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식왕 클리어러-186화 (186/245)

# 186

독식왕 : 클리어러 186화

Chapter 47 - 격돌 (1)

1

‘블리자드!’

우두두둑-

내 손에서 터져 나간 7서클의 마법이 동굴 공간을 새하얗게 얼려 버렸다. 더불어 몰려 있던 스티코이 다섯 마리가 한꺼번에 얼어붙었다.

가만히 놔두어도 생명력이 소모되어 죽게 될 테지만 그 전에 파티원들이 달려들어 얼음조각을 깨부쉈다.

트레앙이 도끼로 한 녀석을, 칼리타가 날카로운 발톱으로 한 녀석을, 그리고 암젤이 소환한 맹수들까지 합류해 모조리 산산조각을 냈다.

‘생각보다 효과가 좋은데?’

나는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물론 던전의 심층부까지 들어가는 동안 스티코이들이 점점 더 강해질 테지만 단순하게 말해 7서클 마법을 감당할 수 있는 몬스터는 없다.

마법의 숙련도를 걱정했지만 내게는 모든 클래스와 스킬의 숙련도를 최고도까지 올려주는 ‘초고속 클리어’라는 업적 효과가 있었다.

아직 가상현실게임에서 경험했던 것이 습관으로 남아 그때의 감각을 우선하게 되지만, 현실의 나는 그때보다 훨씬 빨리 성장하고 스킬의 습득 속도도 높았다.

‘그냥 오늘 던전 마스터랑 싸울 걸 그랬나?’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곧 머리를 내저었다. 가브리엘이 한국에 온다는 소식이 아직 들려오지 않는 지금 어쨌거나 레벨은 1이라도 더 올려놓는 것이 좋다.

더구나 어차피 이 던전을 공략하고 메인 페이즈 퀘스트를 달성해야 하므로 가능한 한 던전 퀘스트를 하나라도 더 달성해 놓는 쪽이 나았다.

“가자!”

나는 파티원들을 독려하며 거침없이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

2

‘마법사들의 동굴’이라고 불리는 B급 던전 공략 4일 차에 7층까지 공략을 마쳤다.

현재 레벨은 146.

1층을 공략하고 다 써버렸던 GP도 웬만큼 복구가 되어서 포션과 강화석을 보충했다.

던전 마스터인 게네아와의 싸움이 호락호락하지는 않겠지만 왠지 질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소 고전을 하게 될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뒤에 이어질 싸움을 대비한 예행연습이라고 생각하면 나쁠 것이 없다.

편안한 기분으로 침실로 들어섰는데 갑자기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비어 있던 69위 군주 자리를 파라얀이 차지했습니다.]

[유저는 지금부터 언제든 새로운 군주와 대결을 할 수 있습니다.]

[‘차원의 문 열쇠×1’을 얻었습니다.]

‘이건 또 뭐야?’

69위 군주라면 아마 제락스라는 놈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일 것이다. 비어 있는 군주 자리를 다른 자가 차지한다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다.

‘도전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방어전까지 치러야 하다니…….’

나는 잠시 고민을 했다.

군주전은 가볍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내일 B급 던전 마스터 게네아와 싸워야 하고 언제 가브리엘과 맞붙게 될지 모를 지금, 가능하면 쓸 데 없는 공력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일단 누군지를 알아야…….’

그런 생각이 들어 수보타를 호출했다.

3

내 이야기를 모두 들은 수보타가 장고에 들어갔다.

“파라얀, 파라얀……. 분명히 들어본 것 같은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아! 생각났습니다! 유명한 마법사 가문 출신입죠. 한때는 군주 자리까지 차지했던.”

“한때? 그 말은 군주 자리를 잃어버렸었다는 뜻이지? 그렇다면 복귀를 꿈꾸다가 비어 있는 자리를 차지한 건가?”

수보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합리적인 추측이십니다. 하지만 제 생각엔 그리 간단하게 볼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왜지?”

