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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왕 클리어러-193화 (193/245)

# 193

독식왕 : 클리어러 193화

마음속으로 강력히 저항하는 것과는 달리 집중력이 흩어져 스킬이 풀리고 말았다.

이제껏 유지하던 셰릴의 모습이 사라지고 마리아의 본래 모습이 드러났다.

가브리엘은 코를 가까이 들이대고 그녀의 체취를 가득 들이켰다.

“너에겐 독특한 냄새가 나. 그래서 지금까지 잊을 수 없었지. 설마 이곳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이런 걸 인연이라고 하나? 아니면 운명?”

큭큭큭.

귓가에 가브리엘의 낮은 웃음소리가 퍼지는 것을 들으며 마리아는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가위에 눌린 것처럼, 커다란 뱀에게 몸뚱이가 꽁꽁 묶여 버린 조그만 쥐처럼. 아무 저항을 할 수 없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입술을 몇 번 달싹거리다가 이내 완전히 포기했다.

“걱정하지 마. 너를 죽이진 않을 거다. 니콜라스는 아직 네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모양이니까. 대신 네 친구들에게 인사를 전해주어야겠다.”

‘끄아아악!’

마리아는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속으로만 터져 나갔을 뿐, 실제로 입 밖에 나가 소리가 되지는 않았다.

머릿속으로 영상들이 스쳐 지났다.

영상 속에서 그녀는 수십 가지 방법으로 가브리엘에게 죽임을 당했다. 포식자 앞에 선 힘없는 동물처럼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는 끔찍한 고통이 각기 다른 방법으로 끊임없이 이어졌다.

‘으악! 으아아악! 끄아아아아!’

…….

정신을 차린 것은 방 안에 울리는 노크 소리를 듣고 나서였다.

“지부장님! 안에 계세요?”

연락이 되지 않는 그녀를 비서가 직접 찾아온 것이다.

“헉!”

마리아는 벌떡 일어나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바닥을 뒹굴었는지 의자들이 쓰러져 있고 몸은 먼지투성이였다.

입안이 바싹 마르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가브리엘은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다.

얼마나 이러고 있었을까?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았더니 저녁 일곱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반나절의 시간이 통째로 증발한 것이다.

“지부장님! 혹시 무슨 일 있으신가요?”

마리아는 덜덜 떨리는 몸을 일으켜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몸 안에 남아 있는 마나를 쥐어짜 변신 스킬을 사용했다.

“들어오세요.”

비서가 조심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셰릴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제자리에 멈춰 섰다.

“지, 지부장님?”

변신 스킬로도 무너진 정신을 감추기엔 역부족이었다.

퀭한 얼굴의 마리아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몸이 좋지 않네요. 일주일치 스케줄을 모두 조정해 주세요. 꼭 내가 필요한 일이 아니면 연락하지 말고.”

“네? 아, 네…….”

“나가보세요.”

비서가 회의실을 나간 뒤 마리아는 창가로 걸어가 밖을 내다보았다. 건물 앞에 있던 세단과 승합차는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가브리엘이 남긴 메시지는 분명하다.

공포.

오래전에 그를 보고 느꼈던 공포는 오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만큼 그가 강해졌다는 뜻이다.

상상했던 수준을 훨씬 초월할 만큼.

마리아는 어두워지기 시작한 창밖을 보면서 엄지손톱을 짓씹었다.

‘어떡하지…….’

4

나는 노아와 함께 주거지로 찾아온 마리아를 보고 깜짝 놀랐다. 짧은 시간 동안 십 년은 더 늙어버린 것 같은 얼굴.

원래 엄청난 동안을 자랑하는 그녀이지만 지금은 그녀의 나이, 아니, 그보다도 훨씬 늙어 보였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마리아가 가브리엘을 만났다고 합니다.”

“네? 가브리엘은 오늘 밤늦게 도착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건 우리를 속이기 위한 페인트였습니다. 이미 다섯 시간 전에 한국에 도착했고, 가장 먼저 피스&호프 지부를 방문한 겁니다.”

