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5
독식왕 : 클리어러 215화
나는 아무래도 던전 너머에 이계의 군주들이 도사리고 있다거나, 우리가 힘을 합치지 않으면 세계가 멸망할지 모른다는 얘기를 꺼내기 위해서는 먼저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동철에게 맞장구를 쳐 주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동철 씨도 게임을 좋아하나 보죠?”
“네! 엄청 좋아합니다!”
이 자리에는 또 한 명의 게임 마니아가 있다.
김유진이 눈을 빛내며 대화에 참여했다.
“어떤 게임 좋아하는데요?”
“RPG를 제일 좋아하고 시뮬레이션, 액션 가리지 않아요.”
음식이 서빙되기 전까지 나는 이동철과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상현실 게임 안에 갇혀 있었던 10년 동안의 지식에는 좀 약하지만 기본적으로 내게 탑재된 게임 정보는 방대했다.
이동철은 반짝거리는 눈으로 마치 강의를 듣는 학생처럼 내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게임 이야기는 현실 얘기로 번져 가고, 나와 김유진, 그리고 이동철 세 사람은 던전 공략이 게임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에 의견 일치를 보았다.
“명칭도 게이머잖아요.”
이동철이 눈에 힘을 주고 단호하게 말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누나인 이동주도 내가 동생에게 친절하게 대하자 기분이 좋은 눈치였다.
나는 얘기를 꺼낼 타이밍을 재기 위해 마인드 리더를 수시로 발동시켰다.
결국 이동철의 머릿속에 떠오른 적절한 빈틈.
[아, 씨! OG에 들어가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아니, 들어가고 싶어!]
정보창의 내용이나 지금까지 직접 본 태도를 감안하면 누나인 이동주는 동생을 무척 아끼는 것 같았다.
일종의 책임감까지 가진 걸 보면 둘 사이에 뭔가 사연이 있을지도.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꼭 동생분이랑 길드를 만드셔야 하나요? 얘기를 나눌수록 제 입장에서는 두 분이 너무 욕심나는데.”
“그게…….”
이동주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때 약속을 했어요. 나중에 크면 꼭 같이 가게를 하기로. 동생은 게임을 파는 가게를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제 입장에서도 나빠 보이지 않았어요. 왜냐면 동생한테 게임을 떼 놓기는 어려울 것 같고 그럴 바엔 생업과 일치시키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헌터가 되는 바람에,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됐죠.”
그 얘길 들은 이동철이 펄쩍 뛰었다.
“그거 때문이었어? 나는 누나가 그냥 자기 길드를 만들고 싶어 하는 줄 알았지.”
그는 결국 본심을 토해냈다.
“나는 OG에 들어가고 싶어! 아니, 꼭 들어갈래!”
내게 부담스러운 눈빛을 보낸다.
누나를 좀 설득해 달라는 것 같은 얼굴.
그런데 내가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OG에 들어와 달라는 게 아닌데 말이야.
이쯤 되자 말을 꺼낸 이동주가 조금 뻘쭘해졌다. 제 딴에는 동생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한 건데 동생이 다른 말을 해버리니까.
‘마음은 끈끈해도 대화는 부족한가 보구나.’
이 건에 대해 충분히 의논을 했다면 지금 같은 상황은 연출되지 않았을 텐데.
아무튼.
나는 슬슬 본론을 꺼낼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4
내 얘기를 들은 이동주, 이동철 남매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멍한 얼굴이 되었다.
표정이 아무것도 없어서 얼굴에 낙서를 한 대도 반응하지 않을 것 같다.
“으음…….”
먼저 정신을 차린 이동주가 자기 앞에 놓인 물컵을 채워 단숨에 들이켰다.
그녀는 천천히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영리한 여자답게 금방 분위기를 파악했다.
“농담을 하시는 건 아니군요. 오늘 만난 저희한테 장난을 칠 리도 없구요.” “네, 저도 사실이 아니라고 하고 싶네요.”
이번엔 이동철이 무표정에서 깨어났다.
