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4
독식왕 : 클리어러 204화
“아, 그러고 보니.”
티코이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지난번에 제게 맡긴 방어구의 업그레이드가 완료되었습니다.”
티코이가 가져온 방어구는 이전 페이즈 ‘영토’ 퀘스트를 완료하고 얻은 데피니온 세트이다.
성능을 확인하니 과연 이제까지 써 온 모르돈 세트보다 두 배는 더 좋은 마법사 전용 방어구가 되어 있었다.
“고마워.”
“별말씀을요. 그리고 이것도 있습니다.”
티코이가 꺼내 놓은 것은 전에 조사를 하라고 맡긴 용액이었다.
“결과가 나왔어?”
“네, 좀 고생을 하긴 했지만 어떤 용도로 만들어진 것인지는 밝혀냈습니다.”
“뭔데?”
“주인님도 아시다시피 피스&호프에서는 결정석 흡수 기술로 게이머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이 용액은 흡수한 결정석 에너지를 체내에서 다시 분해하는 역할을 합니다.”
“뭐?”
내가 예상했던 대로 이 용액은 가브리엘을 제어할 수단이 맞았다. 거기 더 나아가 니콜라스는 가브리엘을 죽일 생각이었던 것이다.
흡수한 결정석 에너지를 체내에서 분해해 버린다면 마나가 뒤엉켜 죽게 될 테니까.
“무서운 놈들이네.”
동시에 대단한 놈들이기도 하다. 결정석 흡수 기술을 확보한 것으로도 모자라 그것을 다시 분해하는 기술까지 획득하다니.
이는 아마 부하들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이용될 것이다.
조직에 충성한 대가로 결정석을 하사하고, 그것을 볼모로 삼아 목숨을 저당하는 방식.
아마 대부분의 카오스 닷컴 게이머들은 이런 게 존재하는지도 모를 터.
“내게도 효과가 있을까?”
“아닙니다. 주인님은 결정석을 흡수하는 방식이 다르니까요. 장담컨대 이 용액이 효과를 발휘할 수 없을 겁니다.”
“다행이다…….”
렉터가 크립톤 나이트를 쥐고 슈퍼맨을 위협하듯 피스&호프가 내 약점이 될 물건을 가지고 있다면 골치 아팠을 텐데.
아니, 이건 반대의 의미다.
내가 이 용액을 갖게 된 이상 결정석으로 능력이 뻥튀기된 피스&호프 게이머들을 제압할 수 있는 수단이 생긴 거니까.
“티코이, 혹시 이걸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겠어?”
“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충분히 가능합니다.”
“좋아. 당장은 아니지만 기술은 확보하고 있는 게 좋겠다.”
“넵,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4
“자아…… 이제.”
‘부’ 퀘스트를 달성할 조건을 확보했으니 ‘명예’ 퀘스트를 공략할 차례이다.
나는 시스템 메뉴를 열어 업적 ‘대리인 살해자’ 항목을 터치했다.
[확인하고 싶은 층수를 터치하십시오.]
내 앞에 거대한 결투의 탑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이 중 하단부가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13층 이하의 모든 층.
8층까지 공략했으니 그보다 다섯 층 위인 13층. 즉, 60위 군주의 대리인까지 확인할 수 있다.
먼저 64위 군주가 있는 9층을 터치했다.
[대리인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군.’
모든 카오스 군주에게 대리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래도 60위 군주까지 전부 대리인이 없진 않겠지.
그랬다면 퀘스트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을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다음 층을 터치했을 때 바라던 메시지가 나타났다.
[63위 군주 피스티스의 대리인은 ‘이학돈’입니다.]
이름을 보니 한국인인 것 같다. 멀리 가지 않아도 된다면 좋은 일이지.
나는 메시지의 ‘이학돈’ 부분을 터치했다.
