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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왕 클리어러-210화 (210/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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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식왕 : 클리어러 210화

    Chapter 52 – 이계의 피라미 군주

    1

    ‘악마의 산’ 7층 공략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주거지에는 ‘마법사들의 동굴’ 탐색을 마치고 돌아온 칼리타와 마요르가 있었다.

    마요르는 과자를 입에 묻히고 피곤한 얼굴로 쿨쿨 잠이 들어 있었고, 칼리타는 내가 오자 몸을 일으켜 공손하게 보고했다.

    “통로가 최상층에 있어서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그래도 결국 찾아냈다는 거구나.”

    “네, 핑계를 대려는 건 아니지만 지난번엔 던전 마스터와 싸우느라 집중력이 흐려졌던 것 같습니다.”

    “그렇구나, 역시…….”

    나는 던전에 있는, 이계의 통로라는 개념을 생각해 보았다.

    단순하게 정의해서 매 던전마다 그런 게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이계 군주가 각자 컨트롤할 수 있는 던전의 숫자가 정해져 있고, 그중에서도 극히 소수가 이쪽 세상과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아마 이계의 군주는 통로가 있는 던전에서 영향력이 커질 것이고 그곳에서 대리인을 물색하는 거겠지.

    ‘대충 맞겠지?’

    지금까지 흘러온 상황을 분석하면 정확하진 않을지 몰라도 꽤 진실과 근접한 추측이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일단 ‘악마의 산’ 던전의 관리소에 연락해 일주일간의 예약을 뒤로 미루었다.

    ‘이계로 가는 건 오랜만이네.’

    주거지 옆의 C급 던전은 반대편에 있는 던전과 완전히 연결되어 있다.

    ‘그나저나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72명밖에 존재하지 않는 군주의 영지와 직접 통하는 던전을 벌써 두 개나 발견했다. 그것도 서울이라는 좁은 땅덩어리 안에서.

    ‘상식의 범주로 이해하면 안 되겠지?’

    이곳 영토와 이계의 영토가 일대일로 대응할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결투의 탑이라는 것도 물리적으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신비 그 자체니까.

    ‘마법과 몬스터가 지배하는 세계.’

    그것부터가 이미 판타지인데 현실의 잣대를 들이대서 무엇하겠는가?

    2

    첫 번째 이계 여행을 떠날 때 그런 것처럼 나는 모든 멤버를 이끌고 긴 여행을 떠날 준비를 했다.

    혹시 상황이 꼬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유진이에게 연락해 내가 피스티스의 영지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리게 했다.

    그녀가 미리스에게 말하고, 미리스는 다른 군주들에게 사실을 전할 것이다.

    ‘비밀 통로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군.’

    만약 정석대로 예약을 하고 던전을 찾았다면 박관춘이라는 귀찮은 인물과 대면해야 했을 것이다.

    그는 이학돈에게 내가 몇 층으로 들어갔는지를 누설했다. 물론 그럴 거라고 계산을 하고 한 행동이지만 미움이 3 정도 상승한 것도 사실이다.

    은빛 여우로 변신한 칼리타가 길을 안내했다.

    “이곳입니다.”

    통로가 있는 곳은 다름 아닌 게네아의 쉼터였다. 게으르기 짝이 없는 던전 마스터가 몸을 누이고 뒹굴거리는 곳.

    항상 놈이 거대한 몸으로 틀어막고 있고, 악취까지 진동해서 칼리타가 발견하지 못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꽈과각?”

    [마스터님 오셨습니까?]

    게네아는 매우 귀찮은 듯 느리게 눈을 떴다. 나보다 암젤이 열이 받아서 호랑이를 소환해 냅다 놈의 몸뚱이를 덮어버렸다.

    “냄새나는 놈! 저리 꺼지라옹!”

    암젤의 소환수를 감당하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닐 테지만 게네아는 내 눈치를 봐서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이계로 가는 통로.

    벽이 갈라진 틈새에서 신비로운 빛이 흘러나왔다.

    “공사가 필요하겠네.”

    내 말에 트레앙이 나섰다. 그녀가 도끼를 몇 번 휘두르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벽이 무너지고, 통로가 넓어졌다.

    “그럼 가 볼까?”

    그렇게 말하는 찰나 어디선가 동굴의 울림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오오! 기사여! 그대에겐 나의 부름을 받을 자격이 있도다!

    “어디서 나는 소리냐옹?”

