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
독식왕 : 클리어러 187화
초면인 내가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로치온의 안부까지 물었지만 파라얀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작게 숨을 삼킨 그녀가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네. 로치온도 당신에게 안부를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자기 옆에 있는 파로나에게 말했다.
“이분들은 우리와 동맹을 맺을 사이야.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돼.”
언니의 말을 듣고서야 파로나가 눈에 팍 주고 있던 힘을 풀었다. 알게 모르게 긴장하고 있던 다른 마법사들도 편안한 표정이 되었다.
“당신처럼 강한 마법사가 동맹이 된다니 아주 든든하네요.”
“성오 씨도 마법을 사용하는군요. 게다가…….”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이 나를 훑었다.
“상당한 실력자이시고요.”
“감사합니다.”
내가 현재 입고 있는 의상은 모르돈 세트였다. 의상만으로 마법을 사용한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었겠으나 그녀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부분을 꿰뚫어 보았다.
사실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을 통틀어서도 나는 그녀 다음가는 마법 실력을 갖추고 있다.
여동생인 파로나가 그나마 실력이 좋았지만 레벨은 고작 101에 불과했다.
그 뒤에 서 있는 마법사들은 기껏해야 60~70레벨 수준.
물론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은 마법뿐만이 아니다. 그 부분을 설명하지 않았는데도 파라얀은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로치온에게 얘길 들었을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아마 그녀에게도 ‘투시자의 눈’과 비슷한 능력이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양측의 분위기를 감지한 듯 메시지가 떠올랐다.
[69위 군주 파라얀과 동맹을 맺겠습니까?]
“그래.”
[동맹이 성사되었습니다.]
‘간단해서 좋네.’
나는 히죽 웃음을 짓고 나서 파라얀에게 말했다.
“됐습니다. 이제부터 저희는 동맹입니다.”
“참으로 신기하군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그녀는 다시 한번 방 안을 둘러보고 탄식을 내뱉었다.
“……신의 뜻인 걸까요?”
‘신이라…….’
나는 솔직히 그 부분은 확신할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을 설계한 능력은 가히 신급이었지만, 내가 이계를 평정하기를 바라는 의지가 분명한 데 반해 개입은 최소한으로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단지 나만 장기판의 말로 움직이려는 의도보다도 자기 능력이 제한적이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진짜로 전지전능한 신이었다면 보다 직접적인 방법으로 카오스 군주들을 응징했을 테니까.
‘어차피 추측일 뿐이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도 잘 모르겠네요. 어쩔 수 있나요? 이미 시작된 일이고, 이제는 돌이킬 수도 없는데.”
“훗.”
파라얀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성오 씨는 능력에 비해 영혼이 순수한 분 같네요. 솔직히 직접 뵙게 되기 전까지는 걱정이 있었지만 이렇게 만나고 나니 알겠습니다. 왜 로치온이 당신에게 그렇게 기대를 걸고 있는지.”
“기대만 하고 있지 말고 본인 일도 잘해달라고 전해주세요. 저 혼자 그쪽 일까지 다 감당할 수는 없으니까.”
“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파라얀은 용모도 대단히 아름답지만 말하는 태도나 분위기 또한 대단히 품격이 있었다.
목석같은 로치온이 왜 그녀에게 빠져들었는지 충분히 공감이 갔다.
나는 이대로 헤어지기는 멋쩍어서 질문을 했다.
“그쪽 사정은 좀 어떤가요?”
“정착은 별 탈 없이 마무리됐습니다. 아라돈은 물론이고 미리스도 착실히 세력을 키우고 있고요. 사실 크레도의 추격이 있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아직까지는 그런 낌새가 없어 다행입니다.”
“크레도요?”
익숙한 이름이었다. 베루니의 영지를 빼앗은 만다툼이 놈과 연결돼 있었고, 파라얀의 이력에도 같은 이름이 적혀 있었으니까.
내 반문에 파라얀이 의아한 낯빛으로 말했다.
“거기까지는 잘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그녀는 자기가 처했던 상황과 로치온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이력에는 간단한 내용만 적혀 있었으므로 나는 그녀를 통해 더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있었다.
‘벌써 16위 군주와 얽히게 되다니…….’
이 게임을 진행하며 가장 염려했던 것이 충분히 성장하기 전에 강한 상대와 맞부딪치는 일이었다.
“로치온도 발리아의 영지를 버리고 온 것을 아쉬워했습니다. 하지만 믿을 만한 새로운 군주를 찾는 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고, 그 땅에는 어쨌거나 크레도의 입김이 닿아 있으니까요.”
파라얀의 말을 듣고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피오리오와 아르바난을 67위 군주 자리로 보냈던 일.
특수 파티원을 군주로 삼을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해서 별생각 없이 보냈던 것인데 그 자리가 그렇게 위험한 곳인지는 몰랐다.
“음…….”
미간을 찡그리는 나를 보고 파라얀이 말했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 동맹들이 정착한 지역까지는 크레도의 마수가 뻗치지 않으니까요.”
“그게 아니라 제가 얼마 전에 67위 군주로 다른 동맹을 배치시켰거든요.”
“네?”
파라얀은 그게 무슨 뜻인지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기 때문에 나는 남아 있던 특수 파티원 소환권 한 장을 써서 파견 보낸 파티원 중 하나를 소환하려 했다.
그런데 그 전에 먼저 내 행동을 저지하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군주로 파견한 특수 파티원을 불러낼 때는 소환권을 사용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특수 파티원 소환권은 군주와의 대결이 있을 때만 소진됩니다.]
‘그런 거였군. 소환권을 아낄 수 있다면 나야 땡큐지.’