이름 : 이학돈 ★63위 군주 피스티스의 대리인
레벨 : 142
성향 : 오더(Order) - / 카오스(Chaos) A = 카오스(Chaos)
업적 : -
랭킹 : 3,289위
스탯 : 근력 44/ 체력 50/ 민첩 48/ 행운 140
스킬 : 커튼 피어(A, Lv20) ,매직 애로우(B, Lv16), 월 디스트럭션(B, Lv12)
이력 : 1년 전 B-001 던전의 공략에 나섰다가 팀이 전멸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팀원들을 미끼로 던져 가장 오래 생존했던 그는 죽음 직전에 63위 군주 피스티스의 선택을 받아 대리인이 되었다. 현재는 일성 길드에 소속되어 있다.(매지션형)
약점 : 대리인이 된 뒤 ‘커튼 피어’ 스킬을 갖게 되었다. 그것을 제외하면 특별한 것 없는 매지션 게이머.
보상 : 민첩 12(40~50%), 행운 16(50~65%), 커튼 피어(25~40%), 매직 애로우(50~70%),월 디스트럭션(40~60%)
대리인의 정보를 본 내 감상은 짧았다.
‘별거 아니네.’
B-001 던전은 내가 직전에 공략한 마법사의 동굴을 뜻한다.
바꿔 말하면 이 던전 이면의 영지 주인이 바로 63위 군주 피스티스라는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네.’
단순히 이학돈이라는 카오스 게이머를 꾀어내 죽이면 되는 퀘스트이지만 그런 사실을 알게 된 이상 가능하면 63위 군주까지 한꺼번에 없애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일단 보류.’
먼저 11층부터 13층까지 군주 대리인을 확인하기로 했다.
전부 터치해 본 결과 13층인 60위 군주만이 대리인을 가지고 있었다.
이름 : 기무라 마히로 ★60위 군주 파테스의 대리인
레벨 : 169
성향 : 오더(Order) - / 카오스(Chaos) A = 카오스(Chaos)
업적 : -
랭킹 : 287위
스탯 : 근력 132/ 체력 156/ 민첩 162/ 행운 44
스킬 : 아이스 픽(A, Lv50), 아이스 피스트(B, Lv20)
이력 : 카오스 군주의 대리인이 된 것은 5개월 전이다. 길드 ‘아라쿠레’를 창설하기 전까지는 던전에서 게이머를 약탈하는 등 다수의 범죄를 저질렀다.
범죄자 사면 특별법에 의거 범죄 경력을 지우고 길드를 만들었다. 예쁜 용모 탓에 일본 내에서는 상당히 인기 있는 게이머이기도 하다.(신체 강화형)
약점 : 얼음 속성을 사용하는 특이한 형태의 신체 강화 게이머. 반대 속성인 화염을 이용해 싸울 것을 추천한다.
보상 : 근력 22(40~50%), 체력 24(35~45%), 민첩 26(30~40%), 아이스 픽(20~35%), 아이스 피스트(40~50%)
‘일본인 게이머냐…….’
이 여자를 쓰러뜨리기 위해서 일본에 가야 하는 걸까?
귀찮은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다고 여겨졌다.
갈수록 싸움의 스케일이 커질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가상현실 게임에서 대륙을 오갔던 것에 비하면 그래도 아직 귀여운 수준이다.
“확인했으니 움직여 볼까?”
나는 다시 티코이를 찾았다. 이학돈에 관한 개략적인 정보는 알았지만 그를 해치우기 위해서는 그것만으로 부족하니까.
먼저 그가 소속되어 있는 일성 길드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기로 했다.
142레벨의 매지션이라면 자기가 길드를 만들어 길드장을 해도 될 텐데 굳이 길드에 가입한 걸 보면 일성이라는 곳도 호락호락해 보이지 않았다.
‘일성…….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긴 한데.’
내 부탁을 받고 조사를 하던 티코이의 표정이 야릇해졌다. 뭔가 깨달은 듯 혼자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속도가 빨라졌다.
