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식왕 클리어러-181화 (181/245)
  • # 181

    독식왕 : 클리어러 181화

    멀어지는 나와 파티원들의 뒤를 쫓는 관리소장의 안타까운 눈빛이 와닿았다.

    물론 서울에 몇 개 없는 B급 던전의 관리소장을 맡고 있을 정도라면 제법 괜찮은 지위에 있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인 게이머라면 그와 인맥을 만든다고 해서 손해 볼 것은 없을 것이다.

    그를 중심으로 능력 있는 게이머가 많이 연결되어 있을 것이니, 득이 많지 손해가 많을 거라고 보긴 어렵다.

    하지만, 귀찮은 건 딱 질색이니까.

    어렸을 때도 귀찮은 게 싫어서 온라인 게임은 잘하지 않았다. 게임 하나를 공략하면 얼른 다음 게임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친목 행위를 하다보면 쓸데없이 발목을 잡히는 일이 발생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어렸을 때도 게임을 잘했으므로 접근하는 사람 중에는 뭐라도 얻으려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걸 공짜로 알면 재미있나?’

    아이템을 파밍하거나 공략법을 연구하는 것도 게임을 하는 큰 즐거움 중 하나이다. 그걸 모른다면 진정한 게이머라고 보기 어렵다.

    물론 제작사에서 돈벌이 수단으로 일부러 아이템을 얻기 어렵게 해놓은 경우들이 제법 있지만, 그런 케이스를 꿰뚫어 보고 과감하게 게임을 접는 것도 참된 게이머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뭐, 어쨌든.’

    나는 우뚝 솟은 눈앞의 던전을 올려다보았다.

    이번에 공략할 B급 던전은 그 등급에 비해 규모가 크지 않다. 오히려 전에 공략했던 C급 던전들이 상대적으로 더 으리으리한 느낌이었다.

    이런 차이는 물론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특이한 경우에 해당한다.

    인터넷으로 조사하며 알게 된 사실인데 처음엔 여기가 B급 던전일 거라고 전혀 생각지 못했다가 큰 낭패를 보았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서너 번 더 공략할 때까지 수준이 낮게 설정되어서, 적지 않은 게이머가 희생되었다는 말이 있었다.

    내가 가상현실 게임에 있을 동안에 있었던 일이지만, 던전 출현 초기는 그야말로 혼돈의 시기였다.

    차차 던전과 게이머의 존재가 장기 침체에 빠진 세계 경제를 부흥시킬 수단으로 자리 잡긴 했지만, 그 존재에 대해 낙관하고 있는 지금도 이것이 이계의 음모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적다.

    새삼 내게 맡겨진 임무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생각하자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그런 마음보다는 이 게임이 가진 스케일에 벅찬 기분이 더 크긴 하지만.

    던전에 들어간 나는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들어간 던전에서 으레 그렇듯 눈앞에 퀘스트 목록이 쭉 나열되었다.

    이 던전을 가득 채우고 있는 몬스터의 이름은 ‘스티코이’이다.

    다른 종족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마법을 습득해 그중 소수만이 ‘마법사’가 되는 반면, 이 몬스터 종족은 날 때부터 한 가지 이상의 마법을 지니고 태어난다.

    고유의 마법을 진화시켜 더 성장하는 놈들이 있는가 하면 대부분은 처음 수준에서 더 발전하지 못하고 하급 마법을 부리는 데 그친다.

    아무리 하급 마법이라도 많은 개체수가 그것을 마구잡이로 뿌려대면 상대하기 곤란한 것이 당연하다.

    놈들은 본신의 방어력이 낮기 때문에 자기들끼리 조직적으로 움직이면서 약점을 보완하는 데 능숙했다.

    내가 이 던전을 공략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일종의 도박이었다.

    가상현실 게임에서도 스티코이 부락은 웬만하면 건드리지 않았으니까.

    얻는 것에 비해 고생이 더 큰 것이 바로 스티코이 부락 공략이었다.

