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5
독식왕 : 클리어러 205화
5
“63위 군주 피스티스가 어떤 놈이지?”
내 물음에 수보타가 한참 생각을 했다.
“제가 알기로는 별 볼 일 없는 마법사입니다. 파라얀의 가문보다 훨씬 격이 떨어지는 가문 출신이고요. 제 기억이 맞다면 아마 더 높은 순위 군주의 비호를 받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음…….”
재차 장고에 들어간 수보타가 갑자기 손가락을 탁 튕겼다.
“이제 생각났습니다. 이름이 콘치온이었죠. 48위인가 49인가 되는 군주입니다. 순위는 낮지만 대장 노릇하는 걸 좋아해서 자기보다 낮은 순위의 카오스 게이머들과 관계 맺는 걸 즐겼습니다.”
“네 말은 피스티스를 건드리면 놈이 움직일 수도 있다는 거야?”
“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음…….”
이학돈을 죽이는 게 간단한 거라고 여겼는데 이러면 문제가 달라진다.
“영지는 어때? 콘치온이랑 피스티스의 영지는 가까울까?”
“네, 콘치온은 먼 영지의 군주들과 관계를 맺을 만큼 세력이 강하지 않으니까요. 패거리들의 영지가 모두 인접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닐곱 개의 영지가 붙어서 커다란 하나의 영지를 이루고 있는 셈이죠. 이쪽 세상의 사정에 비추어 말하면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의 관계와 같다고 할까요?”
“아…….”
골치 아프다. 골치 아파.
가브리엘, 오이누스와 싸우며 결정석을 많이 흡수해 능력이 진일보하긴 했지만 한 번에 예닐곱 명의 카오스 군주를 건드릴 만큼은 아니다.
어쩔 수 없지.
운이 좋으면 이학돈을 죽이면서 군주 피스티오까지 딸려 나올 수 있으니까.
일단 대리인부터 해치우자.
6
이학돈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자신과 연결된 이계 군주 피스티스가 노발대발하고 있기 때문에.
-통로를 찾으라고 했더니 던전을 빼앗기면 어쩌자는 거야? 멍청한 놈한테 기회를 주는 게 아니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놈이나 살릴걸. 에잉~
피스티스가 말하는 것은 일 년 전 던전에서 일어난 사고이다.
평소라면 어렵지 않았을 던전 공략이 변고가 생기면서 꼬이게 되었다.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와 혼란을 겪은 길드원들이 집중하지 못하고 게네아를 놓쳐 버린 것.
나중에야 그게 이계 군주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당시에는 뭔가 큰일이 생긴 것만 같았다.
당시 피스티스가 귀에 속삭였다.
-다른 놈들을 죽이고 네가 최고라는 것을 입증해라. 그러면 대리인이 될 자격을 하사하겠다.
뭔지는 몰라도 기회라고 여겼다.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길드원들의 등에 하나하나 비수를 꽂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자기 손으로 길드원들을 몰살했고, 그 대가로 이계 군주의 대리인이 되었다.
-내가 그쪽으로 건너 갈 통로를 찾아라.
밑도 끝도 없는 피스티스의 주문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던전 어딘가에 통로가 있고 그걸 통해 이계의 군주가 이쪽 세상에 건너올 수 있다는 것.
그 통로를 찾으라는 것이 이계 군주의 명령이었다.
‘시발! 내가 그걸 어떻게 찾아?’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반항하지 못하고 같은 던전만 공략한 시간이 일 년이다.
성과 없이 시간을 보내는 동안 이계 군주의 초조함은 극에 달했다.
-못난 놈! 무식한 놈! 그때 네가 아닌 다른 놈을 살렸어야 했는데!
듣기 싫은 잔소리가 점점 심해지는 찰나, 이번엔 던전을 다른 자에게 빼앗겼다고 했다.
그 소리를 한 게 불과 며칠 전.
이제는 잔소리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메지지를 보내댔다.
-빨리 그놈을 찾아 죽이지 못할까?
-뭐하고 있느냐! 이 무능한 놈!
