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9
독식왕 : 클리어러 209화
서울의 A급 던전은 다른 말로 ‘악마의 산’이라고 불린다. 심플하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명칭인 셈.
원래 산이 있던 자리에 그것이 무너지고, 더 거대한 산이 자리 잡았다.
이런 일례만 보아도 던전 생성 초기에 얼마나 많은 혼란이 있었을지 충분히 짐작이 된다.
그래도 지금은 위험도가 최고인 A급 던전 또한 안전하게 관리되고 있다.
몬스터들의 수준은 그대로인 반면 게이머의 숫자는 계속 늘어나고, 또 실력이 상승했으니까.
처음 공략한 F급 던전 ‘검은 산’의 최종 업그레이드판이라고 봐도 무방할 ‘악마의 산’은 무시무시한 위세를 뿜어냈다.
꼭대기가 보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산허리마다 짙게 안개가 껴 있어 공포감을 배가시킨다.
하지만 늘 그렇듯 던전을 대하는 내 마음은 두려움보다는 기대감이 컸다.
던전은 성장의 발판이니까.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효과가 좋다.
바닥부터 시작한 게이머들 중 나만큼 빨리 A급 던전에 도달한 자가 또 누가 있을까?
“찌릿찌릿하다옹.”
암젤의 말마따나 악마의 산은 1층부터 무지막지한 요기를 뿜어냈다.
한 단계 높은 던전을 도전할 때마다 늘 약간의 부담감을 느끼긴 했어도 A급 던전은 근본부터가 달랐다.
이 던전의 일반 몹이 D급, C급 던전의 마스터와 비슷한 수준이니까 말은 다한 셈.
안개가 짙게 깔린 숲길의 안쪽에서 절그럭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온다. 영혼을 약탈당한, 한때는 최고였던 기사들.
갑옷은 이곳저곳이 찌그러진 형태지만 견고하기 짝이 없고, 개개인이 가진 무기도 상당한 위력을 자랑한다.
용기의 물약을 원샷 한 수보타가 가장 먼저 튀어나가며 소리쳤다.
“멍청한 기사 놈들아! 네놈들의 엉덩이를 걷어차 주러 위대한 수보타 님이 오셨다!”
A급 던전이라 쫄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제법 훌륭히 첫 도발을 날리는 데 성공했다.
눈을 꼭 감고 몸을 덜덜 떨고 있는 게 안쓰럽기는 하지만.
“허?!”
“크르르르…….”
내 쪽을 향해 걸어오던 테오루마 두 마리가 수보타에게 고개를 돌렸다. 투구 속의 눈빛이 번쩍 빛나는가 싶더니 각자 가진 무기가 귀기를 뿜으며 허공을 날았다.
“으악! 주인님! 살려주십셔!”
수보타가 납작 엎드리자 트레앙이 움직였다. 붉은 머리칼을 휘날리는 장신 미녀가 도끼로 바닥을 내려찍는다.
‘어스퀘이크!’
쿠구구궁-!
두 마리 테오루마의 몸이 휘청거리며 서로의 무기가 허공에서 부딪쳤다.
이어서 암젤이 호랑이 떼를 소환했다. 아린 역시 혼란의 곡을 연주하며 지원에 나섰다.
칼리타는 마요르와 함께 B급 던전에서 길 찾기를 수행 중이었으므로 동행하지 않았다.
주 전력 중 하나인 그녀의 부재가 아쉬울 수밖에 없는데, 그 자리는 새로운 전력으로 채울 요량이었다.
가브리엘.
한때 사이코패스 게이머였던 소환수가 내 손끝에서 되살아났다.
“끄으으으…….”
검게 뼈만 남은 모습을 하고도 생전의 존재감은 그대로였다. 트레앙의 도끼가 튕겨 나간 자리에 가브리엘이 빔을 쏘자 오렌지색 빛이 터지며 구멍이 났다.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구분이 안 되네.’
솔직히 말해 겉모습만 보면 테오루마보다 니콜라스가 훨씬 더 무시무시했다.
더구나 그를 부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스탯이 상승했다고 하더라도 한 번 내 영향력에서 벗어난 전력이 있으니까.
“가브리엘! 누가 네 주인이지?”
“……당신…….”
두 마리 테오루마를 상대하는 데 걸린 시간은 15분가량.
길지 않은 것 같지만 던전의 규모와 한 층을 공략하는 동안 튀어나올 숫자를 생각하면 상당히 더딘 페이스였다.