    암젤이 눈을 부라리며 주변을 훑었다. 하지만 목소리의 주인을 찾을 수 없는 것은, 그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이 이계였기 때문이다.

    -내 이름은 피스티스! 이계의 위대한 군주다. 내 그대에게 영생의 길을 허하겠다!

    나는 피스티스가 부리는 수작이 무엇인지 금방 눈치챘다.

    처음엔 대리인인 이학돈을 부려 나를 죽이려고 하다가, 그가 당하자 이번엔 나를 대리인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음…….’

    나는 순간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긴 여행을 빠르게 단축시킬 수 있을지 모를 방법.

    “그러니까 네 말은 그거지? 날 대리인으로 삼고 싶다고?”

    -오오! 역시 던전을 차지할 정도로 강한 기사이기에 이해력도 빠르구나! 어떻게 하겠느냐? 내 심복이 되면 두 세상을 정복하는 날 너에게 내 오른쪽 자리를 허하겠다.

    ‘엄청난 뻥쟁이네. 겨우 63위 군주 주제에.’

    처음엔 영생을 주겠다고 하더니 지금은 두 세상을 정복하겠다고 말한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과대망상을 가진 인물은 꼭 있는 모양이다.

    나는 일단 오해가 없도록 모든 멤버에게 전언을 날렸다.

    [나는 피스티스의 청을 수락하는 척할 거야. 진짜는 아니니까 오해할 필요 없어.]

    작전을 짜는 게 한두 번이 아닌 터라 직접 목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암젤이 나를 불만스럽게 올려다봤다.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그녀에게 윙크했다.

    “오케이. 그 정도면 나쁘지 않은 조건이군. 하지만 왠지 나만 받는 것 같아 좀 미안하다는 말이지. 나도 너한테 선물을 하나 주고 싶은데.”

    -놈! 일개 기사 주제에 말끝이 짧구나! 내가 마음이 넓어 다행이지 다른 군주 같으면 진즉 몸뚱이가 쪼개졌을 것이다! 하지만 선물이라는 말이 내 귀를 즐겁게 하는구나. 어서 말해보거라! 네놈이 내게 진상할 선물이 무엇인지. 으하하!

    “두 세상을 정복하겠다고 했지만 당장은 방법이 없잖아? 그래서 이쪽으로 건너오는 길을 알려준다는 거야.”

    -뭣이! 그 말이 사실이냐!

    “속고만 살았나? 영생을 준다는데 이 정도는 해줘야 딜이 되지 않겠어?”

    -하하하! 역시 너는 전의 쓸모없는 놈이랑은 근본부터가 다르구나. 어서 알려다오! 통로가 있는 곳이 어디냐?

    “스티코이 거주지.”

    -응?

    “너의 영지에 스티코이의 집단 서식지가 있을 것이다. 내일 그곳에서 만나기로 하지. 이왕이면 내가 가기 좋게 몬스터들은 싹 다 정리해 놓는 게 좋을 거야.”

    -맹랑한 녀석! 네 말투를 들으면 꼭 내가 부하 같구나. 하하! 좋다! 스티코이 따위는 내 손에 걸리면 아무것도 아니지. 꼭 이곳으로 와서 내게 길을 알려다오.

    “앙앙.”

    -앙앙?

    “알겠다는 뜻이야.”

    -하하하! 맹랑한 녀석!

    귀찮은 피스티스의 목소리가 만족스러운 웃음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뭣 하러 이런 귀찮은 일을 벌이는 거냐옹.”

    “귀찮기는, 훨씬 간단하지. 반대편 길을 뚫으려면 시간도 많이 걸릴 텐데.”

    내 말에 수보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저는 항상 주인님의 지혜에 탄복하고 있습니다.”

    나는 멤버들을 돌아보았다.

    “자, 이제 가자.”

    3

    반대편에 서식하는 스티코이들은 내 편이 아니다. 필연적으로 싸움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테오루마를 상대하다가 놈들과 싸우니 그렇게 쉬울 수가 없었다.

    가브리엘을 앞장서게 하고, 아홉 마리 테오루마가 그 뒤를 따르게 한다.

    그것만으로 스티코이들은 엉덩이를 빼고 달아나기 바빴다.

    ‘굳이 쫓을 필요 없지.’

    반대편 코어를 정복하는 것은 현실의 던전을 공략하는 것과는 개념이 다르다. 그저 깃발 뺏기에 불과하니까.

