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7
독식왕 : 클리어러 207화
Chapter 51 – 대리인? 대리인!
1
하루가 가기 전에 유진이에게 문자가 왔다. 대리인 후보자와 만날 약속을 잡았다는 것.
그녀가 후보자를 꾀는 방법은 간단하다.
OG의 멤버를 비밀리에 모집하고 있다는 얘기로 나와 면접을 주선하는 것이다.
어차피 판단은 내가 하는 거니까 만나보고 적격자가 아니면 면접을 통과하지 못한 것으로 둘러댈 수도 있다.
그래도 이왕이면 한 번에 적격자를 만날 수 있길 바랐다.
이런 얘기가 계속 새어 나가면 좋을 게 없기 때문에.
상대도 바쁘지 않은지 다음 날 바로 약속이 잡혔다. 아니면 그만큼 OG에 들어오고 싶은 열망이 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조은영이나 그녀의 친구들이 보인 반응을 보면 OG가 적어도 대한민국 게이머들에게는 가장 들어오고 싶어 하는 길드 같으니까.
약속 장소는 전에 이한호와 조은영을 만난 한정식집이었다.
각각의 공간이 분리되어 있어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기에 제격인 장소기 때문에.
약속 장소에 나가자 유진이와 조은영이 먼저 나와 있었다.
“길드장님! 또 뵙네요?”
조은영이 팔을 붕붕 흔들며 반가워했다.
“길드장이라고 하지 마세요. 같은 길드 소속도 아닌데. 그리고 제가 나이가 어리니까 편하게 말하시면 돼요.”
“헉!”
조은영의 눈이 커졌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눈이 이번엔 옆에 앉아 있는 유진이에게 향했다.
“두 분이 친구라고 했죠?”
유진이와 이미 언니 동생 사이가 되었으니 족보가 이상하게 꼬인 셈이다.
혼자 뭔가 셈을 하던 조은영이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쩔쩔맸다.
고작 말 놓는 걸 이렇게 어려워하다니, 그녀 안에 내 이미지가 어떤 건지 궁금할 지경이다.
“그러면, 음…….”
“언니, 뭘 그렇게 어려워해? 그냥 성오야 하고 부르면 되지.”
“그래도, 그 어마어마한 OG의 길드장님이신데…….”
나는 실소를 흘렸다.
“어마어마한 건 또 뭐예요? 어차피 자기 소속 아니면 남이지.”
“남이라니요! 섭섭하게……. 우린 비밀도 나눠가진 사인데.”
남들이 들으면 오해할 만한 소리에 유진이도 동조했다.
“그래, 남이라는 말은 나도 좀 그렇다.”
“미안. 사과할게. 아무튼 말 편하게 해요, 은영 누나.”
누나라는 말에 은영의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어? 그, 그래. 서, 성오…… 야.”
어렵게 말하고 꺄핫 하고 얼굴을 감싸 쥔다. 유진이 은영을 보고 귀엽다는 듯 말했다.
“언니, 모솔인 거 너무 티 내는 거 아니야?”
“어머! 얘가 못하는 소리가 없어!”
은영이 유진의 팔을 팡팡 때렸다.
“아야! 아무리 매지션이라도 언니처럼 등급이 높으면 아프거든? 그만 때려.”
“어머! 미안해~”
여성 게이머 둘과 시끌벅적한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문 안으로 키 큰 그림자 하나가 드리웠다.
마른 체형의 훤칠한 남자가 고개를 까닥해 인사한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는 방 안을 둘러보다가 나를 발견하고 빤히 바라보았다. 호기심이라기보다는 노려보는 것에 가까운 시선이다.
오히려 호기심이 생긴 것은 내 쪽이었다.
기분이 나쁘기 이전에 상대에게서 무시 못 할 에너지가 전해졌기 때문에.
‘레벨이 상당히 높겠는데?’
인정하기 어렵지만 나보다도 강한 게이머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진이가 자세한 얘기를 안 해서 그렇지, 아마도 로치온에 부합하는 게이머로 선정한 것이 아닐까 싶다.
시선을 거둔 남자가 조심스러운 태도로 내 맞은편에 앉았다.