“제 기억이 맞다면 파라얀의 가문은 오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슷한 처지에 있던 다른 군주들처럼 카오스 군주들의 협공을 받아 무너지고 만 것이죠.”

“아…….”

나는 미처 떠올리지 못했던 가정에 고개를 끄덕였다. 가브리엘 쪽으로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새로운 군주는 모두 적이라고 생각해 버렸다.

현재 동맹을 맺고 있는 이계의 군주들 중 리더는 로치온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가 주도를 해서 이계 쪽 세력이 갖추어지고 있는 셈인데, 아라돈의 딸 미리스를 72위 군주 자리에 앉힌 것도 그의 머리에서 나온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69위 자리에 오더 성향 군주가 앉게 된 것도 그가 작업한 일은 아닐까?

“로치온과의 관계는 어때? 두 사람 사이에 접점이 있나?”

“음…….”

수보타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누구보다 오랜 세월을 살았기에 알고 있는 사실은 많지만 아무래도 작은 뇌에서 그것을 끄집어내기가 수월치 않아 보였다.

나는 그에게 머리가 좋아지는 아이템이라도 복용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참 생각한 끝에 수보타가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도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로치온은 아버지를 잃은 뒤에 은거를 했고, 파라얀의 가문도 크게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부족한 세력을 바탕으로 옛 영지민들을 지키는 데 급급했던 탓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상상력을 조금 보탠다면…….”

“보탠다면?”

“로치온과 파라얀은 둘 다 배필이 없는 젊은 남녀이고 이런저런 사연으로 만나 서로 사랑을 하게 됐다면…….”

“사랑?”

나는 로치온의 차가운 이미지를 떠올리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너무 비약이 심한 거 아냐?”

“원래 남녀는 끼리끼리 만나는 거라고 하지 않습니까? 로치온의 실력이야 주인님도 잘 아실 테고 파라얀의 가문 또한 마법으로는 유명하니까요. 선남선녀가 만났는데 불꽃이 튀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 아닙니까?”

이런 얘기를 하는 수보타는 마치 인생 경험이 아주 많은 노인처럼 보였다. 실제로 수만 년 동안이나 살았으니까 노인이 맞긴 하지만.

이성문제라면 크게 보탤 말이 없는 나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할 수밖에 없었다.

“네 말대로라면 둘 사이에 접점이 있었을 수도 있겠네.”

“네, 둘 다 부모를 잃은 고독한 입장이었으니 마음이 통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지만 수보타의 말을 듣다 보니 왠지 기정사실인 것처럼 느껴졌다.

꼭 연인이 아니더라도 이런저런 사연으로 둘 사이가 가까워졌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나는 문득 호기심이 생겼다.

과거 군주 자리까지 차지했던 이계의 마법사 가문은 얼마만큼의 실력을 가지고 있을까?

“네가 생각하기에 파라얀과 나 중에 누가 더 강할 것 같아?”

“솔직하게 말씀입니까?”

“응.”

“마법사로서의 능력은 막상막하이거나 파라얀 쪽이 약간 앞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인님은 마법사 능력만 갖춘 게 아니지 않습니까? 거기다 동료들의 능력까지 모두 감안을 하면…….”

수보타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당연히 주인님이 이기죠.”

“확실해?”

“넵. 제 목숨을 걸고 확언합니다.”

어차피 죽지도 않는 녀석이 목숨을 걸고 확언해 봤자 무게감은 전혀 없지만 어쨌든 그 말이 틀리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146레벨의 실력자가 일곱 명이나 있는데 69위 군주를 당해내지 못한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물론 파라얀이 순위를 뛰어넘는 실력을 갖추고 있을 가능성도 있지만, 수보타의 말을 들어보면 그 전까지 세력을 유지하느라 전전긍긍한 입장이었던 것 같았다.

나는 결심을 굳히고 말했다.

“좋아. 가 보자.”

4

한밤중에 호출이 됐지만 크게 불평을 하는 멤버는 없었다.