    하지만 다른 B급 던전은 공략하는 데 적어도 한 달 이상이라는 물리적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그나마 규모가 작고 빨리 끝날 가능성이 있는 이 던전을 공략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더불어 마법 공격에 대비하는 연습도 하고 싶었다. 대개 수준 높은 적들은 마법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현실로 나오면서 게임을 다시 시작하게 된 입장이니, 대마법 숙련도를 체화하는 게 한 번은 꼭 필요한 일이었다.

    “가자.”

    내 뒤를 따르던 파티원들이 자연스럽게 포지션을 잡았다.

    맨 뒤에 서 있던 수보타가 창백한 얼굴로 용기의 물약을 복용하는 것이 보였다. 아이템을 마신 그가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왔다.

    매우 느리긴 하지만 수보타가 점점 용감해지고 있는 것은 좋은 현상이었다. 이런 류의 파티원은 처음 가져보는 터라 내게도 상당한 호기심이 있었다.

    과연 마법을 사용하는 적을 상대로도 그 능력이 빛을 발할 수 있을지…….

    2

    “끄악! 주인님! 살려주십셔!”

    수보타가 감전된 몸을 부르르 떨며 소리를 질러댔다. 그의 능력이 특이하다는 사실을 알아본 몬스터들이 발을 묶기 위해 경직 마법을 날린 것이다.

    수보타가 비록 불사의 몸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마법 공격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긴 했다.

    ‘생각보다 어려운데…….’

    나는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된 후로 매우 곤란한 지경에 처했음을 바로 깨달았다.

    처음부터 마법 대 마법으로 대항할 생각이었던 터라 의상도 모르돈 세트를 입었다. 130레벨 대의 마법사는 가상현실 게임 안에서도 결코 흔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존재감이 역으로 스티코이들을 신중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다른 건 몰라도 마법에 있어서만큼은 예민한 게 바로 이 몬스터 부족이었던 것이다.

    던전의 시스템 때문에 도망은 가지 않지만, 가뜩이나 엉덩이를 뒤로 빼고 싸우는 놈들이 신중한 전술을 펼치니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더구나 나는 마법을 방어할 효과적인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마법 대 마법으로 부딪칠 때는 기본적으로 상대 마법을 무효화하거나 상쇄할 수단이 있어야 한다.

    다섯 가지 속성을 다룰 줄 알지만 그것을 활용한 스킬의 숫자가 너무 적었다. 따라서 몬스터가 사용하는 마법 속성과 반대 속성을 이용해 싸움을 쉽게 전개한다는 계획도 녹록치 않았다.

    결국 나는 마법을 사용해 싸우는 걸 포기하고 소달루스 세트로 바꿔 입었다. 창술을 펼치고 화살을 날리자 이제야 싸움이 조금 쉬워졌다.

    ‘이러면 메리트가 전혀 없는데…….’

    이중, 삼중으로 전형을 짜고 전방에 있는 놈들이 공격 마법을, 후방에 있는 놈들은 디버프 마법을 날려댄다.

    헤이스트와 슬로우가 걸려서 공격하는 타이밍이 자꾸 어긋났다.

    “아우! 짜증 나!”

    가장 성질이 급한 트레앙이 불만을 토해냈다.

    “침착해! 흥분하면 안 돼!”

    그렇게 조언하는 아린의 이맛살도 잔뜩 찌푸려진 채였다.

    결국 일층을 공략하는 데 걸린 시간은 열한 시간. 포션도 무지막지하게 써서 비효율의 극치라고밖에 할 수 없는 공략이 되고 말았다.

    ‘내가 생각을 잘못 했나?’

    물론 가브리엘이 한국에 오기 전에 B급 던전 하나를 통째로 공략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한 것은 아니다. 단지 할 수 있는 만큼 레벨을 올려두고 싶었다.

    열한 시간 동안 레벨이 2 올라서 134가 되긴 했지만, 결코 만족할 만한 결과라고는 보기 어려웠다.

    ‘어떡하지…….’

    층을 내려갈수록 공략 시간은 더욱 늘어날 수밖에 없다. 난이도 면에서 볼 때 어쩌면 처음으로 공략을 포기해야 할 상황이 올지도 몰랐다.

    ‘이제 와서 던전을 바꿀 수도 없는데…….’