“저요! 할래요! 역시 뭔가 흑막이 있을 줄 알았어! 시발, 이계 군주 놈들 내가 팍! 해치워 주마.”
이동주가 동생의 머리를 딱 소리가 나게 때렸다.
“말 예쁘게 안 할래?”
그녀는 동생보다 훨씬 신중했다.
지켜보던 내가 결정이 쉬워질 수 있도록 말을 보탰다.
“어차피 일어날 일입니다. 그리고 대리인을 찾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에요. 아시다시피 주위엔 적이 더 많습니다. 함부로 공론화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거죠.”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대목에서 이동철이 재차 흥분했다.
“나는 할 거야! 누나는 누나 마음대로 해. 사나이가 어떻게 이런 말을 듣고 모른 척해?”
사나이 운운할 게 아니라 네가 게이머의 심정으로 빙의한 거잖아, 지금.
결국 이동주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그 한숨이 대변했다. 그녀 역시 대리인이 되기로 마음을 정했음을.
[게이머 ‘이동주’가 63위 군주 ‘플로스’의 대리인이 되었습니다.]
[게이머 ‘이동철’이 64위 군주 ‘플루스’의 대리인이 되었습니다.]
두 명의 대리인이 추가된 상황에서 대리인만으로 이루어진 길드 ‘둠(DOOM)’의 결성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졌다.
용건을 마친 나는 적당한 시점에 몸을 일으켰다. 나머지 일은 대리인들끼리 알아서 할 문제이니까.
5
혼자 연습실에 처박혀 검술을 연마하던 박재환은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네, 누군가에게 살해당하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회장실에 목이 없는 시체만…….”
“……대체 누가!”
대한민국 지하 경제의 왕을 암살할 수 있는 인물은 많지 않다. 많지 않은 게 아니라 아예 없다고 보아야 한다.
더군다나 여러 기사가 터진 다음에는 보안을 몇 배는 더 강화했을 테니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박재환은 이 일을 획책한 게 누구인지 결론 내렸다.
“조성오, 이 새끼…….”
김재용이 일성의 게이머들을 이끌고 조성오를 죽이러 갔다는 이야기도 나중에야 들었다.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 몰살당했다는 사실도.
두 번이나 살해 위협을 당한 그가 가만히 있을 리 만무하다. 언론으로만 흔드는 게 아니라 직접 암살을 도모할 줄은 몰랐지만.
‘생각보다 더 대단한 놈이야. 실력은 두말할 것도 없고.’
식당에서 보았던 앳된 모습과 지금 일들을 견주기엔 도무지 이미지가 겹치지 않는다.
“……내가 방심했군.”
머리카락을 쥐고 자책해 보지만 늦어도 너무 늦었다.
실은 그는 아버지 박한도에 대한 애정이 깊지 않았다. 되레 그를 향한 감정은 증오에 가까웠다.
자신과 어머니를 방치하다가 각성한 뒤에야 찾아와 따뜻하게 돌보는 척을 했다.
수모를 억누른 것은 언젠가 자산을 물려받길 기대해서였다.
‘이젠 다 물 건너갔지만…….’
박한도의 친자로 호적에 올라가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대한민국은 그를 둘러싼 스캔들로 여전히 떠들썩하니까.
살인자인 조성오는 오히려 그 논쟁에서 쏙 빠져 있었다. 되레 결정석 시세 사업 건으로 배타적인 성향의 헌터들 사이에서도 인지도가 급격히 상승했다.
“조성오는 여전히 악마의 산을 공략 중인가요?”
“네, 이제 막 40층을 돌파했다고 합니다.”
무서운 속도로 올라가고 있으니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이 사람들한테 연락하세요.”
박재환은 비서에게 한 무더기의 게이머 명단을 넘겼다. 어둠의 게이머들.
대부분 박한도가 직접 키운 재목이다. 범죄 경력이 있거나 아니면 그런 경력이 만들어졌거나, 일찌감치 돈에 팔려온 게이머도 있다.
‘더는 미룰 수 없어.’
애초에 계획은 악마의 산 던전의 군주와 대리인 계약을 맺는 것이었다. 지금 시점에 마지막 반전이 있다면 역시 그것밖에 없다.
