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
독식왕 : 클리어러 196화
가브리엘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나 역시 피부가 녹아버릴 것 같은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그에게서 떨어졌다.
가브리엘이 상처 난 가슴을 내려다보며 몇 마디 말을 중얼거렸다.
표정이나 분위기로 보아 내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에 놀란 모양이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고, 한두 번의 공방만으로도 서로의 능력을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다.
나도 지금까지 했던 싸움과는 질적으로 다른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멜팅 레이저를 흘려보내고 근접 이동을 통한 기습 공격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로또를 통해 스탯을 40퍼센트나 상승시켰기에 가능한 일이다.
혹시나 했던 기대는 그의 가슴팍에 난 상처가 금세 아무는 것을 보고 거두어졌다.
역시 어설픈 공격으로는 치명상을 입힐 수가 없다. 로또로 스탯을 상승시켜 근접전을 펼친다고 해도 시간을 끄는 역할만 할 뿐이다.
‘그렇다면…….’
나는 가브리엘에게서 더욱 멀리 거리를 띄웠다.
무기를 인벤토리에 돌려놓고 의상을 바꾸었다.
‘모르돈’
갑옷이 사라지면서 마법사의 로브가 몸을 휘감았다.
가브리엘의 눈이 가늘어지며 더욱 짙은 흥미를 띠었다. 그에게는 나를 경계하는 낌새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입가를 히죽거리며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굳이 마인드 리더를 쓰지 않아도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나를 죽이고 얻게 될 스탯스톤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변태 자식.’
물론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이 싸움을 다르게 표현하면 결국 먹느냐 먹히느냐의 싸움이니까.
나는 두 손을 쭉 뻗어 검은 마나를 활성화했다.
소환술을 사용해 몬스터들을 소환했다.
“크르르르…….”
소환된 것은 네 마리의 스티코이였다. 최근에 공략한 마법사의 동굴에서 죽인 몬스터들.
일반적인 소환수가 아니라 검은 공예술로 강화까지 한 놈들이다.
결정석으로 강화를 하면 스탯이 상승하므로 놈들이 사용할 마법 스킬의 능력이 상승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레벨이 높은 데다 강화까지 한 몬스터들이기 때문에 소환하는 데 더욱 많은 마나가 소모되었다.
꿀꺽꿀꺽.
마나포션을 꺼내어 단숨에 두 병을 비웠다. 현기증이 날 만큼 어지럽던 머리가 금방 정상으로 돌아왔다.
“가라!”
호기롭게 명령을 내렸지만 기본적으로 스티코이는 경계심이 많은 몬스터이다.
그들은 가브리엘을 빙 둘러싸는 형태로 포지션을 잡고 나서야 각자 마법을 쏘아냈다.
퍼엉-
펑-
물 속성의 마법이 세찬 기세로 가브리엘을 향해 날아갔다.
스티코이 중 두 놈은 물 속성 마법을 사용한다. 나머지 두 놈은 디버프 마법을 가지고 있었다.
녀석들이 마법을 시전하자 당당하게 서 있던 가브리엘의 몸이 풀썩 꺾어졌다.
그의 몸에서 열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보며 나도 7서클 마법 블리자드를 날렸다.
우두두둑-
공간이 시퍼렇게 얼어붙으며 가브리엘의 몸뚱이도 거기 휘말렸다.
순간적으로 이렇게 쉽게 괴물을 잡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은 섣부른 기대였다.
시퍼렇던 그의 몸이 조금씩 오렌지빛을 띠기 시작하더니 얼음이 녹아 줄줄 흘러내렸다.
그가 양팔을 벌리는 걸 보고서야 아차 하는 생각에 외쳤다.
“돌아와!”
소환수는 한 번 생명력이 바닥까지 떨어지면 다시는 제 기능을 할 수 없다.
내 목소리가 스티코이들에게 닿기 전에 먼저 현란한 폭발이 먼저 일어났다.
퍼버버벙!
마치 폭죽처럼 소환수들이 박살 나는 모습을 보고 가브리엘이 ‘파이어워크’ 스킬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되찾은 소환수는 단 한 마리뿐이다.
“무서운 놈이다옹.”
도도한 고양이 암젤이 적을 인정하는 발언을 했다.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잘못 생각한 거 아니냐옹?”
넓은 공간이지만 스킬로 창조된 만큼 경계는 분명히 존재했다.
머리 위 이십 미터쯤 되는 지점에 얇고 투명한 막이 자리하고 있다.
암젤이 말한 의미는 명료했다.
제한된 공간 안에 가브리엘을 가둔 것이 오히려 자충수가 된 게 아니냐는 뜻.
이 안에는 도망갈 곳도 피할 곳도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나는 가브리엘을 노려보며 말했다.
위기일수록 게임중독자 본연의 성격이 튀어나온다.
현실에서 괴물을 마주했다면 오줌을 지리며 벌벌 떠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게임이라고 생각하면 크게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어떻게 공략하나 하는 생각에 머리가 팽팽 돌아간다.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게는 현실도 게임으로 인식할 수 있는 감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퍼버벙-!
나와 암젤이 있는 바로 앞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오색으로 부서지는 불꽃의 파편을 피해 우리는 좌우로 멀어졌다.
‘파이어워크’의 무서운 점은 발동과 동시에 폭발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우리가 스킬을 피할 수 있었던 것도 폭발이 30센티미터가량 전면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물론 가브리엘이 봐주려는 마음에 직접 타격하지 않은 것은 아닐 테고, 스킬이 미치는 범위가 딱 거기까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가브리엘을 바라본 나는 섬뜩한 감각에 휩싸였다.
칠흑의 환영이 덮쳐오는 것 같은 착각.