그에게 내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OG 길드장 조성오입니다.”
“네, 박재환입니다.”
상대 레벨이 높아서인지 정보가 바로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내 ‘투시자의 눈’ 스킬은 S등급에 레벨도 만렙이다.
악수를 하고 나서야 상대 정보가 천천히 드러났다.
이름 : 박재환
레벨 : 199
성향 : 오더(Order) - / 카오스(Chaos) A = 카오스(Chaos)
업적 : 도도한 심장(군주의 대리인 청탁을 세 번 거절했다. 전투 개시 후 10분간 모든 스탯 30퍼센트 상승)
랭킹 : 78위
스탯 : 근력 230/ 체력 228/ 민첩 216/ 행운 58
스킬 : 버서커(S, Lv100), 돌격(S, Lv62), 문 커터(A, Lv35)
이력 : 게이머가 되기 전에는 검도 선수로 세계 대회 우승 경력이 있다. 검을 다루는 데는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나, 당연하다는 듯 A급 기사형 게이머로 각성했다.(기사형)
약점 : 기사형이라는 능력 자체가 레어한 만큼 압도적인 역량을 발휘한다. 업적 효과로 전투 개시 후 십분 간은 상대하기 까다로우니 지공을 펼칠 것을 추천.
보상 : 근력 30(40~50%), 체력 28(45~55%), 버서커(25~35%), 돌진(40~50%), 문 커터(50~60%)
‘뭐냐, 이놈은…….’
레벨 199에 랭킹이 78위. 단순 레벨만 비교해서는 로치온보다도 뛰어나다.
스탯은 나보다 낮아도 업적 효과까지 감안하면 거의 비등해진다고 볼 수 있었다.
레벨은 내가 훨씬 낮으니 일 대 일로 겨루면 승부가 어떻게 날지 장담할 수 없다.
‘그나저나 업적이라니…….’
그동안 간과하고 있었는데 업적이라는 것이 나만 달성할 수 있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아직까지는 업적까지 달성한 강자를 만나지 못했다.
‘군주의 대리인 청탁을 세 번이나 거절했어?’
물론 이계 군주 입장에서는 이만한 강자를 찾기 어려울 테니 청탁이 많이 들어갔을 수 있다.
하지만 이계의 속사정을 잘 모르는 일개 게이머가 그걸 거절할 발상을 했다는 게 놀라웠다.
설마 세 번 거절하면 업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걸 알았을 리는 없고.
아무튼.
‘될 리가 없지.’
카오스 성향에 보란 듯이 A가 붙어 있는데 로치온의 대리인이 될 수 있을 리 없다.
잘못 짚어도 너무 잘못 짚었다.
티코이가 이런 정보를 놓쳤다는 것은 박재환의 수완이 그만큼 좋다는 뜻이기도 할 터.
“왜 그러시죠?”
표정 변화를 감지한 건지, 아니면 불온한 마나를 감지한 건지 박재환이 내게 물었다.
“대한민국에 이런 훌륭한 게이머가 숨어 있었다는 게 놀라워서 그렇습니다. 현재 소속된 길드가 없으시다고요?”
“과연 말 한마디 나누고 제 능력을 가늠하다니 안목이 높으시군요. 길드에 가입하지 않은 것은 아직 딱 맞는 곳을 못 찾아서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직접 길드를 만들 깜냥도 안 되고요. OG길드 가입 제안을 받고 기뻤습니다. 이제까지 제가 몸담을 곳을 찾지 못한 이유가 OG에 들어가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 정도였죠.”
예의 바른 말이지만 이미 카오스 게이머라는 것을 알아버려서 어떤 말도 신뢰성 있게 들리지 않는다.
레벨이 너무 차이가 나서인지 마인드 리더도 작동하지 않았다.
나는 유진이 쪽을 흘긋 바라보았다.
‘조심하라니까…….’
하긴 겉으로 선인인 척 연기를 하면 속내까지 알아내기 어려우니까.
더구나 박재환은 자기 마나를 깨끗하게 컨트롤하고 있다.
처음부터 이런 악인과 만나게 될지 유진이라고 예상했겠는가?
