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
독식왕 : 클리어러 190화
조은영과의 인연이 이런 식으로 닿게 되다니. 마치 처음부터 짜놓은 각본처럼…….
나는 위를 한 번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겠지.’
날 각성시킨 이가 신과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모든 걸 꿰뚫어 보고 설계할 수는 없다.
동료가 될 NPC의 배치에 대해서라면 몰라도 일반 게이머와의 만남도 모두 짜 맞추어 놓았을 거라고 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 터.
단순히 내가 운이 좋거나 아니면 조은영이 나와 인연이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내 앞에서 말똥말똥 궁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은영을 보자니 현실 감각이 돌아왔다.
“아, 미안해요. 은영 씨를 자꾸 보니까 예전에 알았던 친구 생각이 나서요.”
“언제 적 친구인데요?”
“아실는지 모르겠는데 제가 오랫동안 혼수상태에 있었거든요. 확실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 초등학생 때겠죠.”
“아아…….”
조은영은 고개를 수그리고 탄식을 내뱉었다. 그에 전염이라도 된 듯 나머지 두 여자도 연민의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십 년간 혼수상태에 있었다는 것은 꽤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이 일에 무관심한 사람들은 금방 잊었겠으나 내 앞에 앉아 있는 세 명은 OG와 조성오라는 인물에 관심이 많아 보이니까.
“어떡해요. 힘드셨겠어요…….”
“저는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날 것 같은데…….”
조은영의 친구 두 명은 안쓰러움을 넘어 공감하는 수준까지 나아갔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단순히 내게 잘 보이려는 목적에서 나온 행동임을 알고 있었다.
가게 안에 걸린 시계를 슬쩍 올려다보고 말했다.
“슬슬 출발할까요? 제 동료들이 던전에서 기다리고 있어서.”
“아, 네…….”
세 명의 여자는 내 말에 무척 안타까워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들을 OG에 들어오게 할 일은 없을 테니 나로서는 시간 낭비일 뿐이다.
물론 조은영과의 만남은 ‘의외 of 의외’였지만.
암젤이 내가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필사적으로 망고주스를 핥아 먹었다. 표정을 보자니 인간형으로 변신해 쭉 들이켜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 같았다.
‘너 그거 별로라고 하지 않았냐?’
7
던전에 도착하자 지난 며칠간 그랬던 것처럼 직원이 알아보고 친절하게 안내를 했다.
아린을 비롯한 파티원들은 주차장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멀리서 여자 파티원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 직원, 그리고 남자 게이머 몇몇이 보인다.
B급 던전에 들락거릴 정도라면 상당히 자신감이 있는 게이머일 텐데 멀리서 바라만 보고 있는 이유는 NPC나 칼리타 등이 평범하지 않은 아우라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주종 관계를 맺는 순간 나 이외의 남자에게는 거부반응을 갖는 시스템이 존재한다.
내가 남자로서 절대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합리적인 가정을 하면 여자 멤버들이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식으로 엉겨 붙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론 개개인의 성격에 따라 내게 보이는 관심의 형태가 다르기는 하지만 이는 절대적으로 적용되는 법칙이나 다름없었다.
십 년이나 경험했기 때문에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다.
“오빵!”
차에서 나가자 붉은 머리 장신 미녀가 제일 먼저 달려들어 팔짱을 끼었다.
“에휴…….”
암젤이 한숨을 쉬었으나 정신연령이 낮은 트레앙을 상대로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녀 입장에서 트레앙은 유일한 약점이나 다름없었다.
곧이어 조은영 일행도 자동차를 주차시키고 차에서 내렸다. 각자 자기 차를 타고 왔는데, 조은영의 것은 벌어들이는 수입에 걸맞지 않은 국산 소형차였다.
이를 보아도 그녀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돈이나 겉모습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조은영의 친구들은 내 옆에 몰려든 여자들을 보고 얼굴이 굳어졌다.
[역시 주위에 미녀가 많구나. 아주 다국적 미녀들이네.]