나는 떨리는 몸을 끌어안고 있는 마리아를 바라보았다.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정신 공격을 당했음을 짐작했다.

비록 전투에 특화된 능력자는 아니지만 마리아도 상당한 경지에 오른 게이머이다.

그녀가 이 정도로 동요하는 것을 보면 정신공격의 강도가 엄청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가브리엘은 왜 피스&호프 지부를 먼저 찾아간 거죠?”

“……메시지를 전하려고 온 거야.”

나는 마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보면 가브리엘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내 물음이 어떤 뜻을 담고 있는지 마리아는 곧바로 이해했다.

자신이 당한 일을 떠올리며 몸을 흠칫거리는 그녀를 보자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보다 가브리엘의 전력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다.

“강해졌어.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물론 가브리엘의 구체적인 강함은 그의 정보창을 들여다보아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리아의 얘길 듣는 것만으로 웬만큼은 피부로 전해졌다.

“생각보다 영리한 놈입니다.”

신중한 얼굴로 노아가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한국 지부장을 죽일 목적으로 찾아가진 않았을 겁니다. 구체적으로는 몰라도 누군가가 셰릴의 대역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겠죠. 그녀에게 겁을 주어서 우리 편의 의욕을 꺾으려는 생각이었을 겁니다.”

어설프게 겁을 주어서는 오히려 경계심을 키우는 역효과만 낳는다. 그런 발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자기 실력에 엄청난 자신감이 있다는 방증이었다.

나는 가브리엘이 이 일을 계산하고 수행했다고는 보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상대의 숨통을 조이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이다.

강한 포식자가 먹잇감을 앞에 두고 조금씩 공포심을 자아내는 것처럼.

가브리엘의 태도에서는 강자로서의 여유와 사냥을 앞둔 흥분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숫자는 몇이나 되나요?”

“열다섯 정도 돼 보였어. 자동차 세 대로 움직이고 있더군.”

“열다섯 명이 맞을 겁니다. 그들이 바꿔치기한 비행기 티켓이 정확히 열다섯 장이니까요. 물론 이것은 선발대에 한한 이야기입니다.”

“후발은 몇 명이나 될까요?”

“그들은 가브리엘을 감시할 목적으로 들어오는 것이고, 비밀리에 움직여야 하니 소규모일 수밖에 없습니다. 보통 두 명 정도가 따라붙는 것이 정석이죠.”

“웬만해선 그들은 싸움에 개입하는 일이 없겠군요.”

“네, 하지만 동향은 계속 감시할 생각입니다. 어차피 그들도 그냥 돌려보낼 수 없으니까요.”

가브리엘이 중심이기는 하지만 그가 끌고 왔다는 열네 명의 게이머도 보통 실력이 아닐 것이다.

이제까지 들은 가브리엘의 이미지로 판단컨대 아마 고만고만한 실력을 가진 부하들을 옆에 두지는 않을 것 같으니까.

게다가 그를 길드장으로 보좌할 정도라면 멘탈이 보통 강하지 않고는 불가능할 것이다.

아니면 똑같이 미쳐 있거나.

아마도 전자보다는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

노아는 눈빛이 흐려져 있는 마리아의 손을 잡았다.

“이제 역할은 다 끝났으니 빠져도 됩니다. 원한다면 이 일이 끝날 때까지 피스&호프의 입김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보내드리죠.”

“아니…….”

마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이 일은 내게도 중요해. 지금까지 나는 한시도 가브리엘이 만들어낸 공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어. 니콜라스는 내가 아직 필요하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아마 길드의 실질적인 2인자인 셰릴의 자리를 지우는 것보다 유지하는 게 낫다고 판단해서일 거야. 어디로 피하든 완전히 숨을 수는 없어. 만약 이 싸움에서 진다면 나는 평생 니콜라스의 꼭두각시가 되어 셰릴로 살아야 할 거야.”