    이쪽에서 스티코이를 몰면 반대편에서 피스티스가 정리해 줄 것.

    아주 빠르게 길을 뚫었음에도 중간에 두 번의 식사를 하고 세 시간의 휴식을 취해야 했을 만큼 오래 걸렸다.

    슬슬 지치기 시작할 때, 피스티스에게 전언이 날아왔다.

    -어디 있느냐, 기사여! 네가 말한 대로 스티코이 부락은 이쪽에서 함락했다!

    “게네아도?”

    -그래, 게네아도 해치웠다.

    “땡큐. 아, 참. 그리고 게네아가 있던 곳에 구슬이 하나 있을 건데, 그게 길을 뚫는 데 아주 중요한 거거든? 그러니까 아무도 만지지 못하게 해야 돼.”

    -오오! 네 말대로 신비한 구슬이 하나 있었다.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게 할 테니 어서 이곳으로 오기나 해라!

    “앙앙.”

    어쩐지 아까부터 스티코이가 한 마리도 안 보인다 했다.

    나는 소환수를 불러들이고 돌개 보드를 꺼냈다.

    “자, 이제 빠르게 가 볼까?”

    4

    피스티스는 검은 후드를 쓴 마법사였다.

    비쩍 마른 데다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만화나 소설에 나올 법한 전형적인 마법사의 모습을 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후드를 뒤집어쓴 대군을 이끌고 왔는데, 급하게 치른 스티코이와의 전쟁 때문에 모두 지친 기색이었다.

    멤버들을 이끌고 나타난 나를 보고 피스티스가 탄성을 내질렀다.

    “오오! 드디어 왔구나! 나의 기사여!”

    “방가방가.”

    “응?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만나서 반갑다고.”

    “하하하! 맹랑한 녀석! 그래그래. 나도 널 만나서 마음이 기껍구나!”

    방금 전쟁을 치러서 완전히 지친 피스티스와 졸개들과는 대조적으로, 나와 멤버들은 돌개 보드를 타고 오는 동안 체력을 회복했다.

    피스티스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어서 내게 길을 안내해다오, 기사여.”

    “길? 무슨 길?”

    “웬 시치미냐! 당연히 네가 사는 세상으로 통하는 길이지.”

    “아아~ 그거? 싫은데? 나만 알고 있을 건데?”

    피스티스의 얼굴에 짜증 난 기색이 내비쳤다.

    “무례하게 구는 것도 작작해라! 나는 원래 인내심이 강한 성격이 아니다!”

    분노한 그의 몸 밖으로 파직거리며 마나가 튀었다. 그것으로 미루어 그리 대단치 않은 군주라는 결론이 나왔다.

    “예상대로 허접이군.”

    “……!”

    나는 의상을 바꾸었다.

    “데피니온.”

    마법사 세트를 착용하고 소환수를 불러냈다.

    가브리엘과 아홉의 기사.

    “죽이려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젠 나를 부리려고 들어?”

    가브리엘을 비롯한 소환수들의 위세를 본 피스티스가 당황했다.

    “아아! 그 일은 네가 오해한 것이니라. 설명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구나. 그쪽 세상으로 건너간 뒤에 찬찬히 얘기해 주겠다.”

    “닥치라옹!”

    지금까지의 상황에 불만을 품고 있던 암젤이 눈을 붉게 물들였다.

    필레소의 홍안이 발동하자 피스티스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자, 시작해 볼까?”

    일주일간의 A급 던전 공략으로 한층 강하게 단련된 멤버들이 피스티스와 그의 졸개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두 개의 세상을 정복하겠다는 야심을 품었던 과대망상증 환자 피스티스는 내가 발동한 지옥불에 의해 화려하게 생을 마감했다.

    “으으! 분하구나! 조금만 더 하면 세상을 정복할 수 있었는데!”

    “응, 그건 네 오해야.”

    허언증도 정도껏 해야지.

    [63위 군주 피스티스를 물리쳤습니다!]

    [결투의 탑 10층을 정복했습니다!]

    [결투의 탑 9층이 열렸습니다!]

    “응?”

    이건 또 뭐야.

    페이즈 7과 8의 퀘스트를 전부 달성해야 9층에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어진 메시지는 나를 더욱 놀라게 했다.

    [업적 ‘가짜 대리인’을 달성했습니다.]

    [이제부터 모든 동맹 군주들과 ‘전언’을 나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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