[어휴, 쓸데없는 생각 말고 OG에 들어가는 것만 목표로 해야지.]
그녀들 역시 일반적인 기준으로는 미인 축에 속했으나 NPC들이나 칼리타 옆이라면 경쟁이 안 되는 게 당연하다.
일부러 가까이 다가오지 않고 멀리서 그런 생각들만 하고 있었다.
다만 조은영은 생긴 것만큼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쪼르르 달려와 감탄을 쏟아냈다.
“이분들이 OG멤버들이신가요? 얘기만 들었는데 이 정도로 미인이실 줄은 몰랐어요! OG는 다국적 길드였군요!”
“아니요. 모두 한국인입니다.”
“네?”
머릿속이 복잡한 모양이지만 내가 그렇다니 납득할 수밖에.
은영이 웅얼거리면서 말을 했다.
“아, 같이 공략하면 재밌을 거 같은데…….”
세 명의 여자가 탈의실에 가서 의상을 바꿔 입는 동안 나도 사람의 눈길을 피해 모르돈 세트로 의상을 바꾸었다.
조은영 일행 앞에서 자동으로 의상이 바뀌는 것을 보여줄 수는 없을 뿐 아니라 평상복을 입고 던전에 들어가는 것도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물론 들어간 다음에 갈아입을 수도 있지만 단숨에 최상층으로 갈 사람이 그렇게 한다는 것은 어색한 일이다.
나머지 멤버들이 한 사람을 둘러싸 가리는 식으로 모든 멤버가 방어구를 착용했다.
밝은 태양 아래에서 파티의 모습을 보니 나조차 위화감이 생긴다. 일반 게이머들의 방어구는 평상복에 근접한 형태로 디자인되는 게 보통이니까.
우리가 모여 있으니 마치 단체로 코스프레를 하거나 영화 촬영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흠흠.”
헛기침을 통해 위화감을 날려 버리고 멤버들을 이끌고 던전 입구로 향했다.
지나치는 남자 직원이나 게이머들에게서 선망의 눈길이 와 닿았다. 그들의 관심사는 우리가 입은 독특한 의상보다도 아린이나 트레앙, 칼리타였다.
수보타도 충분히 특별한 아우라를 발산하고 있지만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게다가 일반적인 기준에서 강자의 포스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존재감이 흐린 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은영 일행이 방어구를 착용하고 왔다. 물론 그녀들은 공략을 하지 않을 거지만 최소한의 안전 수칙이라는 게 있으니까.
더구나 B급 던전 정도 되면 안전이 최우선이 되는 게 당연하다.
“우와, 이게 방어구예요?”
은영은 내 로브를 만지작거리면서 감탄했다.
“네, 해외에서 직구한 물건인데 모양이 좀……. 그렇죠?”
“아니요! 엄청 예뻐요! 왜 나는 이런 게 있는 줄도 몰랐지? 어디서 사셨어요? 저한테도 알려주시면 안 돼요?”
“아……. 그게, 하나 남은 물건을 제가 사 버려서……. 재료 구하기가 어려워서 요즘은 제작을 안 한다고…….”
“네? 어휴…….”
은영은 로브를 계속 만지작거리며 안타까운 한숨을 쉬었다.
여러모로 독특한 취향을 가진 여성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겪으면 겪을수록 은영에게 인간적인 호감이 생겼다. 물론 그녀가 파라얀의 대리인이 될 자격을 갖추지 않았더라면 오늘만 보고 말 생각이었지만 앞으로도 계속 접촉을 해야 할 입장이니까.
이왕이면 코드가 맞는 게 더 좋겠지.
나머지 두 친구는 파티원들을 본 이후로 감히 접근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NPC들과 이계인들이 발하는 아우라 때문일 것이다.
개개인이 떨어져 있을 경우에는 어떨지 몰라도 단체로 모여 있으니 더 거리감이 생기는 거겠지.
나는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은영과 두 친구가 귀환서로 다가가 손을 얹었다. 같은 범위에 있는 나와 파티원들까지 한꺼번에 최상층으로 이동을 했다.