트레앙이 졸리지만 의욕이 충만한 목소리로 물었다.

“싸우러 가는 거양? 지금?”

당장 도끼를 꺼내 휘두를 것 같은 그녀에게 수보타가 사실을 일러주었다.

“싸우지 않고 끝날 가능성이 더 큽니다. 만약을 대비하자는 차원이지요.”

안 싸울지 모른다는 말에 트레앙이 화가 난 눈으로 수보타를 노려보았다. 외형은 어린아이지만 당장에라도 거인으로 변해 거실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을 수 있는 그녀이다.

기세에 눌린 수보타가 슬쩍 아린의 등 뒤에 숨었다.

준비가 갖춰지자 내가 차원의 문을 열었다.

열쇠를 꽂고 돌리니 거실 안으로 환한 빛이 쏟아졌다.

[오 분 뒤에 결투가 시작됩니다.]

파라얀의 가문이 오더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점, 그녀가 69위 군주 자리에 앉은 것이 로치온의 설계로 이루어진 일일지 모른다는 가정을 하더라도, 어쨌거나 군주전을 앞둔 상황에서는 조금 긴장이 되었다.

전에도 방심을 했다가 로치온에게 된통 당했었으니까.

그때 일을 생각하면 씁쓸한 마음이 들고, 언젠가는 되갚아주고 싶다는 생각도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큰 교훈이 되었다.

오 분이 지나자 방 안에 어지럽게 빛줄기가 내리쳤다.

그 안에 드러난 것은 로브와 스태프를 손에 든 마법사들이었다.

가상현실 게임에서 만난 마법사들은 여러 부류가 있다. 선의를 지닌 마법사나 악의를 지닌 마법사, 속세를 떠나 개인적인 연구에만 몰두하는 마법사들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보면 자긍심이 강하고 고집이 센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도움을 요청할 때는 예의를 갖출 것을 바라고, 적으로 만났을 때는 똥고집 때문에 스스로 자멸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한마디로 성가신 타입이라는 것.

모르긴 해도 이계의 마법사들도 크게 다르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중앙에 나타난 은색 머리칼의 여자. 그녀가 파라얀이 틀림없었다.

흰색 로브를 입은 그녀는 황갈색의 스태프를 쥐고 경이에 찬 눈으로 방안을 둘러보았다.

반면 그녀의 옆에 있는 다소 귀여운 용모의 여자는 날카로운 눈으로 이쪽을 주시했다. 표정은 살벌했지만 헐렁한 로브와 양 갈래로 얌전히 땋은 머리칼 때문에 그리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느껴지는 분위기는 적대감이나 살의와는 무관했다. 갑자기 이곳으로 호출되어 당황스럽기 때문일 수도 있으나 카오스 성향의 군주를 마주했을 때와는 분명 다른 느낌이었다.

‘역시 그랬군.’

상대는 싸움을 가정하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그런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파라얀이 입을 열었다.

“당신이 조성오인가요?”

“……네.”

나는 파라얀의 정보창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곧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레벨 199.

실력 있는 마법사 가문 출신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로 레벨이 높을 줄은 몰랐다. 189레벨인 로치온보다도 10이상 차이가 난다.

물론 클래스가 다르니 직접적인 비교는 안 된다 하더라도 이 정도 레벨의 마법사라면 8클래스 이상의 수준을 갖추고 있다고 보는 편이 맞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수보타를 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수보타는 나를 마주 보며 방긋 웃었다.

‘하긴……. 네 잘못은 아니지.’

아무리 이계에서 오래 살았다 하더라도 모든 것을 알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반면 수보타가 예측한 다른 사실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파라얀이 로치온과 연인 관계라는 것. 69위 군주 자리에 오른 것도 로치온의 권유였다는 사실이 이력란에 분명하게 적혀 있었다.

양측에 싸우려는 의도가 없는 이상 괜한 긴장감을 조성할 필요가 없어졌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반갑습니다, 파리얀. 로치온은 잘 있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