“아아, 그랬구나.”
“왜?”
“일성 길드는 엄밀히 말해 오성 길드의 후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성 길드?”
그제야 일성 길드의 이름이 왜 익숙하게 느껴졌는지 깨달았다.
전에 오성 길드라는 망나니 집단을 몰살시킨 적이 있다.
집안 좋은 게이머들끼리 모여 범죄도 서슴지 않았던 나쁜 놈들이었지.
“일성 길드가 놈들하고 연관이 있다고?”
“사실 오성 길드가 주목을 받은 건 그 부모가 대한민국의 최상류층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부모들도 오성 길드를 키워서 자기들에게 도움이 방향으로 이용하려고 했고요. 하지만 자식들이 범죄자들인 게 드러나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본인들도 대중의 질타를 받아 기반을 잃게 되었죠. 개중 딱 한 명만이 건재합니다.”
“그 사람이 일성 길드랑 관련이 있다는 거야?”
“네, 이름은 박한도. 대한민국의 지하경제를 주무르고 있는 사람입니다. 지하에 있는 인물인 탓에 그런 사건을 겪고도 피해가 적었던 거죠. 그가 게이머들을 모아 만든 길드가 일성 길드입니다. 길드를 중심으로 대한민국의 게이머 시장을 잠식하려는 야심을 가진 것 같습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만으로 여기까지 알아낸 티코이는 정말 능력자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내가 관심이 있는 것은 일성 길드가 아니라 이학돈이라는 개인이다. 일단은 놈만 죽이면 퀘스트가 달성되는 거니까.
“얘길 듣자니 박한도는 길드를 키워서 피스&호프처럼 되고 싶어 한다는 거 아냐. 경제도 주무르고 정부도 주무르는.”
“네, 분명합니다. 문제는 대한민국 정부도 그에게 협력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길드가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걸 보면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후…….”
이한호가 했던 위부터 아래까지 다 썩어 있다는 말이 생각났다.
절대 권력은 부패할 수밖에 없다고 했던가?
수년에 걸쳐 권력과 부는 게이머들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그전에 세상을 지배하던 재력가, 정치가들도 어디까지나 인간이니까.
발 빠르게 게이머들과 커넥션을 만들어 상부상조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빠른 시간에 비정상적으로 만들어진 구조인 탓에 부패의 밀도는 훨씬 높아지고 말았다.
이것이 게이머를 비판하는 블로그에서 본 내용이고 나도 백 퍼센트 공감하는 내용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던전과 이계 군주를 공략하는 것도 골치 아픈데 가급적 신경 쓰고 싶지 않았던 부분이고.
‘별수 없나…….’
지금은 소강상태이지만 주적인 피스&호프와의 대립이 다시 시작될 텐데, 현재 상태로는 계속 밀릴 수밖에 없다. 방법은 OG를 피스&호프에 뒤지지 않는 길드로 키우는 것밖에.
이 바닥도 적자생존, 서바이벌 논리가 적용되기 때문에 피라미드의 높은 곳에 올라가려면 경쟁이 불가피하다.
‘일성 길드가 그런 곳이라면…….’
단순히 이학돈만 처치하고 끝낼 게 아니라 길드 자체를 건드려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피스&호프라면 몰라도 대한민국의 일개 길드를 상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테니까.
그 와중에 얻을 전리품도 적지 않을 것이다.
계속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키보드를 두드리던 티코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 자식들이…….”
“왜?”
“사실 OG를 폄하하는 반응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꽤 있었습니다. 워낙 소수이고 댓글이 달려봤자 공감을 못 받아서 크게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여겼는데……. 이제 보니 그 배후에 일성 길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걔들이 왜?”
“박한도는 주인님에게 아들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자기 길드를 키우는 데 OG가 방해된다고 여기기 때문이겠죠. 대한민국 일등 길드가 되려면 OG가 눈엣가시일 테니까요.”
‘거, 참.’
일이 커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