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식왕 클리어러-188화 (188/245)

# 188

독식왕 : 클리어러 188화

“단, 선제 공격은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동맹이라는 사실을 크레도에게 노출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은 시간을 끌어야 하고, 세력을 모으는 게 우선이니까요.”

“동의합니다. 크레도와 직접 부딪치는 것은 위험해요. 우리가 모두 힘을 합친다고 해도 그를 당해낼 수 없습니다.”

파라얀의 말에 아르바난도 신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놈도 동맹이 있다는 거군.”

“네, 게다가 크레도는 무시할 수 없는 잠재적 인맥이 있습니다. 카오스 군주와 오더 군주가 부딪치는 경우 성향이 다른 쪽을 편드는 경우는 없으니까요.”

“골치 아프네.”

여전히 고기를 씹으면서 피오리오가 투덜거렸다.

“오랜만에 세상 구경을 할 수 있어 신나 했더니만 원래 내 힘을 백퍼센트 발휘할 수도 없고, 처음부터 사면초가 상황에 맞닥뜨리다니.”

“배부른 소리 하지 마. 아무리 그래도 죽은 것보다는 살아 있는 것이 낫다.”

아르바난의 말에 피오리오는 대꾸하지 못했다. 입을 다물고 ‘그건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신중해 주세요. 저 역시 당장은 강한 적과 싸워야 하는 입장이라 여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번 싸움이 끝나면 훨씬 강해질 수 있을 겁니다.”

내 말에 조금은 긍정적인 분위기가 살아났다.

“네가 엄청나게 빨리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어. 누구보다도 나와 아르바난 누님이 직접 몸으로 느끼고 있으니까. 아까 한 말은 그냥 의미 없는 넋두리라고 생각해줘. 나 역시 이 정도 페널티는 없는 것보다 있는 편이 더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피오리오가 말을 마쳤을 때 내 뒤 쪽에서 우웅- 소리를 내며 차원문이 열렸다. 나와 파티원들이 본래 있던 장소로 돌아가기 위한 문이었다.

나는 이계에서 온 세 사람에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럼 오늘은 이만 헤어지기로 하죠. 곧 다시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래, 수고해라.”

“또 뵙겠습니다, 성오 님.”

인사를 마치자 등장할 때 그랬던 것처럼 어지럽게 빛줄기가 솟구치고, 이계인이 모두 사라졌다.

각자 있는 곳으로 돌아간 것일 테지만, 서로를 동맹이라 인식했으니 곧 그곳에서도 힘을 합치게 될 것이다.

‘골치 아프게 됐네…….’

이계에서 대립하게 된 크레도는 현실 기준으로 볼 때 니콜라스만큼이나 강한 적이었다.

가슴에 커다란 돌덩어리 하나가 추가된 기분이다.

‘하지만…….’

나는 게임을 하며 배웠던 일반명제 하나를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세상에 공략이 불가능한 게임은 없다.’

어려운 상황일수록 기본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은 니콜라스나 크레도보다는 가브리엘을 먼저 생각할 때였다.

“가자.”

나를 필두로 파티원들이 줄줄이 차원문을 통과했다.

5

다음 날.

조은영과 약속한 시간은 오후 두 시였다. 생각 같아서는 더 이른 시간에 만나고 싶었지만 도움을 요청하는 입장에서 시간까지 내 멋대로 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일찍 나가서 던전을 한층이라도 더 공략할까 생각해 봤지만 시간 내에 끝난다는 보장이 없고, 그럴 바엔 차라리 휴식을 취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침대에 누워 시간을 보냈다.

마냥 빈둥거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오늘 싸우게 될 던전 마스터 게네아의 공략법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마지막으로 공략했던 게 세 달 전이지만 그 기억은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현실로 돌아오기 전의 몇 년은 이미 웬만한 적을 몇 분 안에 녹여 버릴 정도로 강했으니까.