마리아의 얘기는 합리적인 추측이었다.

나와 노아가 싸움에 패해 죽는다면 어차피 OG와 그에 관계된 인물들은 함께 소멸한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럼 구체적인 얘기를 해볼까요?”

우리는 가브리엘이 얼마나 강한지에 대해 추측을 하고, 그가 데리고 온 멤버들의 능력, 그리고 그들을 포함한 전체 전투력을 가늠했다.

가브리엘은 나와 마찬가지로 게이머를 죽인 뒤 나오는 콜드 스톤을 무제한으로 흡수할 수 있다.(스킬 스톤을 흡수해도 부작용은 없는 모양이지만 상성과 맞지 않는 스킬은 생성 자체가 안 되니까 의미가 없다.)

나는 비록 카오스 게이머를 죽이고 나온 콜드 스톤을 취하지만 최소한의 도덕적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만약 내가 강해지는 것만 목표로 하고 막 나가는 행보를 보였다면 지금의 가브리엘과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나와 비슷하면서도 대척점에 있는 게이머가 바로 가브리엘이었다.

노아가 물었다.

“어때요? 가능성이 있다고 보나요?”

어차피 이 싸움을 결정짓는 것은 내 무력이다.

노아와 그의 부하들이 한 몫을 하겠지만 결국 나와 파티원들이 가브리엘을 물리쳐야 끝나는 싸움인 것이다.

“쉽진 않아도…… 충분히 해볼 수 있는 싸움입니다.”

반드시 이길 거라고 장담을 하진 않았다. 나도 사실 이 싸움의 승패를 반반이라고 보고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가브리엘의 능력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내 말이 노아에게는 한 가닥 희망이 된 모양이다.

나에 대해 비정상적인 믿음을 가졌다는 점에서는 NPC들과 다를 것이 없는 그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길 가능성을 최대한 높여보도록 합시다.”

이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작전을 논의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바둑이나 체스를 둘 때도 상대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대응 전술이 달라지니까.

가브리엘이 상식을 벗어나는 인물인 점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가 어떻게 나올지 두고 보는 것이 맞았다.

“일단 한국에 들어왔다는 것은 확실하니 소재부터 파악해야겠네요. 후발대도 이미 한국에 들어와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예측 못 할 쪽을 쫓는 것보다 예측 가능한 쪽부터 쫓는 것이 낫겠죠.”

노아는 언제나 믿음직스럽다.

머리 쓰는 일은 그에게 맡기고 나는 주먹 쓸 일에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5

다음 날 오전, 노아에게서 연락이 왔다.

“놈들이 있는 곳을 알아냈습니다.”

“가브리엘 패거리요?”

“그들은 호텔에 묵고 있습니다. 딱히 모습을 숨기려는 의도가 없어 보이더군요. 어젯밤 여자를 사서 술파티를 벌인 모양입니다.”

자신감이 대단한 것이거나 생각이 없는 것이다. 아마 둘 다겠지만.

“후발대의 위치는 알아내셨나요?”

“네, 피스&호프 한국지부의 시크릿 하우스 중 한 곳입니다. 이쪽도 어차피 있을 곳은 한정적이니까 금방 소재를 알아낸 셈입니다.”

시크릿 하우스…….

피스&호프가 한국에 지부를 둔 것이 오래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정말 용의주도한 놈들이 아닐 수 없다.

셰릴이 나를 불러냈던 곳도 아마 그런 곳 중 하나였을 것이다.

“더 알아낸 게 있나요?”

단순히 소재만 파악했다는 이유로 연락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동향이 어떨 거라는 최소한의 힌트는 찾아낸 것이 틀림없다.

역시나, 노아의 음성이 한층 진지해졌다.

“도청을 해보니 그들은 이미 OG의 주거지가 어디인지 알아냈습니다. 내일 밤 직접 그곳으로 들이닥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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