화아악-
아래쪽 층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무거운 공기가 몸을 덮쳐왔다. 레벨이 낮은 이들은 견딜 수조차 없을 짙은 위압감이 담긴 공기이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 안에서 솟구치는 흥분을 느꼈다. 두려움이나 공포감 때문에 느끼는 흥분이 아니라 도파민과 세로토닌과 같은 긍정적인 물질이 분비되며 느끼는 흥분이다.
입가에는 저절로 미소가 걸렸다.
조은영과 두 친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이제부터는 저희들이 하겠습니다.”
그녀들은 안타까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 헤어진다면 언제 또 OG나 그 길드장과 연결이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마음을 알기 때문에 내가 한 마디를 덧붙여 주었다.
“연락드리겠습니다.”
그제야 표정들이 밝아져서 한마디씩 했다.
“좋은 공략되세요, 길드장님.”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파이팅!”
그녀들이 사라지고 나서 보다 진중한 표정으로 앞을 내다보았다. 아래층보다 훨씬 많은 수의, 훨씬 레벨이 높은 몬스터들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두려운 마음은 없었다.
새로 얻은 마법 ‘리플렉션’과 ‘블리자드’가 있기 때문에.
더 정확히 말하면 리플렉션이 공략을 더욱 수월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거울 벽을 생성해 상대의 마법을 튕겨내는 스킬.
물론 적의 능력이 더 강하다면 마법을 튕겨내는 게 불가능하겠지만 이곳에 7서클을 능가하는 마법을 구사하는 몬스터가 있을 리 없다.
“가자.”
내 뒤로 파티원들이 따라붙었다. 내 자신감이 전이되어 모두가 밝은 표정이다.
8
‘리플렉션!’
뻗쳐진 양손 밖으로 강한 빛이 분사되며 공간 여기저기에 투명한 벽이 생성되었다. 물론 그것들은 파티원 각자의 몸을 가린 것이었다.
이제는 수보타조차 겁을 먹지 않고 어그로를 끄는 게 가능해졌다.
“에베베베~ 여기 봐라! 못난 놈들아! 난쟁이 똥자루들이 겁먹고 벌벌거리는 꼴이라니. 큭큭큭.”
놀랍게도 수보타의 도발이 신중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마법사 몬스터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언어가 통한 것은 아닐 텐데, 그만큼 수보타의 꼴 보기 싫음이 업그레이드되었다는 증거이다.
말투가 꼭 키보드 배틀을 벌이는 초등학생을 방불한다.
자기 엉덩이를 톡톡 두드리며 혀를 날름거리는 꼴이, 같은 편이 아니었으면 뒤통수를 후리고 싶을 정도로 얄밉다.
‘성장했구나, 수보타.’
전투는 이전보다 훨씬 수월해졌다.
마법만 봉인하면 애초에 방어력과 생명력이 형편없는 놈들이다. 140레벨을 초과하는 파티원들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진형의 가장 바깥에서 리플렉션만 사용했다. 7서클 마법이기 때문에 유지하는 것만으로 상당량의 마법이 소모된다.
머리가 어지러울 때마다 포션을 한 병씩 꺼내어 삼켰다.
[퀘스트를 달성했습니다.]
[퀘스트를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던전 퀘스트를 달성하는 속도도 빨라졌다. B급 던전이지만 마치 우리 수준보다 훨씬 떨어지는 던전에서 연습 사냥을 하는 것만큼 일방적인 공략이었다.
‘이래서 상성이 중요하다니까.’
던전 마스터를 잡는 것이 목표이지만 일부러 중간단계를 건너뛰지 않고 꼼꼼하게 몬스터들을 죽이면서 나아갔다.
[레벨 147이 되었습니다.]
레벨 업 메시지가 나타난 것과 거의 동시에 주변으로 짙은 안개가 깔렸다.
‘시작됐군.’
안쪽에서 후드를 뒤집어쓴 커다란 그림자가 쑥 불거졌다.
던전 마스터 게네아.
놈이 불청객들의 존재를 인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