‘던전을 뺏겼다는 말이 대체 뭔 소리야?’
할 수만 있다면 이계에 건너가 군주인지 뭔지 하는 놈을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놈이 말하는 통로라는 것을 찾을 수 없고, 찾는다고 하더라도 군주씩이나 된다는 이계인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퀭한 얼굴로 고민하고 있을 때 던전 관리소 소장인 박관춘이 부드럽게 말을 걸어왔다.
“얼굴이 반쪽이 되셨네요. 요즘 피곤한 일이 많으신 모양입니다. 공략은 며칠 쉬시고 사우나나 다녀오시지요. 제가 잘 아는 곳이 있으니 미리 말을 해두겠습니다.”
번들번들한 얼굴의 던전 관리인은 자신이 일성 길드에 들어간 이후로 부쩍 친한 척을 했다.
영리하고 수완이 좋은 놈이라 일성 길드 뒤에 누가 있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성 길드의 진짜 정체는 모를 것이다. 어떤 게이머들로 이루어진 곳인지.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매번 예약 없이 와도 공략할 수 있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니, 뭘요. 이 정도는 당연히 해드려야죠. 하하.”
가식적인 웃음을 짓던 박관춘의 눈이 한순간 번쩍 뜨였다. 그가 황급히 몸을 일으키더니 뒤뚱대며 누군가에게 달려간다.
“아이고~ 조성오 길드장님! 오시면 오신다고 말씀을 해주시지. 예약도 안 하고 어인 일이십니까?”
박관춘의 말에 이학돈의 고개가 돌아갔다.
‘조성오……?’
그 이름이라면 자신도 익히 알고 있다. 대외적인 활동이 활발하지는 않아도 잠재적인 역량이 뛰어난 게이머로 여겨지고 있으니까.
무엇보다 피스&호프의 부길드장이 한국인으로 귀화해 OG에 들어갔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대단한 화제를 모은 바 있었다.
더구나 자신에게는 조성오의 존재가 특별한 이유가 더 있었다.
바로 일성 길드가 눈엣가시로 여기는 존재가 OG와 조성오이기 때문에.
박한도가 일성 길드를 만든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조성오를 죽이기 위함이라고 한다.
죽인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이야기 같아도 대한민국 지하경제의 황제라고 불리는 그라면 불가능한 일이 아닐 터였다.
‘저놈이 조성오구나…….’
실물을 보니 훨씬 어려 보인다. 약관의 나이에 촉망받는 길드를 만들어 세계 제일의 브레인 게이머까지 거느리다니.
참 부러운 얘기다.
‘응?’
이제 보니 조성오의 옆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따라붙고 있었다. 기묘할 정도로 예쁜 고양이라 저절로 눈길이 갔다.
문득 고양이가 이쪽을 쳐다보았다.
“헉!”
갑자기 가슴이 서늘해져 얼른 눈길을 돌렸다.
‘뭐지? 각성수인가?’
각성수를 애완동물로 거느리고 있다니, 역시 잘나가는 놈이라 다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소강상태였던 피스티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놈이다! 저놈이 던전을 차지했어! 놈을 죽여라! 빨리!
“뭐?”
‘던전을 빼앗았다는 게 조성오였어?’
뜻밖의 이야기에 머리가 아파온다. 비단 피스티스의 잔소리가 다시 시작되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조성오를 죽이라니…….’
일단 자기 힘으로 가능할지 확신할 수 없다.
그때 조성오와 짧은 대화를 마친 박관춘이 돌아왔다.
이학돈은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조성오가 여길 왔답니까?”
“며칠 전에 던전을 공략하다가 분실한 물건이 있다고 합니다. 세이프 에어리어에 두고 온 것 같다고 해서 입장을 허가해 드렸습니다.”
“그래요?”
이학돈의 눈이 빛났다.
“혼자 온 것 맞죠?”
“네, 각성수 한 마리만 데리고 혼자 오셨네요.”
“그렇군요. 후후…….”
뜻 모를 웃음을 흘리는 이학돈을 보며 박관춘이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눈치가 있는 터라 따져 묻지는 않았다.
