 그럴 듯한 추측이었다.
아니라면 굳이 이계에서도 72명밖에 안 되는 군주 중 하나가 교체됐을 리 없으니까.
그것도 원래 군주 대신 훨씬 더 실력이 떨어지는 군주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는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
영 신경 쓰이는 짐덩이를 하나 떠안은 기분이지만 지금은 고민한다고 해서 답이 주어질 리 없으니까.
나는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한 뒤 노곤한 몸을 침대에 뉘였다.
‘일단 다음 퀘스트나 확인해 볼까?’
가벼운 마음으로 정보창을 연 나는 깜짝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게 뭐야?”
나는 눈앞에 표기된 새로운 페이즈 정보를 보고 놀랐다.
퀘스트 하나하나를 보고 놀랐다기보다는 일단 그 위에 써진 문구가 날 놀라게 한다.
LAST PHASE.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이제 막 결투에 탑에 가서 62위 군주를 물리치고 온 참이다.
아직 물리쳐야 할 군주가 얼마나 많이 남았는데 마지막 페이즈라니?
내가 혼란에 빠져 멍하게 허공을 보고 있자 암젤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냐옹?”
“…….”
암젤이 내 정강이에 꾹꾹이를 한 다음에야 정신을 차렸다. 나는 여전히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이번 페이즈 퀘스트가 마지막이라는데?”
암젤은 다른 동료들보다 시스템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편이다.
현실로 돌아온 내게 게임 시스템이 생긴 것도 다름 아닌 그녀와 만나고 일어난 일이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옹?”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던 암젤이 얼굴을 찡그렸다.
“으으~ 기분이 이상하다옹.”
암젤이 도톰한 앞발로 자기 이마를 매만졌다.
나는 그녀의 이마 부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보고 ‘LAST PHASE’ 문구를 본 것만큼이나 놀랐다.
현실로 나온 뒤 암젤의 이마에는 항상 십자가 모양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는데, 지금 거기에서 밝은 빛이 분사되고 있는 것이다.
“으으~~”
암젤이 이마를 감싸게 신음을 흘린 지 30초쯤 되었을까? 밝게 빛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암젤이 다시 앞발을 내렸을 땐 문신이 감쪽같이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내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자 암젤이 물었다.
“응? 내 얼굴에 뭐 묻었냐옹?”
나는 거울을 가져와 그녀에게 비쳐주었다.
“네 이마에 있던 문신이 사라졌어.”
“응? 진짜다옹. 찝찝한 게 붙어 있다 사라져서 다행이기는 하지만 있다 없으니 좀 섭섭하기도 하다옹. 으으~”
암젤의 얼굴을 찡그리고 하악질을 했다.
“왜 그래?”
“약간 섬뜩한 것도 같고 안타까운 기분도 들도 그렇다옹. 이유 없이 이러니까 기분이 별로다옹. 앗!”
암젤이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괜찮아?”
내가 걱정스러운 한 마디를 내뱉었을 때 암젤이 말했다.
“아, 소변 마렵다옹.”
“놀랐잖아!”
암젤이 화장실로 가고 나서 나는 혼자 계속 생각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마지막 퀘스트가 주어졌다는 것과 암젤의 이마에서 문신이 사라진 일.
이 두 가지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던 나는 곧 한 가지 가설에 도달했다.
“혹시…….”
나를 가상현실 게임 안에 가둬 예행 연습을 시키고, 게임 시스템까지 갖게 한 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물론 단순히 그렇다고 결론내리기엔 나머지 것들이 모두 정상적으로 작동 중이기는 하다.
‘그래도 그것 말고는 합당한 이유가 없어.’
만에 하나 진짜 나를 각성시킨 이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 것이라면, 그래서 이 게임이 서둘러 종료되려고 하는 거라면…….
이는 보통 일이 아니다.
시스템이 없으면 나는 다른 게이머와 다를 게 없으니까. 아니, 만약 가상현실 게임 시스템이 사라진다면 게이머로서의 능력 자체가 없어져 버릴지도 모른다.
‘흐음…….’
다른 일 같으면 누군가와 상의라도 하겠건만, 이 일은 철저하게 개인적인 것이라 그럴 수도 없다.
‘최악의 경우를 가정할 수밖에 없어.’
나는 이번이 마지막 페이즈라는 점은 제쳐 두고, 퀘스트를 뜯어보기로 했다.
부 ? 현재의 자산 규모를 열 배 이상 늘려라.
명예 ? 길드 ‘피스&호프’를 궤멸시켜라.
지위 ? 랭킹 1위가 되어라.
영토 ? S급 던전을 획득하라.(동료 퀘스트를 공략하면 지도 입수 가능)
동료 ? NPC를 12인 영입하라.(지위, 부, 명예 퀘스트를 공략하면 각 NPC의 위치 추적 가능)
‘이런…….’
누가 마지막 페이즈 아니랄까 봐 하나 같이 엄청난 난도의 퀘스트만 주어졌다.
‘자산 규모를 열 배 늘리라고?’
나는 내 자산이 얼마나 되는지 잘 모른다.
하지만 지난번 퀘스트 때 얼핏 파악한 바로 엄청난 수준이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게 끝이 아니라 지금도 실시간으로 그 재산이 빠르게 불어나는 중이고.
다음 항목인 명예 퀘스트는 보란 듯이 특정 길드의 이름을 지목하고 있었다.
‘피스&호프…….’
지금까지 게임을 진행하는 동안에 만난 적들 중 가장 위험하고 강한 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나마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지금은 휴전중인 상태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들과 정면으로 부딪친다는 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퀘스트가 될 것이 뻔하다.
‘랭킹 1위.’
볼수록 한숨이 나온다.