    하루가 급한 상황에 언제 또 다른 던전을 예약하고 공략을 하러 가겠는가?

    “주인님, 설마 한 층 더 공략할 건 아니라고 믿겠다옹. 집에 갈 거면 빨리 가자옹. 피곤해 죽겠다옹.”

    “그래.”

    암젤의 말에 동의하고 귀환서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문득 계단 옆에 있는 상점으로 시선이 갔다.

    “아…….”

    이곳 던전에 오기 전에 얻은 보상이 생각났다.

    아판테스의 눈.

    물건의 가치를 꿰뚫어 보고 상인의 비밀을 캘 수 있는 아티팩트.

    던전 안의 상점에서는 아이템의 가치가 투명하고 상인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이 아티팩트가 어떻게 작용할지 직접 사용하기 전에는 알기 어려웠다.

    게임을 하다 막혔을 때 그것을 뚫기 위한 비책 중 하나는 가능한 모든 변수를 활용하는 것이다. 어차피 해결책은 주어진 조건 안에서 나오는 법이니까.

    나는 내가 가진 아티팩트가 그런 변수가 되길 바랐다.

    “어디 가는 거냐옹? 상점은 내일 가도 되지 않냐옹! 나 피곤하다는 말 못 들었냐옹?”

    암젤이 바닥에 드러누워 앙탈을 부렸지만, 나는 그것을 본 체 만 체하고 상점으로 걸어갔다.

    암젤은 결국 쳇 하고 입소리를 낸 뒤 내 뒤를 따라왔다.

    한 번 업그레이드를 거쳤기 때문에 파티원들이 전부 들어와도 비좁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상점의 공간은 넓었다. 과연 200레벨이 되었을 때도 또 한 번 업그레이드가 될 지는 두고 볼 일이다.

    예상컨대 한두 번은 더 업그레이드가 될 여지가 있지 않을까 싶긴 하지만.

    나는 상품부터 고르던 평소와 달리 인벤토리를 열어 아티팩트를 꺼냈다. 보석 모양의 조그마한 아이템. 그냥 보아서는 어디다 써야 할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을 물건이다.

    만약 던전에 버려져 있는 걸 보았다면 값싼 결정석인 줄 알고 거들떠 볼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손바닥 위에 아판테스의 눈을 올리자 메시지가 나타났다.

    [아티팩트를 사용하시겠습니까?]

    “그래.”

    [한 번 사용하면 백년 간 다시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사용하시겠습니까?]

    “그래.”

    확인이 끝나자 손바닥 위에 놓인 아티팩트에서 밝은 빛이 분사되었다.

    여러 가닥으로 퍼진 빛줄기 안에서 홀로그램처럼 영상 하나가 나타났다.

    긴 곱슬머리를 늘어뜨리고 가닥가닥 꼬인 수염을 지닌 사내.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그가 전설의 상인 아판테스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뻥 뚫린 눈동자 안으로 빛이 스며들었다. 눈알을 되찾은 그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근엄한 태도로 오른손을 들더니 상점 안을 향해 검지를 뻗었다. 뭐라고 중얼거리는데 외계어처럼 알아듣기 어려웠다.

    잠시 후, 시야를 가득 채웠던 빛과 영상이 파편처럼 흩어져 모두 사라져 버렸다.

    “…….뭐야?”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이게 끝?’

    어떤 아이템들은 꼭 써야할 때 쓰지 않으면 어이없게 소모되고 만다. 보통 그렇게까지 유저를 낙담시키는 게임은 드물지만, 다시 얻을 수 없는 키 아이템이 허무하게 소멸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상점에서밖에 쓸 수 없는 아티팩트가 이곳에서 효력이 없다면…….

    앞으로 백 년간은 평범한 돌멩이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할 아판테스의 눈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상점 안에서 은은한 빛이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아판테스의 눈이 효력을 발휘합니다!]

    [전 상품의 가격이 1회에 한해 20퍼센트 디스카운트됩니다!]

    이어지는 메시지.

    [상품이 추가되었습니다.]

    “그렇지!”

    나는 실망할 뻔했던 마음을 되돌리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0