“몇 층으로 간다고 하던가요?”
“네? 죄송하지만 그것까지는 말씀드릴 수가…….”
“소장님.”
“네?”
“알려주시면 제가 그분에게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소장님 덕분에 던전 공략을 참 편하게 하고 있다고요. 던전 관리소 소장 정도로 그칠 만한 분이 아니라고도 말씀드리겠습니다.”
박관춘은 이학돈이 말하는 그분이라는 게 누구인지 금방 감을 잡았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잠깐 고민하는 척하던 그가 냉큼 말했다.
“19층입니다.”
“고맙습니다.”
이학돈이 몸을 일으키자 박관춘이 얼른 당부했다.
“꼭 그분께 말씀 좀 잘해주십시오.” “걱정 마세요.”
이학돈은 관리소를 나서며 누군가에게 연락했다. 조성오를 죽이는 것은 자기 몫이 될 테지만 그전에 상황을 알릴 필요가 있기 때문에.
“던전을 빼앗겼다는 게 조성오가 공략했다는 말이라고?”
이야기를 듣던 상대방이 그 사실을 궁금해했다.
“글쎄, 나도 뭔 소린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고.”
“그래……? 너 지금 어딘데?”
이학돈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뿐 아니라 휴대폰을 전원을 꺼서 차원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공을 빼앗길 수는 없지.’
조성오를 죽이면 피스티스와 박한도 양쪽에게 인정을 받게 될 것이다.
-빨리 쫓아가! 이 굼벵이 같은 놈! 놓치면 가만두지 않겠다!
그러면 이 지겨운 잔소리도 조금은 줄어들겠지.
7
내가 굳이 던전 관리소에 들른 것은 이학돈의 실물을 확인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마법사의 동굴을 자기 것처럼 드나들며 이 던전만 죽어라고 공략하고 있다고 한다.
티코이가 알아낸 바에 따르면 일성 길드는 일류 길드를 표방하여 팀을 여러 개로 나누었다고 했다.
각 팀들이 각각 B급 던전 세 곳과 A급 던전 한 곳을 전담하여 공략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전략은 우수한 게이머를 다수 보유한 초일류 길드들이 주로 택하는 방법이다.
던전과 게이머의 관계에도 상성이 있으니까.
본인에게 맞는 던전만 반복해서 공략하게 하는 것이 게이머의 성장과 결정석 회수 측면에서 훨씬 효율적이다.
하지만 이학돈이 마법사의 동굴에 집착하는 것이 단지 그 이유 때문이라고 보이지 않았다.
그가 사고를 당하고 대리인이 된 곳도 바로 이 던전이니까.
실물을 보고 멀리서나마 생각을 읽으면 더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 기대 이상으로 많은 것을 알아냈다.
‘통로를 찾는다고?’
통로라면 분명 이계를 드나들 수 있는 구멍을 일컫는 것일 테고, 그걸 발견하면 아마 이계 군주가 이쪽 세상으로 올 수 있는 모양이었다.
통로의 존재라면 나 역시 알고 있었다. 주거지에 인접한 C급 던전에서 칼리타가 이계로 가는 통로를 발견했었으니까.
그뿐만 아니라 이학돈은 나를 보고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단순히 일성 길드 멤버로서 부여받은 사명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박한도가 나를 죽이고 싶어 한다고 하더라도 자기 길드원들에게 직접 명령을 내릴 수는 없을 테니까.
이유는 몰라도 상황이 재밌게 됐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 이학돈을 죽이라는 퀘스트를 받았으니까.
원래는 생각만 읽고 나중을 기약하려 했지만 그가 내게 살의를 품었다는 걸 확인한 뒤 계획을 바꾸었다.
암젤과 함께 던전에 들어가 19층으로 워프했다.
그렇게 하면 아마 이학돈이 나를 쫓아올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긴 텀을 두지 않고 그가 나타났다. 열 명이나 되는 졸개들을 이끌고서.
“안녕? 이학돈 씨.”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인사하는 내게 상대가 당황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