다음 항목에 이르렀을 때 내 눈은 한층 더 확장되었다.
‘S급 던전? 이건 또 뭐야?’
지금 세상에 A급 던전이 최고 난도의 던전이라는 것은 상식이나 마찬가지다.
옆에 적힌 내용으로 미루어 동료 퀘스트를 달성하면 던전의 위치를 알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동료 퀘스트가…….
‘열두 명?’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나는 지금까지 만났던 동료들을 제외하고 앞으로 만나야 할 파티원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보았다.
‘정확히 열두 명이구나…….’
즉 남은 NPC를 전부 다 찾아내라는 의미다.
“말이 안 나오네.”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을 때 메시지가 나타났다.
[‘LAST PHASE 퀘스트’에는 추가 규정이 있습니다. 모든 퀘스트를 6개월 안에 완수하십시오.]
[그렇지 못할 시엔 게임이 종료됩니다.]
‘……!’
나는 가장 보고 싶지 않은 메시지가 떠오른 것을 보고 지금 주어진 상황이 결코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젠장!”
저절로 욕지기가 나온다. 적어도 마음의 준비는 할 여유는 주고 이런 퀘스트들을 디밀던지!
다시 한번 아까 했던 추측이 고개를 들었다.
‘진짜 나를 각성시킨 이의 신변에 이상이 있는 걸까?’
그- 또는 그녀-는 언제나 내게 호의적으로 게임을 이끌어왔다.
내가 당황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런 조건을 던지지는 않았을 텐데.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나는 유저고 게임이 규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집어던질 수도 없는 입장이다.
‘최대한 서두를 수밖에 없는 건가.’
지금까지의 진행도 결코 편하게 온 건 아니지만 여기서 더욱 속도를 내는 것밖에, 다른 방법은 없을 것 같다.
4
나는 이 일을 상의할 인물로 가장 먼저 티코이를 떠올렸다.
여럿의 머리로 함께 생각하는 것보다 차라리 티코이 한 명을 데리고 얘기를 나누는 것이 더 효율적일 만큼 그는 뛰어난 두뇌를 갖고 있으니까.
나는 티코이를 불러 지금 상황을 털어놓았다.
얘기를 다 들은 그는 나 못지않은 혼란을 표출했다.
하지만 혼란을 느끼는 핵심은 나와는 사뭇 다른 부분이었다.
“게임이 종료된다는 것은 즉, 주인님과 저희가 헤어져야 할 수도 있다는 뜻일까요?”
“음……. 그렇게 되겠지. 게다가 이번에 헤어지면 다시는 못 보게 될 거야.”
“안 돼!”
티코이가 이제껏 본 적 없는 큰 충격을 받은 얼굴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너무 그러지 마. 나도 너희랑 헤어지는 건 싫어. 그래서 같이 해결책을 찾아보자는 거잖아.”
나는 동공 지진을 일으키고 있는 티코이의 쓰다듬어 주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그가 결연한 음성으로 말했다.
“맞습니다. 지금은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 방법을 찾을 때이지요. 역시 주인님은 저 티코이보다 훨씬 현명하십니다.”
그는 내가 노트에 옮겨 온 페이즈 퀘스트 목록을 하나하나 찬찬히 뜯어보았다.
“어차피 이 두 개는 당장 달성할 수 없는 것들이고요.”
티코이가 가장 먼저 제외한 것은 다른 퀘스트를 먼저 달성해야 한다는 조건이 달린 ‘영토’와 ‘부’ 퀘스트였다.
“남은 것은 명예와 부, 그리고 지위 퀘스트인데…….”
모든 에너지를 머리를 쓰는 데 사용하고 있어서인지 티코이의 변신이 풀렸다.
여우 귀를 쫑긋거리며 그가 털이 복슬복슬한 턱을 쓰다듬었다.
“제 생각에는 이 세 가지 퀘스트를 떨어뜨려놓고 생각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피스&호프와 자웅을 겨루기 위해서는 길드 규모를 키워야 하지요. 길드가 덩치를 키우기 위해서는 게이머의 숫자를 늘리고 자산 규모를 늘려야 합니다. 만약 이 퀘스트들을 전부 클리어한 다음에는 주인님의 랭킹도 자연스럽게 1위에 근접하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티코이의 말이 맞았다. 이 혼란한 와중에도 간단히 내용을 정리하다니 역시 우리 파티 최고의 브레인답다.
“그렇다면 당장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구나.”
“네, 길드 규모를 키우는 것이죠.”
길드의 규모를 확장하는 일은 티코이와 단 둘이서 결정할 수 없는 문제다.
OG는 나 개인의 것만이 아니니까.
나는 부길드장 노아를 만나기로 했다.
5
내 말을 들은 노아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길드 규모를 확장하실 생각이라고요? 지금보다 열 배 더?”
“네. 정확히 열 배 이상 키울 생각입니다.”
그는 내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길드를 운영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길드 규모를 키우기 바라는 게 정상이죠. 하지만 길드장님께는 지금까지 그런 욕심을 대놓고 표출한 적이 없지 않습니까? 제 생각엔 갑자기 심경에 변화를 일으킨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요.”
“6개월, 아니 가급적이면 세 달 이내에 길드 규모를 열 배 이상 키워 피스&호프를 치려고 합니다.”
“피스&호프를 친다고요?”
내가 한 말은 길드 규모를 키워 피스&호프를 앞지르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치겠다는 뜻은 단순하게 말해 완전히 존재 자체를 없애버리겠다는 뜻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피스&호프의 길드장인 니콜라스는 노아의 친형이기 때문에, 그의 입장에서는 충격적인 말일 수밖에 없다.
노아는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냉정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지금까지는 부담을 드리지 않기 위해 피해왔지만, 이번에는 꼭 들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