‘피어’는 여러 가지 형태로 발동하기 때문에 당하기 전에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나는 얼른 두 눈을 가리고 몸을 수그렸다. 동시에 소환술을 사용해 한 마리 남은 스티코이를 불러냈다.
“끼아아악!”
스티코이는 나오자마자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나를 향하던 ‘공포’가 소환수를 대신 덮쳤기 때문이다.
눈을 가렸음에도 피부를 찌르는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파이어워크의 공격범위가 20미터쯤 된다면 공포가 미치는 범위는 그보다 넓을 것이 분명하다.
나는 이미 마리아가 공포에 당해 수 시간 동안 환각에 사로잡혔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마 그녀가 가브리엘을 향해 강한 적개심을 갖지 않았더라면 더욱 깊은 충격을 받고 재기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 틀림없다.
양손으로 전면을 가린 채 뒤로 물러나면서 암젤 쪽으로 흘긋 눈길을 주었다.
그곳에서는 뜻밖의 장면이 펼쳐지는 중이었다.
암젤이 공포 스킬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대응하고 있었던 것.
그녀의 눈에서 붉은 광선이 뻗어 나와 검은색 마나를 밀어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나는 곧 그 붉은 광선이 필레소의 홍안이 발동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필레소의 홍안에도 공포 효과가 갈음되어 있다.
말하자면 공포로 공포를 제압하는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상대적으로 레벨이 낮은 암젤이 가브리엘의 스킬을 당해낼 수 있었을 리 없지만, 유니크 등급의 필레소의 홍안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붉은색의 광선은 검은색 마나를 쭉쭉 밀어내어 급기야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었다.
되레 가브리엘이 암젤의 공포에 노출되어 몸을 움찔 떨었다.
석화까지는 아니더라도 경직 상태에 들어간 듯 움직임이 정지된 게 포착되었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마법 스킬을 발동시켰다.
‘아쿠아 애로우!’
손바닥을 교차해서 연속해서 쏘자 십여 대의 물 화살이 가브리엘을 향해 날아갔다.
펑! 펑! 펑!
“끄아아아…….”
가브리엘이 뒷걸음질을 치며 괴로워했다.
나는 이번 대결이 승기를 잡을 기회가 많지 않은 싸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렵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마나가 바닥날 때까지 마법을 날렸다.
스무 대가 넘는 화살을 정면으로 받아내고 나서야 가브리엘은 전의를 상실한 것처럼 움츠러들었다.
몸을 휘감았던 불길이 잦아들고 점차 피부의 열기가 식어들었다.
“끝난 것이냐옹?”
암젤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지만 나는 의심스러운 마음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가브리엘 같은 강자가 고작 아쿠아 애로우를 수십 대 맞았다고 생명력이 다한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항상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던 것을 감안하면, 보이는 것 이상의 잠재력을 갖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것을 내보이지 않고 쓰러진다는 것은 내 많고 많은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문득 그의 피부색이 기묘한 빛으로 물들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열기가 가라앉았다면 본래의 피부색으로 돌아가는 것이 정상일 텐데, 그의 몸뚱이는 마치 석탄처럼 검게 물들고 있었다.
‘석탄……?’
나는 불길한 느낌과 함께 소리쳤다.
“암젤! 물러나!”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한 지 불과 1초가 지나기 전에 고막을 울리는 굉음이 터졌다.
꽈앙-!
어찌나 강력한 폭발인지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넘어져 바닥을 굴러야 했다.
고개를 들어 돌아보자 가브리엘이 있던 곳을 중심으로 엄청난 불길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용암처럼 이글거리는 불길이 사납게 혀를 날름거렸다.
그 광경에 압도되어 경계가 무너진 순간, 어깨를 향해 강렬한 충격이 떨어졌다.
퍽!
“으악!”
후두두둑-
하늘에서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화산암이 쏟아져 내렸다.
한 발을 얻어맞고 몸이 굳었기 때문에 이어서 두 발을 더 얻어맞아야 했다.
“으윽…….”
비틀대며 일어나 급히 포션을 마셨다.
“암젤!”
새까맣게 가려진 시야 속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다옹…….”
곧 재를 뒤집어쓰고 새까매진 암젤이 어둠을 뚫고 달려 나왔다.
화산암을 맞진 않은 것 같지만 털이 더럽혀졌다는 사실에 짜증이 난 그녀였다.
“정말 지긋지긋한 녀석이다옹.”
시야가 어느 정도 확보되자 좀 전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가브리엘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 공간 안에 세 사람만 있는 것이 확실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알아보지 못했을 만큼 변한 모습이었다.
흡사 움직이는 석탄 같은 모양.
몸 여기저기에서 탁탁 소리가 나며 불꽃이 튀겼다.
‘용광로라…….’
가브리엘 입장에서는 최후의 보루였을 스킬.
얼핏 보아도 어마어마한 마나를 소모할 것 같은 기술이다. 변신 상태를 유지하려면 더 많은 마나를 소모해야 하겠지.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부터는 잘 피하기만 하자.”
암젤이 내 말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스킬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한계가 있다. 공격을 잘 피하기만 하면 저절로 승기는 우리 쪽으로 올 것이다.
“크아아악!”
괴물처럼 변해버린 가브리엘이 양팔을 펼쳐 허공에 수십 발의 폭죽을 터뜨렸다.
퍼버버버벙-!
파이어워크가 화려하게 공중을 수놓았지만, 그중 한 발도 나나 암젤을 맞추지 못했다.
‘이성을 잃어 영점도 흩어졌나 보군.’
적을 맞히지 못하는 스킬은 괜한 마나 낭비일 뿐이다.
지이이잉-
굵은 빛줄기가 허공을 휘저었다.
나와 암젤은 가브리엘이 쏘는 레이저를 피해 몸을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