6
이틀 뒤.
박재환은 또 한 차례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죽었다고요? 전부?”
“네, 똑같습니다. 하나같이 다 목이 잘려서…….”
“대체 언제요?”
“지시를 내리신 하룻밤 사이에…….”
박재환은 방을 휘둘러보았다. 자기 몸을 털고, 목을 벅벅 문질러 댄다. 가구를 거의 반파시키고 나서야 헉헉대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어떻게 안 거지?”
조성오가 그들을 죽였다면 자신이 내린 지시를 들었다는 말밖에 안 된다.
전에 했던 대로 마나를 붙여 도청한 것일까? 아니면 이 방 어디에 장치를?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늦었다. 이번에도, 완벽히.
그가 최후의 보루로 연락한 쪽은 일본이었다. 박한도와 오랜 인연을 맺어온 일본의 야쿠자들. 그들도 군대 규모에 육박하는 어둠의 게이머를 거느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박한도가 죽은 지금 우리가 당신을 도울 의리는 없습니다. 당신은 그의 정식 후계자가 아니니까요.”
다른 때라면 모르지만 박한도 때문에 대한민국 정세가 어지러운 지금 이쪽 일에 관여하기 싫다는 뉘앙스였다.
비서는 몸을 덜덜 떨면서 마지막 보고를 올렸다.
“사장님, 다 끝났습니다. 그룹도 이미 해체 수순에 들어갔고 갈가리 쪼개져 하이에나 무리들에게 넘겨질 것입니다. 사장님이라도 해외로 가서 목숨이라도 부지하는 것이…….”
푸악-!
결국 비서는 말을 맺지 못하고 목에서 피를 뿜었다.
비서를 죽인 박재환이 칼에 묻은 피를 바닥에 뿌렸다.
그의 눈빛은 여느 때와 비할 데 없을 정도로 날카로웠다. 약간은 체념을 띠고 있기도 했다. 마치 자살을 결심한 사람처럼.
7
박재환이 내 앞에 나타난 것은 49층 세이프 에어리어에 이르렀을 때였다.
“너희들은 질리지도 않고 찾아오는구나. 내가 직접 찾아가지 않아도 되니 편하기는 하지만.”
“역시, 지친 기색은 조금도 없군.”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니니까. 던전 공략은 뭐니 뭐니 해도 밥심으로 하는 거 아니겠어?”
“하아…….”
박재환은 머리를 흔들었다. 역시 식당에서 봤던 모습과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애초에 문제가 있다면 자신에게 사람 보는 눈이 없었다는 것.
“그런 순진한 얼굴로 아버지를 죽이고, 게이머 수십 명을 죽이다니 어처구니가 없군.”
“아버지를 죽여?”
내 반문에 박재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는 자살을 각오하고 왔다. 내 앞에서까지 연기하지 마!”
“주인님의 말은 사실입니다.”
어디선가 들려온 부드러운 음성에 모두의 시선이 이동했다.
그림자 속에서 걸어 나온 사람, 아니 NPC는 바로…….
“틴테?”
그녀의 모습을 보고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49층까지 올라오는 동안 도무지 동료 NPC가 눈에 띄지 않아 고민을 했는데, 이제야 눈앞에 나타나다니!
더구나 몇몇 NPC가 그랬던 것과 달리 정신도 멀쩡해 보인다.
“주인님을 오랜만에 뵙는데 빈손으로 나타날 수 없었습니다.”
틴테가 망토를 펄럭이더니 자신의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아주 공손하고 우아한 동작으로 하나하나 진열을 하지만, 지켜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눈살이 찌푸려진다.
머리통이 하나, 둘, 셋…….
그중 눈에 가장 눈에 띄는 머리통은 바로 박한도의 것이었다.
“네가 한 일이구나…….”
틴테가 움찔 놀라 시선을 들었다.
“혹시 제가 잘못한 것입니까?”
“아니~”
나는 박재환 쪽에 시선을 던지고 피식 웃음 지었다.
“잘했어! 엄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