그보다는 처음 게네아와 싸웠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도움이 될 터였다.

초반에는 당연히 나도 많은 고생을 하며 진행을 했었다. 몇 주간 패닉에 빠져 지낸 뒤에는 가진 역량을 모두 쏟아부어 공략에만 매진을 했다.

고생 끝에 일회 차 공략을 끝냈고, 그다음부터는 점점 쉬워졌다.

‘게네아…….’

마요르가 놈에게 넘어가 기억을 잃은 것을 보면 강한 정신 계열 마법을 쓰는 것이 분명했다.

리젠될 때마다 다른 마법을 사용하는 놈이 나오는 게 아니라 항상 같은 놈이 던전 마스터 역할을 할 것이다.

그래야 마요르의 마법이 풀리지 않고 유지되는 것이 설명이 된다.

‘음…….’

내 머릿속 시뮬레이션은 수보타가 점심식사를 가지고 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일회 차 공략을 했던 때를 떠올리자 여러 가지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이입이 되었다.

수보타가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주인님, 식사 가져왔습니다.”

“응?”

나는 침대에서 눈을 뜨고 수보타를 바라보았다.

“수고스럽게 왜 직접 가져왔어. 내려가서 먹으려고 했는데.”

“주인님이 한 번도 방에서 나오시질 않아서 많이 피곤하신가 보다고 생각했습니다. 쉬시는 걸 방해했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야. 고마워.”

나는 그가 가져온 음식 중에서 스프를 한 숟가락 떴다. 녹색과 오렌지색이 섞인 기괴한 빛이었으나 지금까지 경험으로 미루어 한 번도 수보타가 만든 음식에 실망을 했던 적은 없다.

입안에 넣자 설명하기 힘든 풍미가 확 퍼졌다.

처음 먹어보는 것이기는 해도 맛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나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오! 오늘 요리도 맛있는데!”

“주인님!”

수보타는 감격스러운 얼굴로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역시 죽을 고생을 하면서 요리를 수련한 보람이 있습니다. 앞으로도 평생 주인님 옆에서 요리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시옵소서!”

“어, 그래. 식사하면서 생각할 게 좀 있으니까 그만 내려가 봐.”

“넵.”

수보타는 문워크를 하듯 뒷걸음치는 동작으로 침실에서 나갔다.

나는 음식을 먹으며 아까 끊어졌던 생각을 계속했다. 지금의 내 전력과 B급 던전 마스터 수준의 게네아.

파티원들의 능력까지 총동원해서 싸우는 그림을 그리자 그리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계속 생각만 하다 보니 마음이 들끓었다.

‘얼른 싸우고 싶다!’

물론 B급 던전 마스터와 싸우려고 생각한 이유는 가브리엘과 맞붙기 전에 조금이라도 레벨을 올려두기 위한 것이었지만, 어느새 처음의 목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시계를 보았는데 아직 약속시간까지 세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전투 시뮬레이션까지 마친 나는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휴대용 게임기를 손에 들었다.

주거지를 옮긴 뒤에 개인적으로 몰두한 일이 하나 있다면 인터넷으로 게임기와 게임을 수집하는 것이었다.

게임보이나 패미콤과 같은 초창기 게임부터 각종 PC까지 모두 사들였다.

같은 게임이라도 오리지널 게임기와 PC로 하는 맛이 더 각별하니까.

일본에서만 유통되었던 PC9801 컴퓨터도 버전별로 구입했다.

적지 않은 돈이 들었지만 지금 나는 돈에 구애받는 입장이 아니다.

레어한 품목이라서 경매가 붙는 경우에도 최고가로 입찰해 조기에 경매를 매듭지어버렸다.

게임기와 게임은 커다란 방 두 개를 할당해 차곡차곡 쌓아두고 있다.

가정용 게임기 수집이 끝난 뒤에는 업소용 게임기도 수집할 거니까 공간이 더 많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물론 아무리 게임기가 많이 있어도 당장은 할 시간이 많지 않다.

