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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왕 클리어러-208화 (208/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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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식왕 : 클리어러 208화

    통화를 마친 박재환은 몸을 일으키지 않고 식사를 했다.

    네 명이 예약을 해서 한 명밖에 남지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게이머는 대식가이다. 4인분의 음식이 그의 입안으로 빠르게 사라져 갔다.

    조용히 식사를 이어가던 중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는 젓가락을 놓고 전화를 받았다.

    “김재용 씨, 무슨 일이죠?”

    -보고드릴 게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길드장님.

    “말씀하세요.”

    김재용이 박재환에게 보고한 내용은 바로 며칠 전 있었던 이학돈 실종 사건에 대한 것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실종 사건이지만 게이머가 던전에서 실종되었다는 것이 실제로 어떤 의미인지 두 사람 다 모르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왜 지금 하는 거죠?”

    -던전 관리소 측에서 사건을 은폐하려해서 조사하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사건 발생 때 같이 있던 게이머들도 죄다 다른 소리를 해서요.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 저한테 전화를 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저도 이학돈 개인이 잠적한 걸로 알았을 겁니다.

    김재용은 이학돈이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 전화로 이야기했던 내용을 박재환에게 그대로 옮겼다.

    “조성오가 던전을 빼앗은 장본인이라고요?”

    박재환 역시 김재용이 궁금해했던 내용에 가장 큰 관심을 가졌다. 이학돈이 대리를 맡은 이계의 군주 피스티스.

    그가 했던 수수께끼 같은 말이 조성오 때문이었다고?

    이 일의 전말을 고려해 퍼즐을 맞춰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어쨌든 이학돈을 죽인 것이 조성오다, 그 말이죠?”

    “증거는 없지만 정황상 틀림없습니다.”

    “으음…….”

    박재환은 혼란스러웠다. 방금 들은 이야기와 아버지 박한도가 했던 신중해야 한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오버랩되었다.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졌고, 그것을 견디지 못한 김재용이 먼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이 일과 관련해 지시하실 게 있습니까?

    “아니요. 조성오 일은 제가 직접 처리하겠습니다. 일단 이학돈 씨를 대신할 사람을 찾는 데 집중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박재환은 문득 이상한 느낌을 받고 목뒤에 손을 가져갔다. 손가락 끝에 묻어나는 이질적인 느낌.

    마나를 집중시키자 이질적인 마나가 둥그런 형체를 드러냈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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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단한 놈이네.”

    나는 바로 앞에 놓인 검은 구슬 안의 영상을 보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체이싱 비드와 합성한 추적 스킬은 독특한 형태를 띠고 있다.

    송신기 역할을 하는 마나 덩어리, 수신기 역할을 하는 블랙 비드가 한 쌍이 되어 추적 대상의 모습을 중계하는 것.

    녹화 기능도 있어서 박재환이 스킬을 해제했음에도 그전에 담긴 내용이 구슬 안에 고스란히 남았다.

    녹화된 시간은 고작 이십여 분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정도로도 박재환을 둘러싼 정황을 유추하는 게 가능했다.

    내 얼굴도 심각했지만 옆에 앉은 티코이의 얼굴은 두 배 더 심각하다.

    “죄송합니다. 제가 더 확실히 조사했어야 하는데…….”

    “아니야. 그것보다 이거 그거지? 박재환이 박한도의 숨겨둔 아들이라는.”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일성 길드의 길드장인 김재용이 박재환에게 말하는 투를 보면 일성의 실질적인 리더가 누구인지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어차피 나쁜 짓 할 걸 각오하고 아들은 드러나지 않게 한 거구나. 자기가 지하의 황제니 장차 그 자리를 물려주려는 거겠지.”

    나는 뒷머리에 깍지를 끼고 상체를 의자에 뉘었다.

    박재환이 일성 길드의 실질적인 리더라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김재용과 나눈 통화 내용이었다.

    이들은 이학돈이 군주의 대리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대리인과 나눈 대화까지 모두 공유한 듯하다.

    이는 일성 길드가 단순한 이익 집단이 아니라는 것을 뜻했다.