처음 나타난 두 마리를 죽인 나는 곧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검은 소환술을 사용해 그들을 슬롯에 박아 넣는 작업. A급 던전의 몬스터가 남긴 커다란 결정석도 곧바로 재활용에 이용되었다.
소환술과 공예술의 환상적인 콜라보레이션.
“크르르르…….”
“우우우우…….”
뼈만 남았지만 어차피 갑옷을 두르고 있으므로 몬스터일 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레벨이 낮아서인 것도 있지만 자의식 자체가 거의 없어서, 가브리엘을 운용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
답답할 정도로 느린 공략을 이어가던 중 문득 숲의 여기저기에서 반짝이는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시력을 돋구어 살펴보았더니 작은 날갯짓을 하고 있는 정령들이었다.
‘역시 던전 안은 다르구나.’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는–존재한다 하더라도 거의 눈에 띄지 않는– 것에 비해 이곳에 오니 확실히 정령의 숫자가 많았다.
“너는 누구지?”
“우리가 눈에 보여?”
내 정령술의 수준이 낮아서 멀리서 호기심만 드러낼 뿐, 가까이 오거나 친밀하게 행동하지는 않는다.
나 역시 그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소환수에 비하면 날파리나 다름없는 수준의 정령들이니까. 굳이 내 편으로 만들더라도 큰 도움이 되지 못할 터였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당장 시험해 보기 위해 자기 영역에 머물고 있는 타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타로, 내 말 들려?”
-응? 주인이야? 무슨 일 있어?
“혹시 여기로 올 수 있겠어?”
정령은 생태계에 민감하다. 과거 타로가 죽을 고생을 한 것도 자기 속성과 맞지 않는 땅을 여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정령술사가 되면서 업그레이드된 타로라면 좀 다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 주인이 있는 곳이 던전이지? 미미하게 그곳의 기운이 느껴져. 내가 그곳에 가는 건 문제가 안 되지만 싸우는 데 보탬이 된다고는 장담하지 못해. 다른 정령의 보조를 받는다면 모를까.
“그렇지? 다른 정령이 있는 곳이라면 너도 힘을 발휘할 수 있겠지?”
-물론이지. 나는 일반 정령들보다 훨씬 강하니까. 놈들은 내 발바닥 밑으로 기어 다녀야 할걸?
타로는 과거 임퓨어라는 이유로 살던 마을에서 추방당한 적이 있다. 임퓨어는 태어나자마자 죽임을 당하므로 그나마 다행으로 볼 수 있지만, 어차피 상성에 맞지 않는 대지에서 정령은 죽는 날만 기다리는 힘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마니까.
“여기 정령들이 있어. 숫자는 많지 않아도 A급 던전에 자리 잡을 정도면 꽤 실한 놈들이겠지.”
-하긴, 그렇겠구나. 나도 주인 얼굴을 보고 싶어! 오랫동안 못 봤잖아!
“그렇게 오래는 아니지 않나? 아무튼, 올 수 있으면 오도록 해.”
-좋아! 당장 갈게!
예상보다 더 빠르게 타로가 눈앞에 나타났다. 나를 발견하더니 신나 하며 날아든다. 그의 기준으로는 반가워서 그러는 거니 따귀 한 대쯤은 눈감아줘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 못 본 사이 더 잘생겨졌구나!”
타로의 조막만 한 손바닥이 내 볼에 닿으려는 찰나, 묵직한 소리를 내며 빔 한 가닥이 날아들었다.
퍼엉-!
가까이 있던 거대한 나무가 빔을 맞고 우지끈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기습을 한 장본인은 다름 아닌 가브리엘.
그가 텅 빈 동공으로 이쪽을 응시했다.
말을 하지 않아도 눈빛에 담긴 의도는 충분히 전달됐다.
아마 ‘조성오를 죽일 수 있는 건 나뿐이다’겠지.
당장은 어쩔 수 없이 내게 굽히고 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앙심, 혹은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고 있을 것이다.
“타로, 떨어지는 게 좋겠다.”
“아, 응…….”
이 같은 상황에 만족하는 건 암젤밖에 없었다.
“조그만 놈이 자꾸 주인님에게 스킨십하는 게 꼴 보기 싫었는데 잘됐다옹.”
정령들의 도움을 받으면 활발히 움직일 수 있을 거라는 타로의 기대는 적중했다.
“히익! 저놈은 또 뭐야?”
“우리랑 같은데, 또 달라!”