남은 것이 한 장뿐인지라 둘 중 한 명만 소환하려 했는데, 이렇게 되면 둘 다 소환할 수 있다.
[소환할 특수 파티원을 선택하십시오.]
나는 눈앞에 열거된 두 명의 이름을 차례로 터치했다.
번쩍! 번쩍!
두 줄기 강한 빛이 떨어지고, 방 한가운데에 익숙한 두 명의 인물이 나타났다.
피오리오는 식사 중이었는지 한 손에 기름기가 줄줄 흐르는 고기를 들고 있었고, 아르바난은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지 평소보다 가벼운 옷차림이었다.
둘 다 어리둥절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상황을 먼저 이해한 피오리오가 어깨를 으쓱했다.
“앞으로도 이렇게 예고 없이 불쑥 불러들일 거라면 평소에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겠네. 목욕이라도 하고 있었으면 내 알몸을 여과 없이 보여줄 뻔했으니까 말이야.”
“누가 들으면 평소에 자주 씻는 줄 알겠군.”
아르바난의 말에 피오리오가 난처한 얼굴로 대꾸했다.
“아, 누님. 쫌.”
아마 못 본 사이에 둘 사이의 서열 관계가 더 확실하게 정리된 것처럼 보였다. 둘의 실력의 우위를 따진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지만, 적어도 인간적인 관록은 아르바난이 우위에 있으니까, 어쩌면 이게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파라얀이 물었다.
“이분들은 누구시죠?”
“얘기하자면 긴데…….”
나는 그들이 누구이고 어떻게 한정적인 의미의 부활을 하게 되었는지 설명했다.
얘기가 끝나자 파라얀보다는 파로나가 더 격한 반응을 보였다.
“우와! 진짜 그 전설 속의 피오리오와 아르바난이라는 건가요?”
자기에게 관심을 보이자 아르바난이 미소를 띠고 물었다.
“그러는 그쪽 귀여운 아가씨들은 누구지?”
그 물음에는 내가 다시 한번 나서서 설명을 했다. 언제고 한 번은 쌍방 간에 소개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단순히 누구인지만 얘기한 것이 아니라 이계 군주들과의 동맹 관계에 얽힌 전반적인 이야기를 모두 해주었다.
“그렇군. 아가씨들의 가문은 나도 익히 알고 있지. 이미 수 세대가 지난 일이지만 얼마간 교류가 있었고 도움을 주고받은 적도 있어. 그 후손을 보게 되다니 감회가 매우 새롭군.”
아르바난의 얼굴에 손녀들을 보는 할머니의 미소 같은 것이 떠올랐다.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들이었지만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딱히 이의제기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파라얀이 고무된 표정으로 말했다.
“이분들이 아군이 되어준다면 앞으로의 일이 훨씬 수월해지겠네요. 아마 크레도조차 피오리오 님과 아르바난 님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가슴 아픈 현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시적인 부활을 했어도 예전의 실력을 백 퍼센트 되찾은 것은 아니에요. 제 옆에 있는 다른 동료들처럼 그분들도 저와 성장이 연동되어 있습니다.”
“아…….”
머리가 좋은 파라얀은 곧바로 사정을 이해했다.
“그럼 무엇보다도 성오 씨의 빠른 성장이 중요하겠네요. 저희가 도와드릴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얼마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뭐든 말씀해 주세요.”
나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계의 동맹 군주들이 내 성장에 도움을 줄 만 한 일…….
두 세상을 마음대로 넘나들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던전 공략이나 카오스 게이머 처치에 직접적으로 관여시킬 수는 없다. 간접적으로 대리인을 통해 함께 싸우는 방법이 있겠지만 그것도 여러 제약이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제 성장은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습니다. 파라얀 씨는 자신의 세력을 키우는 일에 집중하세요. 아시다시피 그쪽 세상의 일도 쉽지 않으니까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피오리오가 내 말끝에 입을 열었다.
“아르바난 누님과 내가 군주가 된 뒤로 좀 바쁘기는 했어. 어차피 오합지졸인 병사들이 달아난 것은 아깝지 않지만, 영지민들을 설득시켜서 안정을 찾기까지는 꽤 골치가 아팠더랬지. 그들 입장에서는 나나 아르바난 누님의 존재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을 테니까.”
나는 납득을 했다. 일반 영주민들 중에는 피오리오나 아르바난이라는 이름을 알지 못하는 이가 다수일 테고, 만약 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부활해서 돌아왔다는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불안을 느낀 영지민들이 대거 이탈을 하더라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우리가 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적들이 침입해 왔어. 다짜고짜 영지를 내놓으라고 하기에 나랑 아르바난 누님이 혼쭐을 내주었지. 반죽음 상태로 만들어 놓고 물어보니까 크레도가 보냈다고 하더군.”
“아, 역시. 추격이 없었던 게 그 때문이었군요. 피오리오 님과 아르바난 님이 막아주어서…….”
파라얀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피오리오는 들고 있던 고기를 한 번 베어 문 뒤 우물거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게 나쁜 측면만 있었던 건 아니야. 놈들을 물리친 일이 결과적으로는 영지민들을 결속시키는 계기가 되었지. 병사들 중에서 양심 있는 자들이 알아서 우리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전투를 하면서 어떤 녀석이 쓸 만한 재목인지 가릴 수도 있었으니까.”
“음…….”
나는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
“문제는 크레도가 당하고만 있지 않을 거라는 거네요. 이렇게 하죠. 어차피 크레도가 싸움을 걸어오는 곳은 피오리오와 아르바난의 영지일 테니까 그쪽으로 병력을 집중하는 겁니다. 68위 군주인 베루니에게도 연락을 취해 상황을 숙지시키는 게 좋을 것 같고요.”
내 말에 군주들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