따라서 지금의 수집 행위는 현재보다도 미래를 위한 것이었다. 이계의 군주들을 모두 쓰러뜨린 뒤에 차근차근 하나씩 공략할 생각이다.

아침부터 밤까지 매일 게임만 할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짜릿한 전율이 인다.

‘아직 멀었군.’

나는 휴대용 게임기를 조작하는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이며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당장 하고 있는 게임 하나에만 집중을 해야 하는데, 벌써 나중에 할 게임을 생각하고 있다니.

“후후후.”

물론 이게 고쳐질 버릇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나는 어쨌거나 내추럴 본 게이머니까.

어렸을 때 많은 심리상담가들을 만나고도 고치지 못한 습관을 지금에 와서 어떻게 고치겠는가?

평생 안고 살아가는 수밖에.

“후후후…….”

6

조은영 일행과 만나기로 한 곳은 던전에서 그나마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카페였다. 던전 안에도 편의시설이 있기는 하지만 그곳에는 나와 친분을 만들기 위해 안달인 박관천이 있고, 다른 게이머들의 시선도 지나치게 많이 받게 될 우려가 있었다.

박관천의 계획은 나를 자기의 게이머 커넥션 안에 집어넣는 것이다.

다른 게이머들과 친분을 만든다는 것 자체는 나쁠 것이 없지만 박관천의 정치 행위에 어울려 줄 생각은 없었다.

필요한 인물이라면 다른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가까워질 수 있으니까. 괜한 부스럼이 생길 빌미를 만들 필요는 없는 것이다.

아린을 비롯한 파티원들에게는 시간에 맞춰 던전으로 나오라고 얘기를 해두었다. 다만 암젤만은 굳이 따라오겠다고 해서 동행을 했다.

카페에 도착하자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내게 몰렸다. 딱히 나를 알아보아서가 아니라 멋들어진 외제 자동차가 시선을 끌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암젤의 아름다운 용모도 시선을 받는 데 한몫을 했다.

인간으로 변신한 것은 아니지만 고양이의 형태로 있을 때에도 아름다운 그녀이니까.

“어머 저 고양이 좀 봐. 처음 보는 건데 무슨 종이지?”

“자세 꼿꼿한 것 좀 보소. 나는 개를 더 좋아하지만 저 고양이라면 내 강아지들 전부랑 바꿔도 좋을 것 같아.”

그런 말들이 건방진 묘족의 콧대를 더욱 높아지게 만들었다.

암젤이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너무 예쁜 것도 피곤하다옹.”

카페에 들어가서 조은영에게 문자를 보냈다.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

-저희는 오 분 전에 와서 이 층에 올라와 있어요.

-아;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손님이 많아서……. 어떻게 알아보죠?

-네? 하하;; 유명하신 분이 뭘 그런 걸 고민하세요. 제가 알아볼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가?’

하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통화할 때도 그녀는 꽤 들뜬 목소리였으니까.

일반인이라면 몰라도 같은 게이머라면 OG에 관심이 더 많을 수 있다.

예전에 인터뷰를 한 영상이 매스컴에 반복해서 노출되었으니 내 얼굴을 알아본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암젤과 함께 이층으로 올라갔다. 한적한 곳에 있는 카페이지만 제법 유명한 곳인지 이 층에는 손님이 더 많았다.

주위를 둘러보는데 누군가가 등을 탁 쳤다.

“길드장님.”

돌아보자 키가 작고 얼굴이 앳된 여자 하나가 서 있었다. 나이가 스물둘이라고 했는데 외견상으로는 고등학생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매지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어엿한 성인 마법사라기보다는 차라리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꼬마 마법사 같은 느낌이었다.

“조은영 씨?”

“네,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부끄러운지 눈길을 피하며 볼을 빨갛게 물들인다. 마치 연예인을 마주한 소녀팬 같은 반응이었다.

‘이것 참.’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