“무서워!”
“위대한 정령이시다!”
반응은 각자 달랐지만 타로를 두려워하는 것만은 분명했다. 타로는 허리에 손을 얹고 젠체했다.
“확! 이놈들을 꼬치에 꿰서 한입에 삼켜 버릴까 보다.”
타로의 말에 정령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갔다.
하지만 타로가 마음먹고 마나를 분출시키자 마치 벽에 막힌 것처럼 일정 범위 밖으로 달아나지 못했다.
“내 말을 잘 들으면 목숨은 살려주겠다.”
“네네! 주인님!”
“제 목숨은 당신 것입니다!”
일반 정령들에게 뼈에 사무친 복수심을 갖고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타로의 태도는 의외로 부드러웠다.
물론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정령들은 섬세하기 이를 데 없는 존재이니까.
만약 더 무섭게 한다면 복종보다 자결을 택하게 될 것이다.
정령들에게 둘러싸인 타로가 변신을 했다. 주종 계약을 할 때 변한 모습은 훤칠한 남자였지만 이번엔 긴 머리칼을 늘어뜨린 여자였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신비로운 분위기의 여인!
물론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주요 부위까지 묘사되진 않는다.
그 모습을 보고 암젤이 한숨을 쉬었다.
“녀석. 주인님의 취향을 벌써 눈치채다니 영리하다옹.”
“아니거든!”
정령들의 도움을 받은 타로의 전투력은 상당했다.
던전을 나아가며 소환수의 숫자도 늘어났기 때문에 공략은 점점 속도가 붙었다.
‘오케이. 생각보다 할 만하네.’
일 층 공략을 마쳤을 때는 여덟 시간이 흐른 뒤였다. 레벨은 2가 더 올라 162가 되었다.
8
‘예상은 했지만 상당히 오래 걸리겠네.’
일 층 공략에 걸린 시간-그리고 한 번에 두 층을 공략할 수 없는 공력 소모–을 감안하면 최상층에 도달할 때까지 꽤 긴 시간이 걸릴 듯했다.
하루에 한 층씩 공략한다고 해도 꼬박 두 달이 걸린다.
물론 이것도 엄청나게 빠른 속도지만 이래저래 복잡한 상황에 처해 있는 내 입장에서는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두 달이라는 것도 다른 데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을 경우에 그런 거니까.
‘어쩔 수 없지.’
던전의 끝판왕인 A급 공략인데 오래 걸린다고 투정 부릴 수만은 없다.
‘끝판왕이라…….’
나는 방금 한 생각을 곱씹어 보았다.
진짜 던전은 A급이 끝인 걸까?
그렇다고 보기엔 이 게임의 전체 난도와 밸런스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대결의 탑도 3분의 1을 채 공략하지 못했으니까.
‘뭔가 더 있을 것 같은데…….’
게이머의 입장에서는 우려가 되는 게 당연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걸 미리 생각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아직 A급 던전도 쉽게 공략하지 못해 허덕이고 있으니까.
하루에 한 층씩이라는 계획은 막힘없이 진행되어 5일 뒤에는 6층까지 공략할 수 있었다.
내 레벨도 클래스 진화를 할 수 있는 170에 이르렀다.
나는 망설임 없이 ‘중급 정령사’가 되는 길을 택했다.
[클래스 ‘초급 정령사’가 ‘중급 정령사’로 진화했습니다.]
[업적 ‘초고속 클리어’의 효과로 직업 숙련도가 Max가 되었습니다.]
[액티브 스킬 ‘정령을 다루는 힘(C)’을 얻었습니다.]
‘정령을 보는 눈’을 얻었을 때 그런 것처럼 새로 얻은 스킬도 A급까지 강화했다.
새 스킬을 얻자 정령들이 나를 보는 눈도 바뀌었다.
“어? 사람이 좀 달라진 것 같은데?”
“좀 잘생겨진 것 같아.”
“나 조금 친해지고 싶은 건지도.”
내가 웃으며 손을 뻗자 깔깔거리며 주위에 모여든다.
그것을 본 타로가 엄한 표정을 지었다.
“이것들이 주인님과 직접 접촉하려고 들어? 백만 년은 이르다, 이놈들아!”
겁을 집어먹은 정령들이 타로의 발밑에 머리를 조아렸다.
“오냐오냐. 한 번은 봐줄 테니 다음부턴 조심해라.”
나는 그것을 보고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래, 네 맘대로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