    어쩌면 세계적 범주로도 게이머의 비밀에 대해 가장 근접한 길드일지도.

    ‘아니, 속단할 수는 없지.’

    모든 길드, 그리고 게이머들의 속내를 전부 들여다볼 순 없으니까.

    어쩌면 자연스러운 흐름일지 모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계의 군주들이 이쪽 세상을 노리고 있고, 그 성과가 조금씩은 드러나야 맞으니까.

    ‘마음 단단히 먹어야겠네.’

    이미 다수의 이계 군주를 쓰러뜨렸지만 어쩌면 내가 ‘대결의 탑’에서 군주를 쓰러뜨리는 속도보다 이계 군주들이 이쪽 세상에 건너오는 게 빠를지 모른다.

    “이자를 어떻게 하실 겁니까?”

    티코이도 영상을 통해 박재환이 나를 직접 처리하겠다고 한 걸 보았다.

    나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어떻게 나오나 보자. 바보들은 자만이 패망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모르니까.”

    “넵, 저는 박한도와 일성 길드에 대해 더 조사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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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재환을 만난 것은 ‘대리인 영입’이라는 특수 퀘스트를 달성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일이 틀어졌으니 거기 계속 매달릴 필요성을 못 느꼈다.

    어차피 부 퀘스트도 시간이 필요하니 다음 단계로 눈을 돌릴 때이다.

    A급 던전 공략.

    서울에 있는 A급 던전은 단 하나뿐이기 때문에 어디로 예약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대한민국에는 A급 던전이 한 개 더 있지만 지금까지 모든 퀘스트가 서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니까 이제 와서 무대 폭이 넓어질 일은 없을 듯했다.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게 있기 때문에 코어 탐색을 해보았다.

    지금까지 NPC들을 만난 장소는 대부분 던전이었으니까.

    만약 서울에 있는 던전에 동료가 없다면 타 지역으로 범위를 넓혀볼 작정이었다.

    B급 던전의 코어까지 더해졌기 때문에 탐색망이 매우 넓어졌다. 서울의 약 3분의 1을 커버할 정도로.

    이미 탐색할 곳이 정해져 있으므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약 십분 간 집중한 끝에 A급 던전 안에 숨어 있는 미미한 반응을 찾아냈다.

    ‘있구나!’

    현재로선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A급 던전에 던져질 정도면 꽤 강한 NPC일 것이다.

    던전도 공략하고 동료도 찾고.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다.

    예약을 하고, 공략 준비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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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급 던전은 전 세계적으로도 숫자가 극히 적다.

    브레인 게이머들의 분석에 따르면 대충 단위 면적당, 인구수당 던전의 수가 정해지는 것 같지만 그나마도 정확하진 않았다.

    서울에 있는 A급 던전은 50층 규모이다.

    어마어마하게 크지만 대부분의 A급 던전이 그러하므로 특출 날 건 없다.

    다만 대한민국 안에 이 던전을 공략할 만한 능력을 가진 길드의 수가 제한되어 있었다.

    소위 말하는 3대 길드 정도가 안정적으로 공략할 수 있고, 다른 길드들은 두세 개가 연합하여 가끔 필요에 의해서만 공략을 했다.

    ‘테오루마니까 그럴 수밖에…….’

    나는 이 던전을 차지하고 있는 몬스터들을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테오루마는 갑옷을 입은 기사형의 몬스터로, 과거에 실존했던 기사들이 저주를 받아 만들어졌다고 한다.

    일시적으로 생명을 꺼뜨릴 수 있어도 완전히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한 번 쓰러뜨리면 최소 수백 년에서 수천 년까지 눈을 뜨지 않으니 죽이는 것과 진배없었다.

    보통 A에서 B 등급의 게이머 수십 명이 팀을 이루어 공략하는데, OG는 그만큼의 인원이 없으니 나름의 방안이 필요했다.

    때문에 나는 이번엔 소환술에 집중할 작정이었다.

    검은 소환술을 사용하면 쓰러진 몬스터를 다시 일으키는 게 가능하니까.