티코이마저 걸러내지 못했다면 말은 다한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오늘 바쁜 일 있다고 하지 않았어? 면접은 나 혼자 해도 되니까 너는 그만 들어가도 돼.”
입으로 그렇게 말하면서 전언을 보냈다.
[이놈은 카오스 게이머야. 그것도 엄청 강한.]
내 전언을 받고 조은영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유진이가 먼저 그녀의 팔짱을 꽉 끼고 말했다.
“언니, 두 사람 편하게 이야기 나누라고 우리는 먼저 일어나자.”
“어? 그, 그래.”
유진이와 조은영이 방을 나가고 나서야 조금 안심이 되었다.
아무리 미친놈이라도 한정식집에서 난동을 부릴 리 없지만 카오스 게이머는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박재환은 피식 조소를 흘렸다.
느낌이지만 내가 두 사람에게 일부러 자리를 피하라고 요구했다는 걸 간파한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상대를 꿰뚫어 보는 능력이 보통이 아니시군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딴청을 피우자 그의 입가에 드리운 웃음이 진해졌다.
“아니면 말고요.”
상대의 태도가 달라진 만큼 나도 더 이상 본심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OG에 들어오고 싶다는 말, 진심이 아니죠?”
“네, 길드장님을 보니 알겠네요. OG의 거품이 얼마나 심한지. 예상대로 노아 알렌발이었네요.”
기분 나쁜 말이지만 질 낮은 도발에 평정심이 흩어질 만큼 내 경험치도 녹록지 않다.
“더 얘기 나눌 건 없겠네요. 아무튼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계산은 먼저 했으니 천천히 식사하고 가십시오.”
아직 음식이 나오기 전이지만 나는 몸을 일으켰다.
박재환이 마나를 숨기지 않게 되니 방 안 공기가 숨이 막힐 만큼 갑갑해졌다.
본격적으로 적의를 드러내고 싸우면 모르겠는데 좁은 방에서 대치만 하고 있자니 가슴이 근질거린다.
방을 나서는 동안에도 불쾌한 시선이 계속 등을 찔렀다.
2
한정식 집을 나와서 곧장 유진이에게 전화했다.
-벌써 얘기 끝난 거야?”
“응, 너랑 은영 누나 나가고 나도 바로 일어났어.”
-미안해. 나는 그런 사람인 줄 전혀 몰랐어.”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니까. 다만 당분간은 너무 강한 게이머에게 접근하지 않는 게 좋겠어. 베루니나 파로나도 대리인이 없으니까.”
-그럴게. 그 사람은 어떡하지? 카오스 게이머인 걸 알았는데 신고할 수도 없고.”
신고라는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굳이 건드려서 좋을 놈은 아니야. 하지만 조치를 취해놨으니 곧 본색이 드러나겠지.”
-조치?”
“그런 게 있어.”
방을 나서기 전에 박재환에게 ‘추적’ 스킬을 걸어두었다. S등급, 만렙인 데다 ‘체이싱 비드’와 합성을 해서 한층 강해진 스킬이다.
상대 능력을 감안해도 충분히 효과를 발휘할 거라고 생각했다.
똥은 피하는 게 상책이지만 그 똥이 직접 나를 만나고자 찾아왔으니까. 저의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었다.
“너랑 은영 누나 아직 같이 있어?”
-응, 언니도 옆에 있어.
“그럼 점심 같이 먹자. 나도 밥 못 먹어서 배고파.”
3
혼자 남겨진 박재환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래, 직접 만나보니 어떻더냐?
“별것 아닙니다. 완전히 거품이에요. 그것도 개거품.”
-그게 전부야?
“네?”
-놈의 배후에는 노아가 있어. 피스&호프와의 관계도 장담할 수 없고. 단순히 거품이라고 끝날 얘기가 아니다.
“알고 있어요. 근데 아시잖아요. 아무리 날고 기는 게이머라도 죽으면 끝이라는 거. 우리는 자기 몸뚱이로 먹고사는 종자들이니까. 안 그래요, 아버지?”
아버지라고 불린 박한도가 전화기 안에서 침음을 흘렸다.
-신중해라. 이미 아들 한 명을 잃었는데 너까지 잃고 싶지는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