    거기에 공예술로 결정석을 박아 넣으면 더욱 강력한 소환수를 만들 수 있다.

    원래라면 슬롯 부담 때문에 적용하기 힘든 전략이지만 가브리엘을 상대하면서 소환술이 한 단계 더 강해졌으니까.

    가브리엘을 제외하고 최소 아홉 마리의 테오루마를 거느릴 수 있었다.

    아이템을 넉넉히 챙긴 후, 가용한 모든 팀원을 데리고 던전으로 향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번에도 예약을 하는 것만으로 던전 관리소의 소장이 대기하고 있다가 나를 맞았다.

    던전 관리소 공무원이라면 현재의 공무원 체계에서 톱에 속하는 고급 직렬이다.

    거기에 A급 던전을 관리하는 소장은 몇 명을 제외하고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박관춘을 생각하고 이번에도 귀찮은 일을 당하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이 던전의 관리소장은 박관춘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활약하신 바는 익히 들었습니다.”

    60에 가까운,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남자는 고작 스무 살밖에 되지 않은 나를 정중하게 대했다. 그러면서도 태도나 말투에는 비굴함이 전혀 없다.

    “다행입니다. 조성오 씨처럼 능력 있는 헌터가 우리나라에 나와서요.”

    왜 이런 말을 하나 싶어 마인드 리더를 사용해 보니 A급 던전을 맡은 그의 고민이 엿보였다.

    지금은 무색한 개념이 됐지만 던전은 게이머들이 제때 공략을 하지 않으면 몬스터들이 튀어나오는 곳이다. 만약 A급 던전이 터져 서울에 몬스터들이 범람하게 된다면…….

    꿈에도 보기 싫은 아비규환이 펼쳐질 것이다.

    A급 던전은 B급 이하의 던전과 달리 공략할 능력을 가진 게이머가 극히 적다.

    관리소장의 입장에서는 강한 게이머가 한 명이라도 더 나와 서울의 치안이 안전하게 유지되길 바라는 것이었다.

    ‘훌륭한 분이네.’

    박관춘 같은 인간이 득실대는데도 전체 시스템이 붕괴되지 않는 이유는 이런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관리소장은 신중한 얼굴로 내게 제안했다.

    “조성오 게이머님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아시다시피 이곳은 공략하기 무척 까다로운 곳입니다. 저희가 마련한 데이터가 있으니 일단 그것을 숙지하고 출발하시지요.”

    “그런 게 있나요?”

    지금까지 던전 공략을 하면서 이런 말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규정상 매뉴얼은 꼭 제작하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그 규정을 무시하는 곳이 더 많지만요.”

    만약 매뉴얼이 제대로 갖춰져 있더라도 오만한 게이머들은 그걸 참고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초기에는 반드시 필요한 시스템이었을 테지만 시간이 지나 게이머들 나름의 공략 노하우가 쌓이면서 점점 유야무야되었을 터.

    “네, 보여주세요.”

    내 말에 관리소장 이덕철이 밝은 표정을 지었다.

    “따라오십시오.”

    A급 던전의 관리소는 그 위상에 비해 화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법사의 동굴 던전 관리소가 훨씬 그럴듯해 보일 정도다. 물론 그쪽이 그렇게 번쩍번쩍하게 만들어 놓은 건 게이머들을 접대하기 위해서였다.

    “왜 시간을 낭비하는 거냐옹.”

    따라 들어와 고급 쿠키라도 대접받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 암젤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하품을 했다.

    “이것도 경험이잖아. 만약의 경우 이계 군주들이 던전을 넘어오면 그걸 막는 건 결국 인간이니까.”

    이덕철 같은 사람은 한 명이라도 많이 알아두는 게 낫다. 던전 관리 공무원 중에 제대로 된 사람이 있다는 게 반갑기도 하고.

    “그렇군요.”

    내 기준엔 부족하지만 매뉴얼은 생각 이상으로 잘 만들어져 있었다.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부족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관리소장과의 면담도 끝났겠다, 나는 NPC들을 이끌고 던전 입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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